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91화 (291/1,329)

제7화 수술은 치료의 끝이 아니다 (2)

손일석과 노닥거릴 기분이 아니었다.

“어디 가?”

“중환자실에. 어제 수술한 환자의 피가 멈추질 않네.”

“간을 반도 넘게 잘랐다며. 외상으로 간이 그 모양이 됐는데 피가 쉽게 멈추겠냐. 모르긴 몰라도 환자 컨디션만 괜찮으면 며칠 더 나오다가 멈추겠지.”

“그렇겠지? 에이!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모두들 하는 말이었다. 분명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상할 정도로 불안해, 지금 당장 출혈량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일어섰다.

그때 신현수가 들어왔다. 손일석이 신현수를 보다 말고 어깨를 움찔거렸다. 얼굴이 뜨기는커녕 평상시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김지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손일석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현수야, 너 괜찮아? 별일 없지?”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수술실에서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손일석이 말꼬리를 흐리자 신현수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들고 들어온 차트를 펼쳤다. 신 나게 타고 있을 때 한창 수술 중이었던 환자의 차트였다.

‘나도 이제 많이 타 봐서 그런가? 이준영 선생님과 이혁민 선생님이 왜 고맙게 느껴지지?’

자신의 모자람을 크게 질책받고도 기분이 좋을 줄은 몰랐다. 이혁민 교수에게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탔지만 가슴이 뿌듯했다. 신현수에게는 정말 희한한 일이었다. 가자미눈을 한 채 신현수를 보던 손일석의 예리한 촉이 발동됐다.

“야! 다들 맛이 가는구나. 지훈이 저 자식은 정신력으로 버틴다지만, 현수 넌 뭐냐? 너 왜 눈가에 주름을 잡고 난리야?”

“뭐가?”

“희한해서 그런다. 타고도 좋아하는 놈이 또 있었네.”

손일석의 말이 맞는지 신현수가 정색을 하며 차트로 시선을 돌렸다. 김지훈도 그 모습이 상당히 놀라운지 잠시 신현수를 보다 중환자실로 향했다.

어느새 날이 지나 새벽 1시가 넘었다. 한철수가 지금도 중환자실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한대현의 상태를 확인했다. 출혈량이 조금씩 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이준영 과장에게 노티를 했다.

급히 중환자실로 올라온 이준영 과장이 30분이 넘도록 환자 앞에 앉아 드레인을 통해 나오는 피의 양을 확인했다. 거즈 두세 장의 일부분이 살짝 젖는 정도였다.

“아직은 지켜봐도 되겠다.”

나직한 숨을 내쉰 김지훈이 다시 드레싱을 하고는 부리나케 이준영 과장의 뒤를 따랐다. 한철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피가 계속 나오는 이유는 많습니다만, 현재로서는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더 늘지만 않으면 좋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재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재수술이라니요?”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간이란 장기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드님이 특별한 질환을 않은 적이 없다고 하셨죠?”

“예. 건강했던 아이입니다.”

이준영 과장이 한참 동안 한철수에게 환자 상태를 설명한 후 응급실로 내려갔다. 초조한 기색으로 의자에 앉아 있던 한철수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났다.

목요일 아침 조금씩 늘던 출혈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보였다. 이준영 과장과 김지훈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검붉게 물든 거즈를 보았다. 워낙 간 손상이 커 어느 정도 출혈이 지속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하루에 몇 장이나 젖겠어?”

“어젯밤 마지막 드레싱까지는 별 변화가 없었습니다만, 대여섯 시간 만에 이 정도 젖었다면 하루에 스무 장 가까이 풀로 젖을 것 같습니다.”

거즈 한 장을 푹 적실 정도의 혈액량은 대략 10cc 정도로 계산한다. 따라서 하루에 200cc 이상의 출혈이 발생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심지를 타고 나오지 않고 배 속에 고이고 있을 혈액까지 계산하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혈액 검사 결과는?”

“혈색소와 혈소판 수치 모두 정상 범위 내에 있습니다.”

“흐음! 그럼 간 어디에선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다는 소리긴 한데, 출혈량이 너무 애매모호해.”

이준영 과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출혈량이 적으면 시간이 걸려도 결국에는 멈춘다. 하지만 어느 한계를 넘으면 다시 배를 열어 출혈 부위를 확인하고 지혈을 해야 한다. 다른 수술을 한 환자의 경우에 하루 200cc 이상의 출혈이면 이미 개복을 하고도 남을 양이었다.

문제는 간 손상을 크게 입은 한대현의 경우, 그 한계가 어디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환자 상태 및 검사 결과를 종합해 판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 더 지켜보자. 내일도 출혈량이 줄지 않으면 신중하게 재수술을 고려하는 수밖에 없겠어.”

이준영 과장은 물론 김지훈의 안색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재수술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외과 의사들에겐 극심한 스트레스였다.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무엇인가 빠트린 것은 아닌지 온갖 불안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반드시 수술적인 문제만이 출혈을 야기하진 않았다. 대량 출혈이나 수혈 중 한꺼번에 혈소판이 소모돼 일시적인 혈소판 감소나, 혹은 기능 이상을 유발할 수도 있었다.

한대현의 경우 혈소판 기능 이상 때문에 출혈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4일이나 지난 후였다. 가능성이 많이 떨어지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일단 염두에 둘 가치는 있었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워낙 출혈과 수혈량이 많아서 혈액 응고가 잘 안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농축혈소판을 두 팩(pack) 정도 수혈하겠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농축혈소판 제제는 채혈된 혈액을 6시간 내에 분리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빨라도 오후나 돼야 수혈을 할 수 있었다. 김지훈이 즉시 수혈 오더를 내렸다.

이준영 과장이 한철수를 만났다. 오늘도 밤새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는지 눈이 뻘겠다. 한대현의 상황을 들은 한철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출혈량이 줄지 않으면 재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연락처를 남겨 주시고, 가급적이면 두 분 중 한 분은 병원에 있으셨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낮에는 아이 엄마가 있고 밤에는 제가 있으니까, 혹시 그런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해 주십시오.”

김지훈에게 잠시 눈길을 준 이준영 과장이 퇴근을 했다.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그 시간 한철수는 피곤이 역력한 얼굴로 출근을 준비했다. 병원을 나서는 한철수의 어깨와 발걸음도 한없이 무거워만 보였다.

목요일은 수술이 없는 날이었다. 하루 종일 중환자실에서 킵을 하며 출혈량을 살폈다. 다행히 농축혈소판이 점심때 도착했다. 한 팩당 50cc 정도에 불과한 농축혈소판이 빠르게 한대현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수시로 드레인을 확인하던 김지훈이 한숨을 쉬며 혀를 찼다.

‘이쯤이면 효과가 나타날 것도 같은데 줄지를 않네. 몇 번이나 확인을 했는데 정말 놓친 곳이 있는 걸까?’

불길한 예감이 든 김지훈이 당직실로 들어가 한동안 전화기를 보며 고민을 했다. 어제가 오프였지만 한대현 때문에 잠깐 고경아의 얼굴만 보았다. 목요일인 오늘 역시 오프기도 했고, 한대현도 곧 좋아질 것이란 생각에 다시 약속을 했다. 그런데 뭔가 찜찜한 기분에 오늘은 꼭 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고경아가 수술 방에 있을 시간이라 연락하기가 애매모호하다는 점이었다.

시계를 보니 6시가 막 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집에 도착할 시간이니까, 그 시간에 맞춰 전화하는 게 낫겠다. 괜히 수술 방에 전화했다가 경아 씨 입장만 난처해질지도 몰라.’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와 간호사의 연애는 언제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마련이었다. 사실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슬슬 누군가는 눈치를 채고 있겠지만 대놓고 알릴 이유는 없었다.

기지개를 펴며 당직실을 나온 김지훈이 한동안 한대현의 상태를 다시 확인하고는 병동으로 향했다. 곧 금경태 과장이 오후 회진을 돌 시간이었다. 터벅터벅 계단을 오르던 김지훈이 귀를 쫑긋거렸다.

[일반 외과 김지훈 선생님, 손일석 선생님, 신현수 선생님. 응급실로 와 주세요.]

같은 방송이 계속 이어졌다. 단체로 환자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2년차들을 모두 호출한 것을 보면 상당히 큰 사고가 났다는 말이었다. 정형외과와 신경외과 전공의들까지 호출하는 방송이 이어졌다.

‘얼마나 큰 사고가 터졌기에 외과 전공의들을 다 불러?’

다른 어떤 업무보다도 우선해야 하는 것이 응급 상황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응급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뛰었다. 사이렌 소리로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응급실 문을 열자마자 10여 명의 환자들이 보였다. 인턴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환자를 보고 있었다.

환자들의 모습이 이상했다. 먼지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하얗게 된 채 고통을 호소하거나, 아니면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응급실 간호사가 다급한 목소리로 김지훈을 불렀다.

“선생님, 처치실에 환자 두 명 있어요.”

젊은 여자 환자들이었다. 그들 역시 온몸이 먼지투성이였고, 정신이 없는지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육안으로는 상처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김지훈이 가위로 여기저기 찢어진 환자들의 옷을 잘랐다. 고스란히 속옷이 드러났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팔과 다리부터 촉진을 시작했다. 골절이 의심되는 부위는 없었다. 청진이나 흉부 사진에서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온몸 여기저기에 심한 찰과상만 입은 상태였다.

“간호사, 이 환자들은 수액 달고 지켜봅시다.”

처치실을 나간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응급실 전체가 환자들로 가득했다.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이었다. 환자들이 움직일 때마다 허연 먼지 가루가 자욱하게 퍼졌다.

멍한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환자.

침대가 모자라 의자에 앉은 채 울고 있는 환자.

신음을 흘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

너무 많은 환자가 한꺼번에 밀려들어 와 응급실 인턴은 물론 외과 전공의들까지 정신이 없었다. 가장 심하게 보이는 환자를 처치실로 옮긴 김지훈이 크게 소리쳤다.

“환자분, 어떻게 다치신 거예요? 어디가 아프세요?”

“몰라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간호사 역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앰뷸런스는 환자만 내려놓고 바로 사이렌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사라졌기 때문이다. 119 대원들이 뭐라고 소리를 쳤지만 제대로 들은 사람도 없었다.

환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상태는 물론 어떻게 다쳤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온몸을 뒤덮은 먼지 때문에 일일이 옷을 벗기거나 찢지 않으면 상처조차 확인하기 힘들었다. 시간이 생명인 응급실에서는 최악의 경우였다.

가장 중해 보이는 환자들은 일차적으로 일반 외과가 먼저 보아야 했다. 바이탈부터 치명적인 손상의 유무까지 가장 먼저 판단해야 하는 과가 바로 일반 외과이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사고가 났기에 환자들이 이 모양이지?’

어떤 사고인지 묻고 들을 시간이 없었다. 환자 한 명당 진찰을 하고, 상태를 판단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다.

김지훈이 정신없이 환자를 보았다. 그 와중에도 환자는 계속 이송되고 있었다. 지금도 응급실 밖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간호사, 이 환자 수액 달고 정형외과로 보네요. 그리고 저 환자는 신경외과도 같이 봐야 합니다. 다음 환자 빨리 들여보내요.”

오더를 내는 동시에 어느 과에서 봐야 할지 알려 주어야 했다. 그렇게 봐도 시간이 부족했다.

그때 손일석과 신현수가 헐레벌떡 처치실로 들어왔다. 이미 응급실에 들어오자마자 상황을 파악했다. 가운을 걷어붙이고 바로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2년차들이 모두 동원됐지만 이마에 땀이 흐르고, 환자들의 몸에서 날린 먼지로 입안까지 텁텁해질 정도였다.

곧 모든 외과 계열의 전공의들이 응급실로 내려왔다. 빠르게 환자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사이렌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뜻밖에도 심각한 손상을 입은 것으로 의심되는 환자가 없었다.

처치실을 나와 시계를 보니 7시가 막 넘고 있었다. 그래도 실려 온 환자가 워낙 많아 응급실은 지금도 아수라장이었다. 대부분 다른 과 환자들이었지만 손이 달리는 이상 응급실을 떠날 수는 없었다.

환자를 보던 김지훈이 손일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석아, 무슨 사고가 났는데 이렇게 다친 사람들이 많지? 그런데 심하게 다친 사람이 의외로 몇 명 없네.”

“그러게. 건물이라도 무너졌나?”

농담처럼 던진 말에 자신도 우스운지 손일석이 피식 웃었다. 환자는 많았지만 중상을 입은 환자가 없다는 사실에 모두들 조금씩 여유를 찾고 있었다.

그때 응급실 밖에서 탄식처럼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때마침 응급실 문이 열렸다. 로비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벽에 걸린 TV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한탄과 걱정이 섞인 탄식이 계속 터졌다. 누군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뭔가 큰일이 벌어진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환자를 두고 한가롭게 TV를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환자와 함께 막 응급실로 돌아온 간호사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삼풍이 무너졌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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