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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294화 (294/1,329)

제8화 충격 (3)

그동안 홍조를 띠던 한대현이 안색과 결막이 창백해 조금은 걱정했는데,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나빴다.

최소한 10~11 이상 나와야 할 혈색소 수치가 7까지 떨어져 있었다. 급기야 소변량까지 확연하게 줄기 시작했다. 재수술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간 기능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제길! 뭐가 잘못된 거지? 이제 와 출혈이 심해질 이유가 없잖아. 후우! 일단 수술 준비부터 빨리 해 놓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아파 왔다.

“간호사, 전혈(whole blood) 두 파인트 준비하고, 적혈구 농축액도 세 파인트(pint or pack:혈액 단위) 추가로 준비해 줘요.”

“출혈이 그 정도로 심해요?”

“심각하네요. 이준영 선생님께 노티하고 올 테니까 바이탈 좀 잘 체크해 줘요. 무슨 일 있으면 응급실로 연락하고요.”

전체 파트를 다 취합하면 간혹 재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 경험한 것은 예전에 정갑수가 사고를 쳤던 환자 한 명이 다였다. 금경태 과장 파트였는데도 미안해서 환자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중환자실을 나간 김지훈이 한철수를 힐끗 쳐다만 보고는 응급실로 향했다. 미안한 마음에 차마 설명을 할 수 없었고, 더욱이 재수술은 이준영 과장이 전적으로 결정할 사항이기 때문이었다.

노티를 받은 이준영 과장이 바로 중환자실을 찾았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본 한철수의 얼굴이 무척이나 불안해졌다. 하지만 확실한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뚝! 뚝! 뚝!

1분에 열 방울은 떨어졌다. 대략 하루 만에 1,000cc 가까이 피를 잃는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건장한 성인이라고 해도 버틸 수 없는 양이었고, 지켜볼 수 있는 한계를 훌쩍 넘어서고도 남을 속도였다.

“김지훈, 내가 빼먹은 부분이 있었나?”

이준영 과장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재수술이 주는 스트레스가 아무리 극심하다고 해도 이기지 못할 이준영 과장이 아니었다. 경험이 없는 김지훈이라면 몰라도 이상한 일이었다.

“제가 보기에는 없었습니다.”

“아니야. 놓친 부분이 없을 수가 없어. 잘 생각해 봐. 보호자에게는 내가 얘기할 테니까 마취과에 스케줄부터 내. 바로 해야 한다고 해.”

김지훈이 재빨리 수술 스케줄을 작성하고, 서도진에게 응급 수술이 있다고 연락을 했다. 마취과에 다녀오는 사이, 어느새 중환자실로 내려온 신현수가 보호자를 만나고 있는 이준영 과장 옆에 서 있었다.

이준영 과장이 한철수를 바라만 보며 입을 열지 못했다.

‘이제는 벗어난 줄 알았는데,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하고 있었구나.’

비장절제를 한 어머니를 수술 후 출혈로 잃었다. 비록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고 하지만, 재수술을 해야 하는 이준영 과장의 심적 부담은 상상외로 컸다. 그동안 자식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던 한철수의 바람과 노력 때문인지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한참 만에야 이준영 과장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재수술에 들어간다는 말에 한철수가 충격을 받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공연히 시간을 뒤로 미루다가는 한대현의 상태만 나빠질 뿐이었다.

신속하게 수술이 준비됐다.

겁에 질린 한대현이 어머니를 찾았다. 그 자리를 대신한 한철수가 중환자실에서 수술 방으로 옮겨지는 동안 아들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도리어 수술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에게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대현아, 아빠가 여기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버지.”

다 큰 아들이 아버지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입술을 꽉 깨물며 안심하라는 듯 손을 흔들던 한철수가 돌아섰다. 수술 방의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새우등처럼 굽은 등을 펴지 못했다.

재수술이 시작됐다.

복벽을 열자 장기들 사이에 고인 피가 보였다. 깨끗이 세척을 하고 본격적으로 출혈 부위를 찾았다. 그런데 특별한 출혈 점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나 확인을 했지만, 자르고 묶은 간 문맥은 물론 어디에서도 출혈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장기 손상을 놓쳤던 것일까?

혹시나 몰라 다시 한 번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역시 출혈 부위는 없었다. 의아한 일이었다.

잠시 배 속을 보던 이준영 과장이 한숨을 내쉬며 묘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다행히 내가 실수를 한 것은 없지만,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는 상황이군. 환자 아버지가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도대체 어디서 피가 나오는 것일까?

김지훈으로서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직접 리트랙터를 끌며 배 속을 다시 확인하려고 하자, 이준영 과장이 지그시 리트랙터를 누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징(oozing)이다. 기다려.”

단어가 뜻하는 그대로 우징(oozing)은 손상 받은 조직 전체에서 피가 조금씩 천천히 새어 나오는 것을 뜻한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의아한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배 속 장기의 염증이 심하거나, 광범위하면서도 얕은 손상을 받았을 때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시간이 가면 쉽게 멈출 수밖에 없는 출혈이었다. 그로 인해 재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심한 출혈이 야기되는 경우를 본 적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던 이준영 과장이 수술 부위를 확인했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동시에 나지막한 소리를 터트렸다.

간의 절단 부위는 물론 횡경막을 포함한 주변 조직에서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심지어 드레인을 넣기 위해 뚫은 상처에서도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나하나 보면 소량에 불과했지만, 우징이 되고 있는 부위가 넓은 탓인지 어느새 간 주변에 피가 고여 있었다. 이런 경우 수술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었다. 내과적인 문제가 원일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일단 닫자. 내과 혈액 파트에 바로 문의해. 보호자에게도 이 환자에게 혈액 질환이 있었는지 다시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선생님.”

드레인을 교체하고 배를 닫았다.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재수술은 불과 한 시간 반 만에 끝났다.

수술 후 한철수를 만나 한대현에게 특별한 병력이나 증상이 있었는지 물었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는 대답만 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한대현을 보는 김지훈과 신현수의 얼굴이 펴지질 않았다. 혈액 응고에 문제를 발생시키는 질환은 학교 다닐 때 배운 것이 다였다. 더구나 흔치 않은 질환일 가능성이 높았다.

“현수야, 이거 일반적인 질환이 아니겠지?”

“그랬으면 이미 검사상에 나타났겠지.”

“아침에 컨설트 보고 검사 나가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네. 미안하지만 정식이한테 연락을 해야 되겠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한참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었지만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결국 김지훈이 공정식에게 연락을 했다. 잠에 취해 횡설수설하던 공정식이 상황을 이해하고는 급히 달려왔다.

“우징인데 재수술을 했을 정도로 출혈이 심하다고?”

“그래. 직접 확인해 봐.”

김지훈이 한대현의 배에 박힌 심지를 노출시켰다.

뚝! 뚝! 뚝!

지금도 혈액 응고에 문제가 있는 질환이 없고는 보일 수 없는 속도로 출혈이 되고 있었다. 공정식이 그동안 했던 검사 결과들을 꼼꼼히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검사가 왜 이렇게 깨끗하지? 이 정도면 하다못해 백혈구나 혈소판 숫자라도 변해야 하는데. 지훈아, 일단 기본적인 혈액 응고 검사부터 내보내고, 아침에 교수님께 내가 직접 말씀드릴게.”

기본적인 검사라고 한 공정식이 무려 여덟 가지나 되는 검사를 냈다. 역시 메디칼 파트의 대표인 내과다웠다.

잠시 오더 내는 것을 지켜보던 김지훈이 물었다.

“당장 수혈을 해야 하는데, 전혈(whole blood)로 하는 게 낫겠지?”

“뭐가 부족한 건지 모르니까 전혈이 좋겠어. 만약 전혈이 없으면 농축적혈구하고 동결혈장을 동시에 투여해.”

이것저것 궁금한 사항을 나누다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됐다. 외과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있었지만, 원인을 빨리 찾는다면 한대현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부디 희귀한 질환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음 날, 외과와 내과 의사들이 수시로 한대현의 상태와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특별한 이상이 보이질 않았다. 심지어 임상병리에 부탁해 백혈병에 관한 부분까지 최대한 빠르게 확인했다. 역시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출혈은 여전했고, 심한 빈혈 상태에 빠진 한대현의 의식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급히 혈액 응고 인자들을 정밀하게 검사하기 위한 추가 검사가 나갔다.

김지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수혈을 하며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전혈 두 파인트가 들어간 후 한대현의 의식이 말짱해졌다.

‘후우! 빈혈이 심하니까 별일이 다 생기네. 그나저나 빨리 원인을 찾아야지, 이러다 정말 문제 생기는 거 아냐?’

외과 전공의에겐 정말 답답한 일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수술을 두 번이나 했고, 간 손상이 워낙 큰 상태기 때문에 전과를 시킬 수도 없었다. 내과 입장에서도 한대현과 같이 큰 수술을 받은 환자를 맡기에는 상당한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지훈이 중환자실을 떠나지 못했다. 한대현의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었고, 아침저녁으로 면회를 들어오는 한철수의 얼굴도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금요일이 지나고 토요일이 왔다.

주말 집담회가 열렸다. 이번 주에 있었던 수술에 대한 질문 시간이 왔다.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던 금경태 과장이 힐끗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한 주 내내 간 절제를 한 한대현의 상태를 주시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금도 출혈을 한단 말이지. 한대현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자칫 이준영 널 띄워 줄 수도 있지만, 그 정도는 물러설 수도 있어. 신현수의 관점이 변한 이상 나도 조금은 변해야 하지 않겠나.’

이준영 과장의 서울 입성에 이어 이혁민 교수와의 미묘한 충돌, 그리고 신현수의 논문 문제까지 금경태 과장에게는 악재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감정에 휘말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논문 문제까지 터지면서 도리어 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감정을 앞세워서는 절대 상황을 타개할 수 없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냉철한 판단하에 자신의 야심을 숨길 수 있는 절묘한 처신이 필요했다. 지난 시절 대부분을 그렇게 살아왔기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김지훈, 한대현 환자 말이야. 재수술을 했다고? 지금 상태가 어때?”

“예. 바이탈은 안정적입니다만, 아직도 우징(oozing)이 심한 상태입니다. 어제 전혈 두 팩을 수혈한 후 아침 검사 결과는 정상적이었고, 환자 의식도 깨끗합니다.”

“그래? 정말 출혈 부위가 확실하게 없었어?”

“재수술 당시 특별한 출혈 부위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원인은 알아냈나?”

“내과와 함께 혈액 응고 이상에 관한 검사들을 시행했습니다만, 아직 특별한 이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추가 검사가 다시 나간 상탭니다.”

누구나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이자 대답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혀를 찼다.

“그럼 내과적인 원인만 찾고 있다는 말인데, 간 절제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합병증이 상당히 많아. 특히 외상의 경우 과도한 절제는 물론 손상 부위가 너무 많이 남아 있어도 이상 출혈을 일으킬 수 있어. 그 점이 수술 당시에 고려됐나?”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함부로 대답하기 힘든 문제였다. 그런데 금경태 과장이 손짓까지 하며 김지훈만의 답을 원했다.

“퍼스트를 섰으면 답을 할 수 있어야지. 김지훈, 네 의견을 말해 봐. 집도의의 판단과 결정을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 역시 퍼스트가 해야 할 일이야.”

뜻밖의 말이었다. 마치 전공의들 모두에게 퍼스트란 무엇인지를 알려 주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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