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84화 (284/1,329)

제4화 배우자. 그게 결국 남는 거다 (3)

이상하게 속이 후련했다. 이혁민 교수에게 솔직하게 얘기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던 금경태 과장의 얼굴을 보며 느꼈던 불안감까지 사라졌다.

무엇 때문일까? 딱 꼬집어 말하기 힘들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이제야말로 김지훈과 떳떳하게 경쟁할 수 있었다. 질시와 아집과 자만을 모두 버리고, 친구이자 라이벌로서 달려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지훈, 언젠가는 네게 이번 논문과 관련된 일들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때는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순간에 모든 벽을 허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하나씩 하나씩 자신과 서로에게 얽힌 문제들을 풀어 가며, 각자가 바라는 최고의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할 때였다.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쓰며 아무 말도 없이 나갔다.

“아이! 자식! 괜히 말했나? 자존심만 깎였네.”

고개를 흔들며 투덜거리던 김지훈이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이미 작성한 논문을 수정하는 작업이었기에 시간은 얼마 안 걸렸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에 당면한 문제는 논문만이 아니었다.

‘내일 수술이 뭐였더라.’

의국에 걸린 수술 스케줄을 보며 한참을 고민하던 김지훈이 수술 책을 뽑아 들었다. 하필이면 간 내 담석증 환자의 수술이 잡혀 있었다. 담낭 내 담석증보다는 훨씬 드문 질환이었다.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볼지 모르는 수술이었다.

책을 딱 펴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아이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집중이 안 된다며 숙소로 올라갔던 손일석이었다. 보나마나 빤히 응급 수술이 떴다는 말일 것이다.

불길한 예감은 이상하게 잘 맞는 법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만 푹 숙였다.

다음 날, 하루 종일 수술을 참관한 김지훈이 어깨를 주무르며 병동으로 올라왔다. 세컨은 하는 일이라도 있지만, 서서 보기만 하는 참관은 정말 끝없는 인내력을 요구했다. 의외로 피로감이 심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것처럼 운명의 시간이 다시 왔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 일하고 배운 2년차들이 이혁민 교수 앞에 나란히 앉았다. 최종 제출된 논문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이혁민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김지훈, 손일석, 니들 논문 수정한 거 맞나?”

‘헉! 그 정도였나?’

어느 정도는 각오한 일이었지만 수정한 것이 맞느냐는 말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흠칫 놀란 김지훈이 곁눈질로 손일석을 보았다. 역시 얼굴이 죽어 가고 있었다.

“손일석, 니는 그래도 좀 낫다. 김지훈, 이노무 자식은 급조한 티가 너무 나네. 니 벼락치기 했제? 이게 시험이가. 과락 면하는 게 목적이었으면 잘못 생각했다. 니 과락이다. 육십 점은커녕 오십 점도 안 된다.”

김지훈이 집중적으로 타자 손일석이 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를 놓칠 이혁민 교수가 아니었다.

“손일석, 조금 낫다고 했지만 니도 마찬가지다. 둘 다 과락이니까, 텀 바뀔 때까지 확실하게 작성해서 다시 제출해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더구나 과락(과목낙제)이라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 대답도 없자 이혁민 교수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동시에 외쳤다.

“예, 선생님. 다시 제출하겠습니다.”

“이래 써 놓고 목소리는 크네. 어디 두고 보자. 신현수, 니도 실망이다.”

김지훈과 손일석의 눈이 동그래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혁민 교수였다. 그런데 신현수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전에 낸 논문하고 별 차이도 없고, 최종 논문 수준에는 턱도 없이 모자라. 시간을 줬는데도 이렇게밖에 못 쓰나? 과락은 간신히 면했지만, 니도 다시 작성해라. 니들 셋 다 이렇게 나올래.”

“아닙니다,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말로는 열심히 하지 않는 놈이 없어. 니들만 수술 들어가고, 응급실 서는 것도 아니잖아. 정신 바짝 차려라. 수술만 할 줄 안다고 일반 외과 의사 되는 거 아니다.”

2년차들에게 살벌한 눈빛을 보내던 이혁민 교수가 볼펜을 들었다. 빨간색 볼펜이 사정없이 날아다녔다.

빨간색으로 도배를 한 김지훈의 논문에 이어 손일석의 논문도 빨갛게 물들었다. 신현수의 논문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지적을 받았다.

논문 3개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 쉰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잠시 무슨 의미인지 몰라 멍하니 손만 보던 김지훈이 잔뜩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가운 윗주머니에 꽂혀 있던 빨간 볼펜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이 볼펜 그대로 돌려줬으면 좋겠다. 명심해라.”

이혁민 교수가 일어나자 2년차 3명이 벌떡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숙인 고개 뒤로 목덜미에 맺힌 땀방울이 보였다. 손일석이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혁민 선생님도 만만한 양반이 아니야.”

수술실에서 이미 많은 경험을 한 김지훈이었다. 그것보다는 신현수의 논문과 반응이 더 궁금했다.

“현수야, 어떻게 된 거야? 전번에는 충분히 심사 대상이 된다고 하셨잖아.”

“이게 정확한 내 수준이고, 놀랄 일도 아니야.”

신현수가 슬쩍 김지훈에게 눈길을 주었다.

‘김지훈, 다시 한 번 고맙다. 니 덕이다.’

기지개를 펴며 개운하다는 표정을 지은 신현수가 의국을 나갔다. 김지훈이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손일석을 보았다.

“일석아, 지금 현수가 뭐라고 한 거야?”

“그러게. 지금쯤 얼굴이 시뻘게져서 말도 안 하고 나가야 우리가 아는 신현수잖아. 이거 봐라. 주말에 니가 한 말이 생각보다 훨씬 효과가 있나 본데? 뭔가 겸손해졌어.”

“그렇지? 확실히 뭔가 달라졌지?”

다소 의아한 일이긴 했지만 좋은 일이었다. 신현수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마음을 열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도 없을 것이다. 입술을 내밀며 이마를 두들기던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일석아, 어쨌든 삼 개월 벌었다.”

“삼 개월? 야, 설마 그때까지 기억하시겠어? 얼렁뚱땅 지나가실 것 같은데.”

“손일석, 니가 지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살고 싶으면 틈틈이 논문 작성해라. 내가 장담하는데, 절대 잊으실 분이 아니다.”

손일석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렇지? 그러면 이혁민 선생님이 아니시겠지?”

“그럼, 당연하지. 그나저나 다음에 낼 때는 과락 확실하게 면하고, 신현수는 반드시 잡는다. 나도 학생 때 공부 좀 한다는 소리 들었는데, 자존심 상해서 이대로는 못 지나가.”

김지훈의 각오에 찬 목소리에 손일석이 이죽거렸다.

“그럼 연애를 포기해야지. 오프 때 논문을 써야 하는데 데이트까지 하면 언제 써? 아! 사랑이냐, 논문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과연 김지훈은 무엇을 택할 것인가. 개봉박두!”

“이젠 변사까지 흉내를 내고 지랄이냐. 니 걱정이나 해, 이 자식아.”

그렇게 논문 문제가 지나갔다. 김지훈과 손일석에게는 단순한 괴로움이었지만, 신현수에게는 일생이 바뀔 수도 있었던 문제였다. 농담과 진담 속에 각자 나름대로 깨달은 바가 있었을 것이다.

***

당분간이겠지만 논문이라는 큰 짐을 덜었다. 더구나 100일 당직이 끝난 1년차들이 일차적으로 응급실을 맡았다. 일반 외과 환자만 노티를 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였다.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동시에 얻은 2년차들이 눈에 독기를 품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을 펼쳤다면 이젠 대놓고 경쟁을 했다.

발단은 손일석이었다.

목요일 하루로는 부족한지 화요일에도 신기동 교수가 수술을 할 때면 어김없이 수술실에 나타났다. 환자 노티든, 아니면 하다못해 야구 얘기든 핑계거리를 한 아름 들고 와 최대한 혈관 수술을 보고자 했다.

신기동 교수도 그 정성에 감탄했는지 웃기만 했다. 물론 나오는 말은 여전했다.

“손일석,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수술이나 봐. 이렇게 하고도 목요일 날 개판 치면 너 아주 죽을 줄 알아. 그리고 일반 외과 수술을 못하면 혈관 수술은 꿈도 꾸지 못하니까, 이 교수 수술에 등한시하지 말고. 알았어?”

대단한 자부심이었고, 손일석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시스트를 서던 신현수에게는 강렬한 자극이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만 이준영 과장의 수술에 들어간다면 김지훈에게는 물론 손일석에게도 뒤처질 것이다.

그 여파가 바로 나타났다. 신현수가 주중 당직 때는 물론, 오프 때까지도 이준영 과장의 수술에 들어온 것이다. 이준영 과장도 힐끗 눈길만 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덧 가운을 입은 채 눈에 불을 켜고 수술을 보는 모습에 웃는 것 같았다.

그 탓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김지훈만 죽어났다.

“김지훈, 너 여기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돼? 그리고 정확한 것도 중요하지만 응용을 해야지.”

“김지훈, 아뻬라고 퍼스트 이렇게 서도 돼? 평생 어시스트만 설 거야. 너 2년차다. 확실히 하자.”

“힘 빼자, 김지훈. 정신 차리라고 했지, 긴장하라고 했어? 그러다 환자 잡는다. 서둘러야 할 때는 서두르고, 침착해야 할 때는 침착해야 할 거 아니야. 모든 수술을 똑같이 하려고 하면 수술이 제대로 되겠어?”

여간 살벌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점도 있었지만 사소한 일까지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점점 더 살벌해지시네. 내가 그 정도로 잘못하고 있나?’

수술이 끝날 때마다 괴로워하던 김지훈이 문득 신현수도 함께 듣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이준영 과장은 자신만이 아니라 신현수까지 가르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동안 들었던 말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생각해 보니 신현수와 자신에게 모두 필요한 말이었다.

‘나도 계속 배우고 익혀야 할 부분이긴 한데, 정말 신현수 때문에 더 심해지신 걸까? 마음에 드시면 그러고도 남을 분이 스승님이시긴 하지.’

불현듯 이준영 과장이 신현수에게 신경을 쓴다는 사실에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긴 했다. 하지만 모두가 배워야 하는 전공의였다. 당연하면서도 가슴에 불을 지피는 일이었다.

그 생각이 맞기라도 한 것처럼 신현수가 나가자마자 이준영 과장이 아예 불덩이를 던졌다.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놈은 없어. 김지훈, 정신 바짝 차려. 수술만 본다고 해서 제대로 배울 수 있는 놈도 없어. 집중하고 생각하고 개념을 잡아.”

노력하는 사람은 신현수였고, 이길 수 없는 놈은 김지훈이었다. 사람과 놈이라는 말을 이렇게 절묘하게 사용할 줄은 몰랐다. 수술실을 나온 김지훈이 방방 뛰며 각오를 불태웠다.

‘좋아. 다 배워 버리고 만다.’

사실 뜨끔한 말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수술을 하루 종일 보다 보면 다리도 아프고, 졸음이 밀려오곤 했다. 그만큼 집중력도 떨어졌고, 그럴 때면 남는 것도 없었다. 어쩌면 이준영 과장은 그런 사소한 일조차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였다. 손일석과 신현수가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 멍청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2년차들의 새로운 무한 경쟁이 시작됐다.

그 덕인지 걱정했던 환자들이 무사히 회복되고 있었다.

윤재철 환자와 최윤성 환자가 같은 날 코 줄을 뺐다.

다음 날 물부터 먹기 시작했다. 미음과 죽에 이어 정상적인 식사까지 일주일 정도 걸렸다.

물론 윤재철은 위가 없어 유동식을 유지해야 했지만, 치료 원칙대로 하루 대여섯 차례 충실히 식사를 했다.

수술이 없는 화요일은 김지훈에게 꽤 많은 여유를 주었다.

“아버님, 나오는 식사 꼬박꼬박 챙겨 드시고 운동 많이 하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소화가 잘 안 되실 거예요.”

“김 선생, 걱정 마시게.”

“아유! 전 걱정 안 합니다. 전 아버님이 당연히 그렇게 하실 거라고 믿는데, 서연이하고 현수는 걱정이 너무 많더라구요. 아버님을 못 믿나 봐요.”

이제는 실없는 농담까지 했다. 어쩌면 친구 아버지를 떠나 의사와 환자의 관계 때문일지도 몰랐다.

잠시 윤재철과 복도를 걷던 김지훈이 급히 인사를 하며 반대쪽으로 뛰어갔다. 마침 최윤성 환자가 운동을 나온 것이다.

김지훈이 함께 손을 붙잡고 나온 부인을 보며 밝게 웃었다.

“할머니, 얘기 들으니까 내일부터 첫 번째 약물 치료 받으신다면서요. 조금 힘드실 겁니다. 그러니까 미리 식사도 충실히 하시고, 혹시 불편한 점 있으시면 제게라도 말씀하세요.”

이제는 담당 의사가 아니었지만 항상 신경을 써 주어 무척이나 고마워했던 보호자였다. 그런데 웃고 있는 얼굴 속 어딘가에 그늘이 보였다. 김지훈이 보호자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 조금만 더 고생하세요. 다 잘될 겁니다.”

사실 이제 막 수술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암 환자 보호자들의 안색이 밝은 날은 거의 없었다.

김지훈이 애써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는 살짝 문이 열린 병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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