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같은 환자, 같은 상황, 그리고 다른 생각 (1)
입맛을 다시며 눈가를 찌푸리던 금경태 과장이 윤재철 환자를 보며 이것저것 물었다. 꽤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는 듯 상당히 자세한 부분까지 질문을 했다. 급기야 이제 막 나온 검사 결과까지 물어보는 통에 김지훈이 미처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직 확인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김지훈, 위암 수술했다고 환자가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것 봤어? 이 환자는 대장과 식도를 연결했기 때문에 있는 거야. 그런데 검사 결과도 바로 확인을 안 해? 킵을 하려면 제대로 해. 알았어?”
“예, 과장님.”
앞뒤 사정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이 힘차게 대답을 하고는 바로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노티를 했다. 옆에 있던 신현수의 눈빛이 묘해졌다.
‘과장님의 태도가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고 해도 생각까지 바뀌는 사람이 아닌데, 정말 변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급히 검사 결과지를 확인한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중환자실 환자의 검사 결과는 최대한 빠르게 확인하는 게 맞아. 이유야 어찌 됐든 아침에 낸 검사를 기억하고 확인까지 하는 점은 확실하게 배워야 해.’
사소한 일이라고 불평만 해 봐야 속만 쓰릴 뿐이었다. 더구나 금경태 과장에 대한 감정까지 좋지 않은 마당이었다. 항상 배운다는 자세를 갖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작 중요한 순간이 왔을 때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을 놓칠 수도 있었다.
잠시 후, 드레싱을 할 때가 됐다. 상당히 조심스럽게 치료를 했지만 통증을 느낀 윤재철 환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이때를 놓칠 금경태 과장이 아니었다.
금경태 과장이 짐짓 윤재철이 눈을 뜬 것을 미처 보지 못한 것처럼 수술 창상을 확인했다. 드레인을 통해 나온 삼출물로 푹 젖은 거즈에 코를 대고 냄새까지 맡았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들에게는 감염과 누출을 확인하기 위한 당연한 행동이었다. 반면 환자 입장에서는 더럽다고 생각되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하는 의사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냄새와 색깔을 보니까 아직까지는 문제가 없네. 아주 다행이야. 김지훈, 드레인에서 안 좋은 냄새가 나면 지켜보지 말고 바로 연락해.”
다시 한 번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금경태 과장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윤재철을 보았다.
“어이쿠! 드레싱 때문에 깨신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이게 의사들 일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우니까 안심하시고 치료만 잘 받으시면 되겠습니다.”
윤재철이 통증이 심한 것처럼 살짝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만 끄덕였다. 금경태 과장이 인사를 하고는 중환자실을 나갔다. 얼굴 표정이 몹시 좋지 않았다.
‘윤재철의 반응이 저러면 곤란한데. 제길! 이준영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윤재철과 가족들의 머릿속에 나에 대한 기억을 심어 놔야 해.’
금경태 과장이 보이자 윤서연의 가족들 모두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기분이 다소 풀린 금경태 과장이 손짓, 발짓까지 해 가며 상세하게 설명을 했다. 이를 보고 있던 신현수가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썼다.
‘과장님이 이러시면 안 되는 일 아닌가? 이준영 선생님이나 이혁민 선생님이 설명을 제대로 안 하실 리도 없고, 이러다 서로 다른 말이라도 하면 그땐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지?’
신현수의 눈에도 서서히 금경태 과장의 이중적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윤재철 환자는 물론 오현미 환자를 대하는 모습이 다른 환자들을 대할 때와는 눈에 띄게 달랐다. 환자가 재력으로 소문난 사업가가 아니었거나, 차장 검사의 부인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미 금경태 과장 스스로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느 정도 생각은 했지만 아버지가 이사장이 아니었다면 내겐 어떻게 대했을까? 나도 김지훈처럼 똑같은 처지에 빠졌을까? 아니라고 해도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는 일석이 정도였겠지?’
김지훈을 보는 눈빛과 표정은 분명히 자신을 보는 것과 달랐다.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과도하게 이준영 과장을 견제하는 모습까지 겹쳤다.
그 순간 문득 금경태 과장에게 힘차게 대답을 하는 김지훈이 떠올랐다.
‘정말 과장님의 속마음을 하나도 모르는 것일까?’
신현수의 머릿속이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날 오후 회진이 끝나고 2년차들이 스테이션에 모두 모여 촉각을 곤두세웠다. 1년차는 물론 삼사 년차까지도 모두 파트 이동이 결정됐지만, 아직도 2년차들은 정확한 통보를 받지 못했다. 의국에서 금경태 과장과 이혁민 교수가 그 문제를 상의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손일석이 입맛을 다셨다.
“간단한 파트 문제를 아직도 결정을 못했다니, 역시 우리 년차는 여러모로 특별해. 그동안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잖아. 일이 너무 과중하다고 생각하시는 거겠지? 사실 잘만 나누면 힘은 들겠지만 그렇게 과중하지도 않은데.”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였다. 김지훈이 금경태 과장 파트를 맡는다면 신현수가 오상익 교수 파트를 맡고, 손일석이 이혁민 교수 파트를 맡게 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 골치 아플 이준영 과장과 신기동 교수 파트 일은 2년차들에게 적절하게 나누어 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변수는 항상 있기 마련이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3개월 동안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스승인 이준영 과장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은 분명 아쉽기만 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응급실 당직을 자청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오프 날이 그만큼 적어질 테니, 고경아에게 미리 얘기는 해야겠지만 말이다.
“니들이 문제지, 뭐. 일을 나누면 로딩이야 적어는 지겠지만, 응급실하고 신기동 선생님 수술을 동시에 커버하기가 만만한 일이 아니거든. 체력이 달리면 나처럼 바로 쓰러진다.”
“그렇겠지? 응급실이 훨씬 힘들어서 정말 미안하긴 하지만, 솔직히 난 신기동 선생님 수술을 전담했으면 좋겠어. 현수야, 넌 어떻게 생각해?”
힐끗 손일석을 보는 신현수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파트 문제로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원칙적으로는 자신이 김지훈의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힘든 것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회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과장님, 이준영 과장님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런 이유로 절 막지 말아 주십시오. 전 배우고 싶습니다. 그게 잘못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신현수의 속마음을 모르는 김지훈이 웃으며 말했다.
“그냥 파트 이동에 관한 일인데 얼굴이 왜 그래? 설마 이준영 선생님한테 매일 탈까 봐 그런 건 아니지? 하긴 살벌하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적응이 안 돼요.”
신현수의 눈가에 짜증이 확 스쳤다. 윤재철 환자를 수술하는 모습을 보며 이준영 과장에게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전에 없이 강해졌다. 하지만 금경태 과장이 지금까지 결정을 미루고 있다는 사실이 불안하기만 했다. 농담인 줄 빤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쏴붙이고 말았다.
“내가 그 정도로밖에 안 보여?”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일석을 보았다.
‘일석아, 내가 뭐 실수했냐? 이 자식 왜 이래?’
손일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은근히 기분이 나빠진 김지훈이 혼자 툴툴거리다 입맛을 다시며 일어났다. 혹시 감정싸움이라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손일석이 깜짝 놀라며 팔을 잡았다.
“지훈아, 왜? 어디 가려고?”
“환자 보러 간다. 오늘로 파트가 바뀌는데 인사는 하고 가야지. 에휴! 중한 환자들을 두고 떠나면 기분이 영 찜찜해. 새로운 파트 환자도 며칠은 뭔가 빠트린 게 있는 것 같아서 파트나 지역을 옮길 때가 제일 갑갑하더라.”
공연한 오해를 한 손일석이 김지훈을 째려보며 의자에 털썩 등을 기댔다.
“난 이따 볼란다. 아! 그놈의 파트가 뭔지 되게 신경 쓰이네. 원하는 대로 해 주시면 안 되나.”
‘혈관 수술이 저 정도로 매력이 있었나?’
피식 웃은 김지훈이 힐끗 신현수를 보고는 병실로 향했다.
눈가를 찡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신현수가 고개를 돌렸다. 김지훈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스테이션 앞을 지나가는 김지훈이 보였다.
“할아버지, 정말 이러실래요? 걸어야 한다니까요. 지금 숨소리도 안 좋은데 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으면 어떻게 해요?”
“영감, 선생님 말씀 좀 들어요. 큰일 난다잖아. 어이쿠! 선생님, 미안해요. 저 영감탱이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서.”
“할머니, 이럴 땐 강하게 나가셔야 돼. 할머니만 고생하신다니까요? 이러다 덜컥 폐렴이라도 와서 중환자실에 내려가면 돈이 얼마나 드는지 말씀드렸잖아요.”
“영감, 들었죠. 돈 엄청 많이 든데.”
깜짝 놀란 환자의 부인이 최윤성 환자의 귀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귀가 어두워 잘 듣지도 못하고, 말도 안 듣던 최윤성 환자가 갑자기 허리에 두른 복대를 단단히 맸다. 그러고는 끙끙 소리까지 내 가며 걷기 시작했다.
돈이란 놈은 참 묘한 놈이었다. 씁쓸한 일이었지만 아무리 엄포를 놓아도 꼼짝도 하지 않던 사람에게 강한 자극을 주기도 했다. 잠깐 착잡한 마음이 들었던 김지훈이 웃으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잘 걸으시면서 그동안 엄살을 부렸어요? 이따가 한 번, 아니 두 번은 더 나오셔야 돼요.”
김지훈의 밝은 목소리가 퍼졌다. 신현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았다. 자신 때문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언제 그랬냐는 듯 환자에게 열정을 기울이고 있었다. 문득 윤재철의 말이 기억났다.
‘진정으로 마음을 쓰는 것이 보인다고 하셨나?’
그동안 누구보다도 냉철하다고 스스로 자신했던 신현수였다. 하지만 금경태 과장의 행동과 논문에 이어, 김지훈의 모습까지 온통 혼란만을 주고 있었다.
계단으로 사라지는 김지훈을 본 신현수가 슬며시 뒤를 따랐다. 생각대로 중환자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윤서연이 밝게 웃었다. 김지훈이 윤재철 환자 옆에 앉아서는 뭔가 열심히 말을 했다.
등이 배기는지 윤재철이 손으로 침대 끝을 가리켰다. 급히 일어서는 윤서연을 막아선 김지훈이 손잡이를 돌려 침대를 절반 정도 세우며 웃었다. 평소 근엄했던 윤재철도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윤서연을 이성으로서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친구의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도 아니었다. 어떤 환자를 보던 김지훈은 항상 열과 성의를 다했다.
문득 인턴 때부터 지금까지 보아 온 김지훈의 모습이 떠오른 신현수가 콧등을 찡그리며 안경을 고쳐 썼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신과는 무엇 하나 비교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상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김지훈은 어느새 자신보다 여러 면에서 앞서 있었다. 머릿속에 든 지식이나 외과 의사로서의 실력은 몰라도, 환자를 대하는 마음과 태도는 정말 따라가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도대체 뭘까?
‘과장님을 빼면 지훈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나? 악어, 정갑수? 그렇게 셋 정도를 빼면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네. 저런 모습 때문이었을까?’
윤서연의 얼굴에서 불안한 기색이 사라지고 있었다.
신현수가 답답한 듯 두 눈을 비비며 한숨을 내쉬었다.
윤서연은 왜 김지훈을 좋아했을까? 혹시 지금도 좋아하고 있을까?
예전이었으면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기만 했다. 아직도 윤서연을 향한 열정이 분명히 남아 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유를 떠올리는 순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항상 환자를 위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의사가 바로 김지훈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유 없이 김지훈을 아끼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짜증 한번 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먼저 마음을 열고 스스럼없이 솔직하게 대하는 사람이 바로 김지훈이었다.
‘내가 서연이었다면 누구에게 더 마음이 갔을까?’
여자의 마음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윤서연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최소한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훨씬 오래전부터 보았고, 아버님이라 부르며 따랐던 윤재철은 쉽게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불과 사흘 만에 김지훈을 볼 때마다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얼굴을 찡그리던 신현수가 조용히 병동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