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97화 (297/1,329)

제10화 기적 (1)

다음 날 아침, 이준영 과장이 중환자실을 찾았다.

이상하게도 김지훈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과연 도움이 될지 확신이 서질 않아 밤새 뒤척였다. 도리어 위험에 빠트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더 앞섰다.

한철수가 항상 앉아 있던 의자를 지키고 있었다. 지난밤에도 중환자실 앞을 떠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눈가에 난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저런 존재여야 하는데.’

차마 깨울 수가 없어 조용히 중환자실 안으로 들어갔다.

김지훈이 한대현 앞에 앉아 졸고 있었다. 안쓰럽기만 했다. 자신이 보다 정확한 판단을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가를 비비며 한숨을 내쉰 이준영 과장이 간호사에게 물었다.

“어제 수혈은 얼마나 했어요? 전혈은 확보했고?”

“어제오늘 두 파인트씩 들어갔습니다. 전혈은 적십자에서 내일 다섯 개 보내 준다고 했고요. 그리고 어제 김지훈 선생님이 두 파인트나 피를 뽑아서 모두 일곱 개 확보했습니다.”

“김지훈이 벌써 피를 뽑았어요?”

“네. 적십자도 지금 피가 모자란다고 하고, 수혈 전 검사 때문에 미리 뽑아 놓는다고 하시던데요.”

이준영 과장이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당장 피가 모자라는 것도 아닌데 정말 피를 뽑아 놓을 줄은 몰랐다. 더구나 통상 뽑는 양인 한 파인트도 아니고 두 파인트였다. 몸에 무리가 올 것을 빤히 알면서도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그만큼 환자를 절박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음성에서부터 익히 알아 왔고, 이제는 김지훈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희한하게 웃음만 나왔다.

‘그래, 김지훈 네 말이 맞다. 너라면 환자가 위급할 때 분명히 옆에 있을 거야. 옮기자. 저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까지 있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을 것 같구나.’

이준영 과장이 조용히 중환자실 수간호사를 찾아 필요한 장비들을 요청했다. 마침 남는 장비가 있었고, 이준영 과장이 직접 말을 한 이상 협조하는 것이 당연했다.

바이탈을 체크할 수 있는 장비를 눈앞에서 확인하고, 병실까지 확보한 후에야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깨웠다. 화들짝 놀란 김지훈이 머리만 벅벅 긁었다. 킵을 한다고 하고는 잠만 내처 잔 것처럼 보이니 할 말이 없었던 탓이었다.

‘어후! 깜빡 졸았는데 하필이면 이때 오시냐.’

그 마음을 알았는지 이준영 과장이 슬며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김지훈, 환자 병실로 올리자.”

“예? 환자를 올리라고 하신 겁니까?”

“그래. 환자 아버님을 봐서라도 올리는 게 낫겠어. 밤새 밖에서 계셨던 것 같은데, 병실에 올라갔다고 달라지시지는 않겠지. 몸이라도 조금은 더 편하게 할 수 있을 테고.”

“예, 알겠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스테이션으로 간 김지훈이 차트를 보다 말고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괴로워했다. 도대체 언제 왔는지 모든 준비가 다 끝나 있었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잠시 얼굴을 찡그리던 김지훈이 환자에게 집중했다.

이제까지 60파인트가 넘게 수혈을 했고, 지금도 출혈을 하고 있는 한대현에게 희망이 있을까?

김지훈은 희망이 있다고 믿고만 싶었다.

문득 무너진 삼풍백화점에서 더 이상 생존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지만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중환자실 간호사들이 한대현을 병실로 올릴 준비를 하는 동안 금경태 과장과 회진을 돌았다. 여전히 한대현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았다.

“뭐? 아직도 출혈을 하는데 병실로 올린다고?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환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건 모두 이준영의 책임이야. 그러게, 애초에 건들지 말고 날 불렀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 아냐. 쯧! 능력을 알고 덤벼야지. 수술 몇 건 성공했다고 기고만장해서는…….”

금경태 과장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이준영 과장을 완전히 깔아뭉개고 있었다.

그런데 김지훈에게는 스승인 이준영 과장의 전적인 책임이라는 말만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안 돼.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할 수는 없어.’

김지훈이 이를 악물었다. 물론 최종 결정은 스승인 이준영 과장이 내렸지만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실수로 인한 문제를 만들 수는 없었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 이상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한대현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본관 6층 일반 외과 병동 간호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한눈에도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한대현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수술한 환자를 돌보는 것에는 상당히 노련한 간호사들이었다. 익숙하게 장비들을 세팅(setting)했다.

삐! 삐! 삐! 삐!

규칙적인 심장 소리와 혈압, 그리고 심전도 그래프가 모니터에 표시됐다. 김지훈이 만에 하나를 대비해 한철수에게 그래프를 보는 법과 반드시 연락해야 하는 사항을 설명했다.

한철수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며 몇 번이고 되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리한 일이었나? 아니지. 확신을 갖고 가자.’

콧등을 찡그리며 걱정을 하던 김지훈이 방법을 바꿨다.

“아버님, 궁금한 것은 그때그때 물어보시고, 만일 제가 없을 때 하나라도 이상하고 불안하다 싶으면 무조건 간호사에게 말씀을 하세요. 제가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한철수가 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자식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다시 한 번 주의할 사항을 말한 김지훈이 한대현의 손을 잡았다. 싸늘하기만 했다.

“한대현 씨, 아버님을 봐서라도 힘내요.”

한대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목소리를 언제 들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의학과 의사의 한계 때문이라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동안 한철수와 함께 침대 앞에 앉아 한대현을 보던 김지훈이 병실을 나왔다. 한철수가 급히 따라 나왔다.

“선생님, 피가 모자랄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최선을 다해 확보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중환자실 간호사들이 하는 말 다 들었습니다. 다행히 저도 대현이와 혈액형이 같으니까 제 피도 뽑아 주십시오.”

피가 모자란 경우 건강한 보호자들에게는 종종 수혈할 피를 뽑고는 했다. 당연하게 여기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철수의 말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아마도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아니요. 감사드려야 할 사람은 접니다. 선생님 같은 분들을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뿐입니다.”

차라리 원망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들을 이토록 믿는데, 정작 한대현을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괴롭기만 했다. 그래도 힘을 내야 할 때였다.

김지훈이 눈빛을 굳혔다.

“아버님 때문이라도 아드님은 반드시 일어날 겁니다.”

“대현이는 절대 이 정도에 쓰러질 놈이 아닙니다.”

한철수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아버지의 확신이었다.

김지훈에게는 한철수의 확신과 사랑이 힘이었다.

한대현이 일인실에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금경태 과장의 말에 강한 자극을 받은 김지훈이 틈만 나면 병실을 지켰다. 신현수와 손일석은 물론 서도진까지 병실 앞을 지날 때마다 한대현의 상태를 살폈다.

문제는 노력과 정성만으로 한대현이 좋아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출혈이 지속되면 의식이 흐려지다, 수혈을 하면 멀쩡해지는 상태가 반복됐다.

한대현은 그동안 입으로는 물 한 모금 먹지 못했다.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다른 사람의 피로 목숨을 연장했다. 그런데도 장기 기능이 유지되고 있었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지 11일째 되는 날이었다.

드레싱을 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오늘도 TV에서 삼풍백화점 붕괴를 다루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5백여 명이 죽고, 천여 명이 다쳤다. 전쟁 말고 이런 참사는 없었다.

TV를 보던 환자들이 안타까워하며 책임이 있는 자들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사고 원인과 당시 정황이 드러날수록 분노가 앞섰다.

건물 증축이라는 공사를 하면서도 안전을 책임지어야 하는 자들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물론 붕괴 조짐을 알고도 그깟 매출을 위해 무시한 자들은 모두 살아 있었다.

무책임의 극치이자 살인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이라는 말 이외에는 어울리는 단어가 없었다.

“개새끼들. 저런 것들이 사람이야?”

“어떻게 사람 목숨을 돈으로 계산할 수 있을까? 나쁜 놈들. 저런 놈들은 남대문 앞에서 모조리 총살을 시켜도 모자라.”

무수하게 들은 말들이었다. 욕을 한다고 해서 꽉 막힌 가슴이 뚫리진 않았다. 도리어 말뿐이라는 자괴감에 더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 갑자기 화면이 바뀌며 흥분을 못 이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속보! 붕괴 11일 만에 생존자 구출!

만 20살의 젊은 남자가 살아 돌아왔다. 열흘이 넘도록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과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잃지 않은 것이다.

기적이었다.

환자들이 벌떡 일어나며 박수를 쳤다. 눈물을 흘리며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온 병동이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가슴이 떨릴 정도로 벅찬 감정에 멍하니 TV만 보던 김지훈이 드레싱을 하다 말고 복도를 달렸다.

한대현의 병실은 조용했다. 한대현 역시 죽음과 싸우고 있기에 차마 삼풍백화점의 참상을 알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려야 했다.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급히 달려온 김지훈이 병실 문을 왈칵 열고 들어섰다. 다행히 수혈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식이 명확한 상태였다.

김지훈이 힐끗 한대현을 보며 TV를 틀었다. 한철수가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붕괴 11일 만에 생존자 구출!

만 20살의 젊은 남자!

지금도 감격에 찬 목소리와 환호성이 온 병실을 울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김지훈의 행동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한철수도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버님, 정말 대단하죠? 저런 곳에서 열흘도 더 묻혀 있었는데 살아 있었네요.”

김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한철수가 한대현의 손을 꼭 잡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대현아, 저걸 좀 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삶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넌 반드시 일어날 수 있어. 대현아! 힘을, 제발 힘을 내자.’

아버지의 간절한 염원이었다. 그러나 죽은 것처럼 누운 채 모든 의욕을 잃은 한대현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대현이 슬며시 눈을 떴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라 관심도 가지 않았지만, 계속되는 방송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어렴풋이 짐작을 했다.

고개를 돌리자 화면에서 처참하게 무너진 백화점이 보였다. 한대현에게도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곧 살아 돌아와 다시 태양을 마주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똑같은 나이의 한 젊은이가 열하루 만에 기적적으로 구출된 것이다. 아니, 구출된 것이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는 강한 의지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순간, 단 한 가지 생각이 한대현의 뇌리를 스쳤다.

‘어떻게 버틸 수 있었지?’

생존자나 자신이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것이나, 다른 사람의 피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낼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살고 싶어졌다. 아니, 처음부터 지금까지 살고 싶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차라리 눈앞이 흐릿해지며 몽롱할 때가 편했다. 의식이 또렷해지면 어김없이 찾아와 온몸을 사로잡는 공포에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나도 살고 싶어. 정말 살고 싶다고.’

한대현의 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가슴이 터지도록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무언지 모를 두려움이 입을 꽉 다물게 했다.

삐! 삐! 삐! 삐! 삐!

심장박동 수가 치솟았다. 김지훈이 급히 혈압을 체크하며 한대현의 상태를 살폈다. 혈압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올라갔다. 극심한 감정적 동요였다. 깜짝 놀라 자신만 보는 한철수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

한철수가 나직한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한대현의 손을 잡았다. 차갑기만 한 아들의 손에 아버지의 온기를 전했다.

“대현아, 아빠 여기 있다.”

한대현이 한철수의 손을 놓칠 수 없다는 것처럼 꽉 잡으려 했다. 지난 2주 동안의 출혈은 젊고 건장했던 사내의 힘까지 뺏어 갔다. 한철수가 벌게진 눈가에 힘을 주며 앙상하게 마른 아들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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