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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282화 (282/1,329)

제4화 배우자. 그게 결국 남는 거다 (1)

서도진과 안호석의 얼굴이 시커메졌다.

‘씨펄! 걸렸다!’

‘헉’ 소리가 심하게 터졌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리고, 손일석은 팔짱을 낀 채 인상을 팍팍 쓰고 있었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차갑고 냉정한 눈빛이 트레이드마크인 신현수는 아예 얼음처럼 보였다.

등짝에 소름이 쫙 돋은 서도진과 안호석이 꼿꼿이 서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고작 맥주 한 캔씩 먹으려 했을 뿐인데,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이 자식들이 벌써 시작을 했네. 그럼 그렇지. 도진아, 호석아, 니들은 우리 손바닥 안이다.’

쓰윽 숙소 안을 둘러본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아직도 얼굴은 조금도 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일석아, 현수야, 어떻게 하지?”

손일석이 피식 웃었다.

“이 자식들 봐라. 백 일 당직 끝나기가 무섭게 이 지랄들이네. 아주 죽고 싶다고 고사를 지내는구나. 니들이 내 믿음을 이렇게 배신해? 몽둥이 하나 준비해 오자니까.”

김지훈이 주먹을 쥔 손으로 손바닥을 탁탁 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현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서도진과 안호석이 고개를 푹 숙이며 이를 악물었다. 윗년차 몰래 숙소에서 술을 먹은 이상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100일 당직이 끝난 날이라고 해도 이번 주는 엄연히 당직을 서는 주였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느닷없이 신현수에게 눈을 부라렸다.

‘뭐 해, 인마? 빨리 주고 가자. 여기서 밤샐 거야?’

신현수가 마지못해 앞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백 일 당직 서느라 고생했다. 오늘 밤은 우리가 응급실까지 다 봐줄 테니까 아침까지 푹 쉬어.”

가뜩이나 차가운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차갑게 들렸다. 신현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려 하자 손일석이 옆구리를 툭툭 쳤다.

‘시작했으면 끝까지 말을 해야지.’

“도훈이하고 광호에게도 고생했다고 전해.”

2년차들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어느 틈엔가 사라진 2년차들이 있던 자리에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서도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안호석을 보았다.

맥주 캔 4개, 소시지와 오징어, 냉커피 2개.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속에 선배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100일 당직 동안 자신들만큼 힘들게 일한 2년차들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저마다 최선을 다하며 1년차들을 아껴 주었다.

유치하기만 한 선배들의 장난에 웃음이 나오기는커녕 가슴이 먹먹해졌다. 콧등을 찡그리며 선배들의 마음을 보고 있던 서도진과 안호석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숙소로 향하던 김지훈과 손일석이 킬킬대며 웃었다.

“일석아, 도진이 얼굴 봤지? 자식들! 겁먹기는.”

“현수가 말하게 한 게 신의 한 수다. 이럴 때는 저 자식 목소리가 딱이네. 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 아! 요새 김지훈한테 너무 밀리는데. 이건 또 어디서 나온 힘이야. 사랑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잖아.”

둘이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보던 신현수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원래 이런 시시껄렁한 일을 함께할 생각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아직 논문 문제조차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금경태 과장이라는 높은 벽을 넘어야 했다. 그런데 김지훈이 억지로 끌고 와서는 낯 뜨거운 말까지 하게 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그때 서도진과 안호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묘한 일이었다. 무겁기만 했던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진 것이다. 신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도 툭탁거리고 있는 김지훈과 손일석의 모습이 왠지 정겹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문득 김지훈에게 들은 말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꺼내기 쉬운 말은 아니었다. 감정이 앞섰을 때는 가슴이 북받치는 말일 수도 있었지만, 맨정신으로 나누기에는 은근히 민망한 말이었다. 다음번에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한 가지가 꼭 필요할 것이다.

술! 알싸하게 목을 넘어가는 시원한 소주!

평소 소주는 입에도 안 대는 신현수였지만, 소주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지훈이 누구랑 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불현듯 윤서연이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을 놓고 있는 자신을 보며 흠칫 놀라고 있었다.

***

전면적인 파트 이동과 함께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월요일 오전 회진을 돌기 위해 올라온 금경태 과장이 파트 전공의들을 쓰윽 둘러보았다. 최철한, 유석재, 김지훈, 서도진이 바짝 긴장한 채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각 년차에서 가장 뛰어난 전공의들이었다. 원래는 서도훈 대신 구미로 가야 할 서도진도 일부러 자신의 파트를 돌게 했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이런 맛이 가끔은 기분을 환기시켜 주곤 했다. 하지만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김지훈을 볼 때마다 감정이 복잡해졌다.

‘저놈을 거둬, 아니면 내쳐? 작년 일을 생각하면 당장 내쳐야 하겠지만, 이준영을 생각하면 그게 최선은 아니야. 일단 몇 주 두고 보면서 결정해도 늦지 않겠지. 그런데 저놈 눈빛이 달라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나직한 콧소리를 내며 김지훈을 본 금경태 과장이 회진을 돌기 시작했다.

김지훈도 살짝 어깨를 흔들며 눈빛을 굳혔다. 드디어 금경태 과장 파트의 업무가 시작된 것이다.

2년차들에게 유월의 첫 출발은 순조롭고도 힘들었다.

오상익 교수 파트인 신현수는 화요일에는 혈관 수술을 들어가고, 격주로 목요일마다 이준영 과장 파트를 담당하기로 했다. 이혁민 교수 파트인 손일석은 목요일에 혈관 수술을 담당하고, 역시 2주에 한 번 응급 수술을 맡기로 했다.

물론 김지훈의 오프 날인 수요일에는 응급 수술을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이준영 과장 역시 쉬는 날이었기에 아쉬운 점이 많았다. 어쨌든 예전 2년차들보다는 여전히 일이 많아지기는 했어도 충분히 견딜 만한 일정이었다.

반면 김지훈은 월요일 첫날부터 가운을 휘날리며 달리고 있었다. 회진을 끝낸 금경태 과장이 앞으로 모든 수술을 참관하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병동 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쁜 쪽보다는 좋은 쪽으로 해석할 일이었다. 불평을 하며 불만을 가져 봤자 힘든 사람은 김지훈 자신이었다.

‘수술 참관? 그래, 이것도 좋은 기회다. 어차피 세컨을 서나, 참관을 하나 똑같잖아. 어쩌면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몰라.’

김지훈이 눈빛을 굳히며 각오를 다졌다.

월요일 오전은 원래 다른 날보다 일이 많은 날이었다. 게다가 윤재철 환자가 드디어 5일 만에 병실로 올라왔다. 이젠 손일석이 담당해야 했지만, 신현수는 물론 이준영 과장의 환자이기도 한 탓에 김지훈까지 바짝 신경을 썼다.

아직도 물 한 모금 먹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중환자실을 벗어난 덕인지 윤재철의 목소리가 무척 밝았다. 윤서연에 2년차 3명까지 버글거려 더욱 기분이 좋은지도 몰랐다.

“신 선생, 고마워. 김지훈 선생, 손일석 선생, 고마워요.”

“아버님! 저한테도 말 좀 놓으세요. 이러시면 저 다신 안 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죠?”

김지훈의 말에 윤재철이 미소를 머금었다.

“주치의 선생님께 그러면 안 되는데.”

“아버님, 백 일 당직이 끝나서 이제부터 메인 주치의는 1년차예요. 우리는 보조만 합니다. 그러니까 안 될 이유가 없죠. 계속 이러시면 서연이한테도 혼나요. 그리고 중환자실에서 올라오셨으니까 이제부터는 열심히 운동하셔야 합니다. 어제 사진을 보니까 폐가 살짝 안 좋았거든요.”

“아버님, 지훈이보다는 제가 훨씬 성격이 좋습니다. 그냥 편하게,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김지훈과 손일석의 넉살과 걱정에 윤재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환자도 많은데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윤서연도 이젠 업무에 복귀해야 했다.

“아빠, 일 끝나고 바로 올라올게요.”

윤서연을 따라 꾸벅 인사를 하고는 병실에서 나오던 김지훈이 손일석을 보았다.

“일석아, 최윤성 환자분 말이야. 소리를 안 지르면 움직일 생각을 안 하니까 막 질러야 돼. 그 환자분한테는 절대 점잔 떨면 안 된다.”

“알았어, 인마.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현수야, 우리 먼저 간다.”

“가.”

한결같은 신현수였다. 주말에 한 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윤재철이 신현수에게 손짓을 했다. 냉정한 것이 장점이 되는 경우도 많겠지만, 사람 사이에서는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도 있었다. 예전부터 해 주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신 선생, 이리 와 앉아.”

“예, 아버님.”

“사람에게 가장 큰 재산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야. 그런데 가장 나쁜 것 중의 하나가 또한 사람이야.”

말 몇 마디에 윤재철이 얼굴을 찡그렸다. 목 안에 답답하게 걸려 있는 코 줄 때문이었다.

“아버님, 힘드시면 다음에 말씀하시죠.”

“아니야, 신 선생. 내 말 마저 들어. 난 신 선생이 사람이라는 재산을 많이 얻기를 바라.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을 잘 봐야 되는데, 젊은 나이에는 참 힘든 일이지. 그렇게 보면 바로 옆에 그런 사람들이 다 있어서 다행이야. 단 좋은 사람을 얻으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 빤했다.

신현수가 나직한 숨을 내쉬며 물었다.

“아버님, 며칠 보지도 못하셨습니다. 확신하십니까?”

“사람은 말이야. 스스로 의도하지 않아도 불과 몇 마디 말과 눈빛, 그리고 단순한 행동에서조차 의외로 많은 것을 알려 주는 존재야. 이번에는 내 말을 믿어도 좋아.”

주말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 신현수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김지훈이나 손일석의 성격이 부러울 때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병동 일을 끝낸 김지훈이 부랴부랴 수술 방으로 향하며 윤재철이 웃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리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해도 앞으로 남은 치료와 예후를 생각하면 웃을 수가 없는 일인데, 참 강한 분이시네. 혹시 다들 깜짝 놀랄 정도로 병을 이겨 내시는 거 아냐? 그러면 좋겠다. 배울 게 정말 많아요.’

잠깐 정신을 팔았는데, 어느새 습관처럼 수술복으로 갈아입고는 수술 방 안을 걷고 있었다. 다음 수술을 준비하는 간호사들 사이에서 고경아가 보였다.

모른 척하고 지나가던 김지훈이 갑자기 윙크를 했다.

‘경아 씨, 파이팅!’

고경아가 새침을 떨며 지나쳤다.

‘저럴 때도 너무 예뻐요.’

기분이 확 좋아진 김지훈이 힘차게 수술실로 들어갔다.

담낭 내 담석증으로 담낭 절제술을 받는 환자의 복강경 수술 준비가 한창이었다. 최철한이 서도진에게 일일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설명하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잊지 마라. 준비가 제때 안 되면 과장님 무지하게 화낸다. 그땐 넌 나한테 죽는 거야. 그리고 수술 중에는 하라는 거 말고는 절대 하지 마. 수술은 과장님이 하시고, 난 카메라 담당이야. 그러면 넌?”

이미 인수인계를 한 서도진이 확실하게 대답을 했다.

“특별한 담당이 없습니다. 하라는 대로만 합니다.”

“오케이! 좋았어. 아! 그리고 인턴 선생, 너는 유사시를 대비한 예비 병력이다. 알지?”

“예. 저는 개복할 때를 대비한 예비 병력입니다.”

손가락을 튕긴 최철한이 김지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병동 일 다 끝냈어?”

“예, 선생님. 제가 뭐 도울 일 없나요?”

“에휴! 할 일도 없는데 널 왜 들어오라고 하셨는지 모르겠다. 넌 그냥 저쪽 구석에 편하게 앉아서 구경만 해. 그쪽에서 모니터 화면이 제일 잘 보일 거다.”

김지훈이 슬쩍 뒤로 물러나는 척하면서도 수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길고 가느다란 쇠 봉 끝에 달린 카메라가 연결된 모니터와 배 속에 이산화탄소를 공급하는 장치가 달린 기계를 어디에 위치시키는지, 감염 및 오염 방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등을 꼼꼼하게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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