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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286화 (286/1,329)

제5화 의사의 한계 Ⅰ (2)

김지훈만이 예외였다. 단 한 건의 수술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밤에는 응급 수술에 들어가고, 낮에는 하루 종일 서서 참관만 죽어라고 한 탓에 무릎이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1년차들은 물론 손일석까지 좋아 죽는 모습을 보면서도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비록 수술은 못 받았지만 낮에는 수술을 보고, 밤에는 스승님과 수술을 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어. 서두르거나 욕심내지 말자.’

실제로 그동안 금경태 과장의 수술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이준영 과장의 수술까지 새롭게 보였다.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 역시 금경태 과장의 덕분일지도 몰랐다.

더구나 간담도계는 처음이었다.

담낭 내 담석으로 인한 담낭염.

간 내 담석으로 인한 황달과 담도염.

간과 췌장 및 담낭에 발생하는 각종 종물과 암.

외상으로 인한 손상 등등.

빈도는 모두 다르지만 반드시 보아야 할 질환이었다. 환자에 따라 어떻게 수술하는지도 눈에 박아야 했다.

그런 면들까지 생각한다면 지난 3주는 대단한 의미를 가진 기간이었다.

신현수는 금경태 과장의 못마땅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준영 과장의 수술을 보고자 했다. 손일석은 신기동 교수와 혈관 수술을 한 날이면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 속에 숨은 열정과 의지는 대단한 자극이었다. 지치지도 않고 태우는 이준영 과장의 무뚝뚝한 말은 자칫 늘어지려 하는 몸과 마음을 바짝 추스르게 했다.

자칫 메마른 일상일 수도 있었지만 김지훈에게는 고경아가 있었다. 만남 그 자체가 삶의 활력소이자 행복이었다.

모든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잘 풀리고 있었다. 아직은 짧기만 한 시간과 경험이었지만,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3주가 막 지난 주말 토요일 오후에 78세 남자 환자가 응급실로 내원했다. 먼저 환자를 본 공정식이 직접 콜을 했다. 내과 역시 100일 당직 기간이 끝났는데 2년차가 연락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환자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말이었다.

이제는 1년차가 먼저 환자를 보아야 했지만, 직접 연락을 받은 이상 함께 보는 것이 다른 과에 대한 예의였다.

환자를 본 김지훈과 신현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우상복부의 동통과 오한을 호소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안색은 창백했고, 손발은 검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사지 말단의 혈류가 좋지 못하다는 의미였다.

“간호사, 바이탈은 어때요?”

“혈압은 90/60이고, 체온은 38.8도예요. 박동 수는 100회가 넘고, 호흡수도 분당 30회 이상이에요.”

김지훈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고열과 낮은 혈압 및 빈맥, 그리고 환자가 보이는 증상들은 패혈증을 강력하게 암시했다. 최대한 빠르게 패혈증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지 않으면 고령이라는 문제까지 겹쳐 사망에 이를 수가 있었다.

“정식아, 현수야, 패혈증 초기로 보이지? 원인인 급성 담낭염일 가능성이 제일 높아 보이는데 어때? 아니면 간 병변?”

신현수와 공정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훈과 얼굴을 마주친 서도진이 재빨리 움직였다. 100일 당직 동안 혹독하게 받은 수련은 서도진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 환자에 대한 자세한 병력 청취는 물론, 혈액과 소변 검사 및 방사선 검사까지 빠르게 시행됐다.

순차적으로 결과가 나왔다. 그때마다 2년차들이 눈가를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나온 복부 CT를 본 김지훈이 눈가를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또 뭐냐. 지켜볼 여유가 전혀 없네.’

신현수나 공정식도 한숨만 내쉬었다.

담낭과 담도를 연결하는 관에서 검은 점이 여러 개 보였다. 전형적인 담석 소견이었다. 진단은 담낭 내 담석으로 인한 급성 담낭염이었지만, 문제가 간단하지 않았다.

담석이 담낭 입구를 막아 담즙이 제대로 배출되지 않는 상태였다.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정체된 담즙이 썩으며 감염을 일으켰고, 이것이 혈류로 퍼지며 패혈증까지 유발한 것이다.

더구나 통상의 크기보다 거의 두세 배 이상 커진 담낭 벽이 마치 종잇장처럼 얇아진 상태였다. 당장 터져 복막염을 유발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단 1분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지훈이 신현수를 보았다.

“현수야, 수술 스케줄 좀 부탁해. 아무래도 도진이 혼자 마취과에 올라갔다간 검사 결과만 보고 마취를 지연시킬 수도 있겠어.”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취과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최악의 환자였다. 외상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질환이었다. 드물다고 해도 패혈증을 동반한 고령 환자가 마취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보호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환자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취 사고라도 난다면 과실 유무를 떠나 큰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다. 때문에 경험이 적은 1년차보다는 2년차 이상이 직접 설명을 해야 마취를 순조롭게 걸 가능성이 높았다.

신현수가 수술 방으로 올라간 사이, 김지훈이 차트와 엑스레이 필름을 들고 이준영 과장을 찾았다. 환자 상태를 들은 이준영 과장이 복부 CT를 보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마취와 수술 시간을 줄여야 하는 환자군. 게다가 담낭 벽이 이 정도로 얇아졌다면 간으로까지 염증이 퍼졌을 가능성이 농후해. 무리하게 절제를 시도하다가는 간 손상까지 주겠어. 최대한 빠르게 담즙 배출만 해 주고, 이차 수술을 하는 것이 최선이야.’

“수술 스케줄은?”

“신현수가 내려갔습니다.”

“최대한 서둘러. 보호자부터 보자.”

이준영 과장이 보호자를 만났다. 기대했던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고령과 패혈증 및 담낭의 상태를 설명하며, 주로 수술과 마취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보호자들도 쉽게 납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 수술을 해도 돌아가시고, 안 해도 돌아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안 하시면 백 프로 사망합니다. 약물로 막을 단계도 이미 지난 상탭니다.”

보호자의 눈빛이 좋지 못했다.

“혹시 여기서는 수술을 못한다는 소립니까?”

“어느 병원에 가셔도 수술은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수술을 해야 회복되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집니다. 이런 환자는 어떤 의사도 성급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준영 과장의 말은 길었지만 단호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보호자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전공의와 인턴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까지 나왔다. 근본적으로는 신뢰의 문제였지만 대학 병원은 어디나 다르지 않았다. 또한 그것을 감수해야 하는 곳이 바로 대학 병원이었다.

보호자들이 선택할 폭은 크지 않았다. 더구나 한눈에도 노련한 외과 의사로 보이는 이준영 과장까지 있었다.

보호자들이 수술을 받겠다고 동의를 하는 사이 신현수가 내려왔다.

“선생님, 준비되는 대로 환자 올리랍니다.”

“바로 올려.”

이준영 과장이 수술 방으로 향했다.

서도진이 남은 준비를 하는 사이, 김지훈과 신현수도 급히 수술 방으로 뛰어올라 갔다. 이제는 신현수가 수술을 참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고 있었다.

환자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던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보았다. 금경태 과장이 의도한 일은 아니겠지만 김지훈은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나 수술은 기술만이 다가 아니었다. 기본과 기술을 숙지하는 것은 수술실에서 가르치고 태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금까지 김지훈은 자신의 바람대로 훌륭하게 성장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한 단계 더 올라서야 할 시기였다. 비록 2년차지만 환자의 상황에 따라 가장 적절한 수술 방법을 결정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였다. 언젠가는 홀로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할 때가 반드시 오기 때문이었다.

‘네가 집도의라면 넌 어떤 방법을 택할까? 내 욕심일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배운 것을 보였으면 좋겠구나.’

무리한 요구일 수 있었다. 가장 적절한 수술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른 솜처럼 지식이라는 물을 쑥쑥 빨아들이고 있는 김지훈이라면 기대 이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믿음일지도 몰랐다.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에게 손짓을 했다.

“김지훈, 이 환자 수술 어떻게 해야 돼?”

김지훈이 눈빛을 굳히며 생각을 정리했다. 언젠가 이준영 과장이 했던 말을 상기하며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정확하지 않은 판단이라고 해도 확실한 이유와 근거가 있다면 반드시 잘못된 답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집도의라면, 내가 환자의 생명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면 자르지 않는다.’

“통상 급성 담낭염은 담낭을 절제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이 환자의 경우 고령과 패혈증에 담당 벽이 지나치게 얇아져 있고, 염증까지 무척 심한 상탭니다.”

“그래서?”

“개복을 한 후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 검사 결과를 놓고 볼 때 제가 집도의라면 T-tube를 이용해 담낭루만 만들고 수술을 끝내겠습니다. 그리고 환자 상태가 회복되는 대로 이차 수술을 통해 담낭을 절제하겠습니다.”

옆에 서서 듣고 있던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마취를 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환자였다. 이왕 개복을 한다면 담낭을 모두 절제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준영 과장이 마치 신현수의 생각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김지훈에게 또 다른 질문을 했다.

“한 시간 반이면 담낭을 절제하고도 남아. 굳이 담낭루만 만들고 끝낼 필요가 있겠어?”

“일단 담낭 벽이 너무 얇아 무리한 조작을 가하면 담낭이 찢어질 수 있습니다. 그때 감염된 담즙이 배 속으로 퍼진다면 복막염과 동일한 효과를 낼 겁니다. 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추가로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패혈증이 발생한 환자에게는 상당한 무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계속하라는 손짓을 했다.

“더구나 담낭은 간에 붙어 있습니다. 복부 CT상 염증이 간 쪽으로 퍼진 것이 의심됩니다. 그 부분을 무리하게 분리하다가는 간에도 손상을 줄 수 있습니다. 담낭 절제를 바로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지훈이 말한 위험은 금경태 과장 파트를 돌 때 무수히 보았던 문제들이었다. 패혈증에 고령인 환자들도 이미 몇 차례 경험했다. 하지만 수술은 항상 성공적이었고, 수술 후에 별다른 문제도 없었다. 김지훈도 분명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때 이준영 과장이 슬쩍 신현수를 보았다. 마치 네 생각을 말해 보라는 눈빛이었다.

“전 가능하면 최대한 담낭을 절제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마취를 두 번 하는 것도 위험성이 높고, 선생님 말씀대로 수술 시간은 한 시간 반에 불과합니다.”

“또 다른 근거는 없어?”

“경험적으로 이런 케이스를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매번 문제는 없었고, 담낭루만 만들고 끝내는 경우도 없었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도 중요한 판단 근거 중의 하나지. 절제하는 것이 적절한 판단일 수도 있겠어.”

김지훈의 판단에는 별말이 없던 이준영 과장이었다. 신현수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걸렸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긁었다.

‘담낭을 무난히 절제할 수만 있다면 환자에게는 좋은 일이긴 하지. 그런데 현수 판단이 더 정확하고 합리적인가? 이런 경우 한 시간 반 안에 끝낼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담낭과 간을 분리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중간에 끝낼 수는 없잖아.’

곰곰이 생각을 하는 사이 환자가 수술실로 들어왔다.

마취과 전공의도 위험성 때문에 당직 교수에게 연락을 했다. 교수 주관하에 마취가 끝나고 수술이 시작됐다.

확연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두들 숨을 죽인 채 수술과 환자 상태에만 집중했다.

환자의 우상복부를 사선으로 길게 절개했다. 이준영 과장이 시간을 아끼려는 듯 빠르게 손을 놀렸다. 마르고 앙상한 노인의 몸은 쉽게 담낭을 보여 주었다. 나직한 신음이 터졌다.

터질 것처럼 빵빵해진 담낭이 온통 끈적끈적한 고름으로 뒤덮여 고약한 냄새가 났다. 여기저기 변색된 것이 부분 괴사까지 진행된 것으로 의심됐다. 더구나 염증으로 인해 주변 장기인 대장과 소장까지 들러붙어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던 이준영 과장의 손이 담낭을 가리켰다.

“김지훈, 신현수, 이 환자의 담낭 상태를 잘 봐. 그리고 복부 CT 소견과 비교해. 수술 전에 완벽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가장 적절한 수술 방법을 미리 생각한다면, 최소한 환자를 앞에 두고 결정을 하지 못해서 우왕좌왕할 일은 없을 거다.”

퍼스트를 서는 김지훈은 물론 신현수도 눈가를 좁히며 담낭의 모습을 각인시켰다.

이준영 과장은 어떤 판단을 내릴까? 누가 더 적절한 판단을 내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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