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같은 환자, 같은 상황, 그리고 다른 생각 (2)
그 시간, 이혁민 교수와 마주한 금경태 과장이 팔짱을 낀 채 고민에 잠겨 있었다. 남들이 볼 때는 일반 외과가 정말 아무 문제없이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금경태 과장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가 윤재철의 수술을 이 정도까지 성공적으로 할 줄은 몰랐다. 중환자실에 있다 뿐이지, 다른 암 환자들과 거의 비슷한 회복까지 보이고 있었다.
더구나 수술을 회피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다른 과 과장들에게 누구와도 함부로 하기 힘든 수술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 탓에 이준영 과장의 이름이 또 과장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스스로 화근을 키운 셈이었다.
차장 검사와의 관계도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았다. 수술은 잘됐지만, 차장 자리까지 오른 검사에게 금경태 과장은 그저 수술 잘하는 일반 외과 의사 중의 한 명일 뿐이었다.
‘제길! 이준영이 온 이후로 잘 풀리는 일이 없군. 넌 항상 내게 문제만 일으킨 놈이었어. 더 이상 이준영이라는 이름이 오르내리게 해서는 안 돼.’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금경태 과장이 이혁민 교수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신현수를 오상익 선생님 파트로 보내고, 신 교수 수술을 손일석과 함께 맡도록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오상익 선생님이나 이 교수 파트를 맡으면서 응급실까지 커버하는 것은 체력적으로 불가능해. 삼 개월 동안 보면서 판단 착오였단 생각이 들어. 김지훈에게는 힘들고 미안한 일이지만, 내 파트 일을 많이 빼 주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 어때?”
금경태 과장이 슬며시 이혁민 교수를 보았다. 과장 체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판단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까지 한 이상, 이혁민 교수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신 교수 수술을 안 들어가니까 주중 오프는 한 번만 줘도 괜찮지 않을까 해. 그렇게 되면 2년차들 업무량도 대충 비슷할 테고. 게다가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과 손발이 잘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나름 최선의 방책이었다. 지금도 이준영 과장에게 배우고 싶어 거의 안달이 난 신현수였다. 이 상황에서 응급실까지 맡게 한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말을 마친 금경태 과장이 나지막한 신음을 터트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준영 과장의 실력을 자인하는 꼴이었다.
솔직히 자존심이 크게 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준영 과장의 수술을 자주 들어가게 하는 것보다는 혈관 수술을 배우게 하는 편이 백번 나았다.
‘혈관 수술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메이저 파트가 아닌 이상 다른 생각을 하진 않겠지. 아무리 이사장 아들이라고 해도 전공의에 불과한 놈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다니. 제길! 그동안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포기할 수는 없지. 조금만 더 가면 돼.’
눈가를 좁히며 금경태 과장을 바라보던 이혁민 교수가 턱을 매만졌다. 속셈이 무엇인지 빤히 보였다. 하지만 애초에 금경태 과장이 말한 식과 비슷하게 2년차들의 업무를 조정해야 한다고 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이제 와서 무작정 반박할 수만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저러는지 알 수가 없네. 이준영 선생님이 이제 와 앞길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후우! 갑갑하군. 그래도 신현수나 손일석이 이준영 선생님에게 배울 기회는 가져야지.’
이혁민 교수가 생각을 정리했다.
“알겠습니다. 신 교수 수술은 교대로 들어가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하지만 김지훈의 정규 업무를 줄여 준다고 해도 응급실을 계속 맡기에는 문제가 큽니다.”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확 찌푸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야?”
“지금처럼 김지훈의 평일 오프를 하루 더 늘리고, 신현수와 손일석이 번갈아 가면서 맡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김지훈에겐 수술만 안 들어간다 뿐이지, 응급실 당직을 일주일에 다섯 번이나 서야 하는 주가 생깁니다. 과장님 말씀대로 또 쓰러지는 놈이 나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금경태 과장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올해 들어 단 한 번도 자신의 뜻을 그대로 따른 적이 없는 이혁민 교수였다. 작년과 달라진 점이라고는 이준영 과장이 왔다는 것뿐이었다.
‘이혁민, 내가 이 정도로 양보를 했는데 고작 전공의 한 놈 힘들어진다고 또 토를 달아? 결국 이게 모두 이준영 때문이야. 그놈만 없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겠지.’
명백한 오판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 사람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야심이 있든 없든, 일정한 지위까지 오른 사람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경우는 많지 않은 법이었다. 그릇된 방향으로 이용하는 것이 문제지, 오히려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여기에 질투나 시샘 같은 감정이 끼어들면 충분히 달라지고도 남았다. 최대 라이벌이자 아킬레스건인 이준영 과장의 존재가 금경태 과장의 판단력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혁민 교수가 선수를 치고 나왔다.
“말씀이 없으신 걸 보니 동의하신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마지막 날까지 파트 결정을 하지 못한 경우가 처음이라, 어쩌면 다들 엉뚱한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바로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쯤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노골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꼴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 교수 말도 일리가 있어. 김지훈이 많이 힘들어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하지.”
의국을 나오는 금경태 과장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일반 외과 교수들조차 좌지우지 못한다는 사실에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반드시 서울 병원을 한 손으로 휘어잡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그렇게 되면 구미는 물론 천안 병원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3개 병원을 합치면 2천 베드가 넘는 규모였다. 그런 대형 병원을 대표하는 의사라면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금경태 과장의 뒷모습을 보던 이혁민 교수가 입을 달싹거리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논문 문제를 잘못 꺼냈다가는 신현수까지 문제가 생기겠지. 신현수, 내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의사가 되라고 하셨다. 그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다음 주에는 최종 수정된 논문을 받아야 한다. 이혁민 교수는 신현수가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하길 간절히 바랐다. 세계 학회에 논문이 채택되면 그보다 더한 명예는 없겠지만, 대신 평생 마음의 짐을 지고 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파트와 업무 분담에 관한 결정이 전해졌다. 혈관 수술을 나눠 들어간다는 말에 손일석이 안타까워했다.
“어후! 이런! 제길! 혈관 수술은 나 혼자 다 들어가도 되는데 반이 뭐야? 지금하고 똑같잖아.”
“일석아, 반밖에가 아니라 반이나 들어간다야. 좋게 생각해. 난 아예 못 들어가잖아. 아! 그나저나 응급실을 육 개월이나 돌아야 되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김지훈의 입이 찢어지고 있었다.
반면 신현수의 얼굴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혹시나 했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손일석과 나눠 들어간다면 고작 2주에 하루만 이준영 과장의 수술을 볼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진 신현수가 인상을 쓰다 말고 김지훈을 보았다.
세상에 같은 돈을 받으며 일이 많아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응급실 근무는 피를 말린다. 그런데 이미 3개월이나 근무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좋아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지훈이 어떤 꿈과 의지를 가졌는지, 이준영 과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는 신현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배우고 싶어도 6개월 내내 응급실 당직을 서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뭐가 저렇게 좋을까?’
“김지훈, 당직을 많이 서는 주에는 일주일에 5일이나 응급 수술을 커버해야 할 수도 있어. 넌 힘들지도 않아?”
“힘들지. 하지만 울면 뭐하니. 그리고 배우는 게 있잖아. 이왕 하는 거 즐겁게 하는 게 좋지. 까짓것, 3개월만 있으면 구미 가는데, 뭐. 거긴 2년차한테 천국이잖아.”
스승님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어서 좋다는 본심을 얘기하기에는 낯이 간지러웠다. 솔직히 스승이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신현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과장님 태도가 변했다고 해도 널 보는 눈빛이 여전하다는 건 알아? 과장님이 이준영 과장님을 싫어한다는 사실은? 이 두 가지 문제가 겹치면 정말 고생할 텐데, 그걸 알고도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아예 모르는 거야. 모르는 거겠지. 알면 저럴 수가 없잖아.’
어찌 보면 김지훈도 자신만큼이나 답답한 상황이었다. 신현수의 눈에는 더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우는 놈이나, 눈 밖에 나 과도한 업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까? 김지훈처럼 아무 눈치도 없이 살아야 하는 걸까?
고민에 찬 신현수를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금경태 과장 파트 환자들의 차트를 모았다. 간담도 파트는 처음이라며 흥분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환자 파악을 끝낸 김지훈이 의국을 나가다 말고 머리를 탁탁 쳤다.
“어라? 그러면 이번 주말은 누가 응급 수술 당직이야. 오늘이……. 이준영 선생님 근무시네?”
손일석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훈이 절망에 빠져 탄식을 터트리듯 말했다.
“아! 논문. 이러다 정말 이혁민 선생님한테 맞아 죽겠다. 에이 씨! 현수하고 너무 비교되네. 누구는 좋겠다.”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는 신현수의 눈빛이 어둡기만 했다.
갑자기 금경태 과장에게 김지훈을 왜 찍었는지 속 시원하게 묻고 싶었다. 혹시 자신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큰 사달이 날 것이다. 솔직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김지훈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금경태 과장의 행동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김지훈을 보는 눈빛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감정은 그대로라는 말이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과장 파트까지 돌게 됐는데 김지훈은 변함이 없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면 자신은 이준영 과장의 수술을 볼 기회가 적어진다는 사실만으로도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외에는 김지훈보다 훨씬 좋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즐거워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김지훈이었다.
그날 저녁이 될 때까지 의국을 떠나지 않던 신현수가 환자 파악을 마치고 돌아온 김지훈을 유심히 보았다. 논문 때문에 큰일이라며 난리를 치고 있었다. 지금도 역시 다가올 더 큰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최소한 그렇게 보였다.
반면 신현수 자신은 의욕이 떨어질 정도로 심각하기만 했다.
‘이유가 뭘까? 너나 나나 과장님이라는 문제를 똑같이 갖고 있잖아. 그런데 넌 어떻게 웃을 수 있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그놈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만 뱅뱅 돌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난 신현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논문 자료를 뒤적이던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 하늘 무너지겠다. 뭔 일 있어?”
목소리가 밝기만 했다. 문득 속으로만 끙끙댈 것이 아니라 직접 듣고 싶어졌다. 김지훈도 자신의 상황을 다 알고 있지만 이겨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김지훈, 넌 지금 즐거워?”
“즐겁긴, 인마. 논문 때문에 죽겠다니까.”
“그거 빼고는 힘든 일이 없어?”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따라 왜 이래? 너 혹시 내 걱정 하는 거야? 야! 천하의 신현수가 내 걱정을 다 하다니, 너 뭐 잘못 먹었구나.”
“그래. 니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서 걱정된다. 과장님,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순간 김지훈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휙 스쳤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별소리를 다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장님 깐깐한 거 모르는 사람 있어?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어차피 돌아야 하는데 징징거릴 필요는 없잖아.”
신현수의 표정이 묘해졌다. 얼렁뚱땅 넘어가고 있었지만, 김지훈도 금경태 과장에게 찍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놀라움을 넘어 일종의 충격이었다.
‘김지훈, 너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야?’
신현수가 다시 논문에 머리를 박고 있는 김지훈을 보며 이마를 주물렀다. 생각해 보면 김지훈만큼 어렵게 전공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솔직히 음성부터 시작해 순탄한 적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난 이준영 과장님 문제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니가 이렇게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도대체 뭐야?’
신현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