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서로의 벽을 조금이라도 허문 것일까? (1)
김지훈에게 도움을 받는 꼴이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물어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둘 중의 한 명만 상황이 변해도 단순한 추억에 불과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지훈, 숙소에서 잠깐 얘기 좀 하자.”
“숙소? 난 논문 써야 하는데. 웬만하면 여기서 하지.”
무심코 대답을 하며 고개를 든 김지훈이 코를 찡긋거리다 말고 논문 자료들을 챙겼다. 신현수의 표정이 너무나 심각하고도 진지했다. 그동안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은 것 같던데, 정말 무슨 일이 있나? 근데 뭔 일이기에 나하고 상의를 하자는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현수의 뒤를 쫓아가던 김지훈의 얼굴도 점점 심각해졌다. 보통 일이 아니고서는 이럴 신현수가 아니었다. 라이벌을 떠나 친구라고 생각하는 이상 진지하게 응해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숙소 문을 열던 신현수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오프인 손일석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논문을 쓰고 있었다. 신현수가 주춤거리자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왜 그래? 일석이 앞에서는 못할 말이야?”
“그게… 좀 곤란한데.”
김지훈이 신현수를 빤히 보다 말고 정색을 했다.
“야, 그럼 하지 마. 우린 다 동기고, 친구야. 그런데 일석이 있다고 말을 못하면 내가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잖아. 솔직히 그런 정도면 아마 말하고 나서 틀림없이 후회할 거다.”
“후회한다고?”
“그럼 당연하지, 자식아. 후회할 짓은 안 하는 게 상책이야. 잘 생각해 봐. 말은 한 번 내뱉으면 끝이라는 말도 있잖아.”
신현수가 곰곰이 고민에 잠겼다. 손일석 앞에서 말을 하지 못할 이유라고는 자존심뿐이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까? 엄밀하게 말하면 김지훈보다 잘나야 한다는 쓸데없는 아집과 자만일지도 몰랐다.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은 꺾어야 할 때였다.
신현수가 눈빛을 굳히며 숙소로 들어섰다. 더욱 의아해진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손일석이 볼펜을 빙빙 돌리며 투덜거렸다.
“야, 이 자식들아. 원래 나 주말 오픈데 파트 이동하는 날이라고 가지도 못하고 논문까지 쓰잖아. 그런데 왜 벌써 올라오고 지랄들이야.”
김지훈이 슬쩍 고개를 흔들며 눈짓을 했다. 스윽 눈치를 본 손일석이 조용히 팔짱을 끼며 신현수를 보았다. 분위기를 바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자칭 하오문의 문주인 천하의 손일석이 아닐 것이다.
김지훈의 맞은편에 앉은 신현수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다 어깨를 흔들며 혀를 찼다. 이리저리 빙빙 돌려 말할 자리가 아니었다. 도리어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할 뿐이었다.
“김지훈, 하나만 먼저 물어보자. 과장님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
손일석이 깜짝 놀라며 김지훈과 신현수를 번갈아 보았다. 다들 눈치를 채고 있었고, 툭하면 말까지 오고 갔다. 하지만 김지훈 앞에서는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최근에 김지훈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 같았지만 선배들은 고개를 저었다. 뭔가 큰일이 있지 않고서는 절대 변할 사람이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김지훈이 다소 의외라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 얘기 때문에 올라오자고 한 거야?”
“일단 알고 있는 건지, 아닌지부터 말해 줘.”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대답을 못할 일도 없었다. 대답을 하나, 안 하나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신현수를 보던 김지훈이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알았어. 솔직히 말할게. 내가 1년차 때 음성에 왜 갔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
손일석이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만 지었다. 신현수도 놀란 눈으로 김지훈을 보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너도 알고 있었어? 이유가 뭐야? 언제 안 거야?”
그래도 일반 외과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차마 이권이 걸린 장례식장 문제 때문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됐든 제 얼굴에 침 뱉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이유는 말하기 곤란해. 나중에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을 때가 오면 그때 알려 줄게. 흐음! 내가 언제 알았더라. 그러고 보니 1년차 때는 이상하긴 했지만 정신없이 일을 하느라 몰랐네. 하여간 2년차 초반이야. 현수야,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설마 내가 걱정이 돼서 보자고 한 거야?”
신현수가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내심 모르고 있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유까지 알고 있었다. 일반 외과 전공의라면 누구도 김지훈처럼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불현듯 반감이 생겼다.
“넌 그걸 알면서도 웃음이 나와? 환자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과장님 파트는 또 어떻게 돌 거야? 난 지금 니가 상당히 이상해 보여.”
전에 없이 빠르게 말을 내뱉은 신현수의 얼굴이 상기됐다.
“이 자식이, 왜 이렇게 흥분하고 난리야. 너희들도 이미 알고 있는 걸 내가 모르면 되겠어? 일석이가 예전에 술자리에서 지나가는 것처럼 한 번 말한 적이 있었고. 일석아, 너도 내가 이상해 보여?”
손일석이 허탈하게 웃었다. 술자리에서 실수를 한 이후, 김지훈의 눈치까지 보며 그렇게 조심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미 이유까지 다 알면서 말을 안 했다니 서운한 일이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을 해 보면 결코 말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맞아. 나 같아도 말 못할 일이다.’
손일석이 표정을 확 바꾸며 말했다.
“그건 현수 저 자식 눈이지. 다들 지훈이 니 체력이 강하다는 말만 하지만, 난 학교 다닐 때부터 정신력이 더 강하다고 생각해 왔어. 절대 안 이상해. 이상했으면 니가 내 친구였겠냐. 내가 멀쩡한 놈만 만난다는 거 잘 알잖아.”
농담 속에 진담이 있었다. 그동안 내색은 안 했지만 손일석이 얼마나 걱정을 했을지 눈에 선했다. 김지훈이 입술을 꽉 물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상해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금경태 과장에게 찍혔다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웃으며 지냈다. 스승인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가 없었다면 아마 남들과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겨 냈다. 지금은 그런 일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스승과 멘토인 이혁민 교수의 소리 없는 응원, 미래에 대한 열정과 희망, 그리고 자신을 믿어 주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었다.
그 모든 이유를 몇 마디 말로 전할 수 있을까?
당연히 전할 수 있었다. 스승의 스승님이신 허경발 교수님의 말씀이면 충분했다.
김지훈이 나직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수야, 나도 사실 무지하게 힘들었고, 처음에는 이겨 내기가 쉽지 않았어.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어떤 말을 들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이 환해지더라.”
“무슨 말인데?”
“세 가지가 있어. 첫 번째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의사가 되자. 두 번째는 배움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죄는 지식이 아니라 사람이 짓는 법이다.”
허경발 교수에게 그 말을 듣던 당시의 감동을 다시 느낀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정훈철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김지훈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외쳤다.
“마지막 말이 뭐냐 하면 바로 이거야. 카르페!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기자. 내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자. 지금은 그 말들이 내 인생의 원칙이야. 그래서 찍혔든 말든, 난 상관하지 않아. 난 지금까지 최소한 부끄럽게 살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야.”
듣고 있던 신현수의 안색이 급변했다. 아니, 창백해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게 쉽겠어? 솔직히 매일매일이 부끄러운 일투성이야.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정말 부끄럽지 않은 의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김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기분이 전해졌는지 손일석도 묘한 표정을 지으며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기분이 확 달아오른 김지훈이 갑자기 손일석과 신현수의 어깨를 잡았다. 신현수가 왜 자신을 보자고 했는지를 잊고 말았다.
“일석아, 현수야, 나 말할 게 한 가지가 더 있다.”
손일석이 결국 웃고 말았다.
“자식! 많이 컸네. 내가 할 말을 왜 니가 하고 있어. 후우! 어쨌든 그동안 지훈이 너한테 들었던 말 중에 제일 끝내준다. 이번에는 또 뭐야?”
“나 너희들과 함께 최고의 써전이 되고 싶다.”
그 순간 손일석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안색을 굳힌 채 말이 없었던 신현수도 고개를 들며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이 애써 기분을 가라앉혔다. 조금이라도 장난기가 섞여서는 안 될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함께 최고의 써전이 되자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일석아, 전에 이준영 선생님과 신기동 선생님이 수술을 함께하셨을 때 어렴풋이 느낀 게 있었어. 그땐 그 느낌이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이번에 서연이 아버님 수술을 보면서 확실하게 알았어.”
손일석과 신현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허황될지도 모르지만, 최고의 써전이 되는 게 내 꿈이야. 그래서였는지 난 그동안 너희들을 라이벌로 생각했고, 친구를 떠나 반드시 이기고 싶었어. 최소한 너희들은 이겨야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솔직히 이길 수 있다고 믿었어. 그런데 우리는 넘보지도 못할 이준영 선생님과 이혁민 선생님은 자존심 같은 건 따지지도 않더라. 두 분이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손을 맞추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가볍게 흥분한 김지훈이 숨을 가다듬었다.
“모든 수술을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는 의사는 없을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겠지. 나중에 우리 중 누가 혈관 수술을 가장 잘할까? 일석이? 모두들 깜짝 놀랄 만한 학문적 성과는 누가 얻을까? 현수, 너? 물론 각자 최선을 다해 배우고 노력해야겠지만, 부족한 점도 엄청나게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한 팀이 된다면 완벽에 가까운 수술 팀이 될지도 몰라. 그게 바로 최고의 써전이 되는 길이 아닐까?”
손일석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지훈아, 니 말이 맞다. 솔직히 우리가 서로를 이기려고 죽자 사자 노력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 그렇게 실력을 쌓은 후 쓸데없는 자존심만 세우지 않는다면 나중에 진정한 한 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야! 김지훈! 너 오늘 유난히 멋지다. 어떻게 니가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아! 이런 멘트는 원래 내 건데. 이 자식이 연애를 하더니 말발이 무지하게 늘었어요.”
역시 분위기는 손일석의 몫이었다. 약간의 어색함과 흥분을 가벼운 농담으로 살짝 누그러트렸다. 김지훈이 손일석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의사가 되자는 말만 기억하면 충분할 것 같지 않냐?”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의사? 부끄럽지 않은 사람?’
그 순간 신현수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에 숙소를 뛰쳐나갔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행동에 김지훈은 물론 손일석도 따라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일석아, 현수 저 자식 무슨 일 있어? 왜 저래?”
“그러게. 뭔가 있긴 있는 것 같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수가 아니잖아. 모두 쉬쉬했던 과장님 문제를 냅다 꺼낼 때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어. 음! 뭘까? 혁원이 문제도 해결이 안 됐는데, 또 애들을 풀 일이 생기네.”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을 하던 손일석이 갑자기 가자미눈을 떴다. 찌릿한 시선을 느낀 김지훈이 흠칫거렸다.
“김지훈, 너 인마. 그러는 거 아니다. 내가 그동안 과장님 문제로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이유까지 알면서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할 수가 있어? 우정에 금 가는 소리 안 들리냐? 나니까 참지.”
“그럴 사정이 있다. 나 좀 이해해 줘라. 어? 근데 니가 지금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잖아? 다 알고 있으면서 말 안 한 놈이 누군데?”
“야, 인마, 예전에 얘기했는데 니가 못 알아들은 거지.”
“술자리에서?”
“자리가 문제냐? 듣는 놈이 문제지.”
말꼬리를 흐리며 딴청을 피우는 손일석을 보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신현수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어쨌든 그 덕에 속이 후련했다. 손일석도 웃고 있었다.
문득 손일석이 이혁원을 언급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혁원이에 대해서는 뭐 알아낸 거 있어?”
“알아낸 건 많지. 근데 이준영 선생님과 어떤 관계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네. 본과 4학년 애들 말로는 아버님이 안 계실지도 모른다는데,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아. 이럴 땐 대질심문을 해야 하는데, 혁원이 그놈이 이번 달부터 구미에서 실습을 도네.”
“구미에서? 내가 다음 텀이 구민데 볼 수 있을까?”
“힘들지. 우리가 텀 교대할 때쯤이면 실습 끝나고 국시 준비 들어갈 때잖아. 그래도 어차피 다 내 손바닥 안이다. 인턴 들어오면 그냥 작살을 내서라도 내가 알아볼게.”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사실 궁금하다 뿐이지, 꼭 알아야 할 일도 아니었다. 이혁원이 이준영 과장과 가족만 아니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