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77화 (277/1,329)

제1화 진정한 써전들 (3)

책을 따라 수술 과정을 따라가던 김지훈의 양손에 어느새 수술 기구가 들려 있었다. 오른손만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긴 숙달돼도 양손을 적용하기 어려울 텐데 언감생심이었다.

“도진아, 오늘은 현수하고 내가 킵을 할 테니까 일 밀리지 말고 잘 마무리해.”

한동안 작은 여유를 즐긴 김지훈이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신현수와 윤서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윤재철 옆에 앉아 있었다. 김지훈이 신현수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아버님, 괜찮으시지?”

“응. 생각보다 빨리 깨셨고, 너무 많이 아파하셔서 내가 진통제 하나 드렸어. 문제없겠지?”

수술 후 진통제 투여는 상대적 금기였지만, 의사가 킵을 하며 안전하다는 판단하에 주는 이상 큰 문제는 없었다. 물론 그 의사가 믿을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한 일이기는 했다.

“그럼, 신현수 판단인데 당연히 믿어야지. 서연아, 너도 걱정하지 말고 가서 좀 자. 우리가 보고 있을게.”

“고마워, 지훈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김지훈이 잠시 환자 기록을 살피고는 한 손에 단단히 삐삐를 움켜쥔 채 중환자실 내 당직실에서 잠시 잠을 청했다.

단 1분이라도 더 자야 하건만, 문득 떠오른 수술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덩달아 수술실에서 느낀 감동까지 다시 다가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소스라치게 놀란 김지훈이 허겁지겁 일어나 당직실 문을 열었다.

윤재철 환자를 찾다 말고 피식 웃었다. 신현수가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것이다. 윤서연이 침대 옆에 앉아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다.

“현수야, 아침에 일도 해야 하니까 잠시 쉬어. 서연아, 너도 가서 좀 자. 현수랑 내가 있는데 뭔 걱정이 이렇게 많아. 빨리 둘 다 나가세요.”

“괜찮아, 지훈아. 나 아침까지 있어도 돼.”

“김지훈, 나도 괜찮으니까 좀 더 자.”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돼. 주치의는 서도진이지만, 백 일 당직 중이니까 사실상 내가 주치의라는 거 알잖아. 주치의 대리로서 말하는데, 환자의 안정과 치료를 위해 둘 다 가서 쉬어. 단기간에 끝날 싸움이 아냐.”

앞으로 윤재철이 병마와 싸워야 할 시간은 길고도 멀었다. 처음부터 힘을 빼면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순간에 자리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중환자실 킵에 익숙한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슬며시 윤서연의 팔을 잡았다.

“서연아, 지훈이 말이 맞아. 조금만 쉬고 와.”

마지못해 일어난 윤서연과 함께 중환자실을 나가던 신현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이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이내 환자 상태를 확인하고 드레싱을 살폈다. 피곤이 온몸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불현듯 믿음직하다는 생각이 든 신현수가 흠칫 어깨를 떨다 말고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김지훈이 보인 환자에 대한 열정과 성의가 보호자나 환자에게 얼마나 힘이 됐을지 이제야 피부로 느껴졌다. 숙련된 술기와 고도의 지식만큼 필요한 것이 바로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마음이었다.

“김지훈, 고맙다.”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걸던 신현수의 눈빛이 착잡해졌다.

윤재철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아직도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암 환자에게 수술은 시작에 불과했다. 고령의 최윤성 환자가 좀처럼 거동을 하지 못했다. 당연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수술 다음 날부터 미열이 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검사 결과는 괜찮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고령 환자에게 가장 주요한 사망 원인인 폐렴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시도 때도 없이 시간만 나면 병실로 올라가 소리를 질렀다. 하필이면 환자의 귀까지 상당히 어두워 누가 들으면 화를 낸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할아버지, 일어나세요. 안 걸으면 큰일 나요. 할머니, 내가 분명히 말씀드렸죠. 할아버지 투정 받아 주기 시작하면 퇴원 못해요. 수술만 잘되면 뭐해요.”

아파 죽겠다며 꼼짝도 하지 않는 환자를 억지로 일으킨 김지훈이 복도까지 환자를 부축하길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환자의 부인이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 뭐가 그렇게 만날 미안하세요. 이건 사실 제가 할 일이에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할아버지 움직이게 하시면 그게 도리어 절 도와주시는 거죠. 고맙습니다, 할머니.”

“고마워요, 의사 선생님.”

이왕 하는 일 모두가 즐겁고 고맙게 하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환자의 부인이 미안해하면서도 웃을 때마다 김지훈의 마음도 따뜻해졌다.

최윤성 환자 말고도 환자는 차고도 넘쳤다. 여기에 중환자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윤재철 환자까지 할 일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뿐이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규 일과에 응급실 커버 및 응급 수술, 그리고 신현수와 번갈아 가며 서는 중환자실 킵까지 정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다시 100일 당직이라도 서는 것 같았다.

1년차보다 더 과중한 상태였지만, 매일 과도한 일에 치여 사는 서도진에게 차마 중환자실 킵까지 맡길 수는 없었다. 그 탓에 논문을 다시 작성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힘들었다.

여기에 금경태 과장의 행동까지 상당히 눈에 거슬렸다.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다른 환자와는 확연히 다르다고 해도 오현미 환자에게 신경을 쓰는 것은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런데 윤재철 환자를 마치 자기가 수술한 것처럼 회진 돌 때도 모자라, 뻑하면 중환자실을 찾았다.

더구나 이혁민 교수와 상의 한마디 없이 보호자들에게 환자 상태를 설명했다. 보호자들이야 신경을 써 준다고 좋아했지만, 과장이라고 해도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이었다. 만에 하나 이혁민 교수의 판단과는 다른 소리를 하면 그보다 문제가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오더까지 간섭을 했다.

“김지훈, 이틀에 한 번씩 알부민 투여해. 그리고 항생제를 트리플(triple:삼제 요법)로 쓴다고 해도 대장을 식도와 연결한 이상 세파 계열은 약해. 보다 강한 걸로 써.”

“예, 과장님.”

알부민은 당연한 오더였지만 항생제는 함부로 변경하면 안 되는 오더였다. 물론 이혁민 교수가 아니라고 해도 같은 파트 윗년차인 최철한과 유석재의 오더였다면 두말하지 않고 따랐을 것이다. 과장이라고 해도 엄연히 파트가 다른 이상 이런 행동은 분명 월권이었다.

‘참, 누구 환잔지 모르겠네. 저러다 문제 생기면 책임을 질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도 배울 건 배워야지.’

속마음과는 다르게 김지훈은 금경태 과장에게 깍듯하기만 했다. 보는 앞에서 바로 알부민과 항생제 오더를 내고 있었다.

사실은 시늉뿐이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던 금경태 과장이 나가자마자 김지훈이 전화기를 들었다.

“최철한 선생님, 과장님께서 갑자기 윤재철 환자 오더를 내리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오더 내용을 들은 최철한이 구시렁거리며 대답했다.

(에휴! 과장님 왜 그러시냐. 일단 이혁민 선생님과 상의드린 후 연락할 테니까 기다려.)

얼마 후, 연락이 왔다. 이혁민 교수도 잠시 고민하더니 금경태 과장의 의견이 더 합당하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새로운 오더를 받은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보호자에게 환자 상태를 설명하는 말에서도 배울 것이 많았어.’

배움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관심 때문은 절대 아니겠지만, 윤재철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평소 체력에 신경을 많이 썼는지 이제는 침대를 세우면 앉아 있을 정도였다.

코 줄 때문에 말을 하기 어려웠지만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도 남았다. 그런데 뻔질나게 찾아오는 금경태 과장과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간간이 웃음기만 보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김지훈의 입장에서도 윤서연의 아버지이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할 말은 반드시 해야 했다.

“움직이지 못하시는 상태기 때문에 폐에 문제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숨을 크게 쉬셔야 합니다. 그래야 마취 때문에 줄어들었던 기관지가 잘 열립니다.”

“김지훈 선생, 소변 줄은 언제 뺍니까? 이게 제일 불편하군요.”

“아버님, 현수한테 하시는 것처럼 제게도 말씀 놓으세요. 저도 서연이 친굽니다. 그리고 소변 줄은 아마 토요일은 돼야 뽑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매시간 소변량을 체크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윤재철이 고개만 끄덕이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외동딸의 친구이자 사살상의 주치의에게는 다를 줄 알았다. 하긴 신현수에게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 원래 과묵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수술 후, 3일째 되는 날인 토요일이었다. 주말 집담회가 끝나고 모처럼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가 함께 윤재철 환자를 찾았다.

“많이 아프시죠. 조금만 더 참으시면 곧 괜찮아질 겁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회복이 너무 빨라 일반 병실로 올려 달라고 하실까 봐 도리어 그게 더 걱정입니다.”

이혁민 교수가 기분 좋게 웃었다. 듣고 있던 이준영 과장도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다. 그래야 여전히 무뚝뚝하게만 들렸지만, 말속에 숨은 마음을 전하기에는 충분했다.

“식도와 대장을 연결했기 때문에 일주일째 되는 날이 최대 고비입니다. 중환자실에 있으면 정신적으로도 무척 힘들지만, 그런 분은 아닌 것 같아 정말 다행입니다.”

움직일 때마다 수술 상처는 물론 주렁주렁 달린 줄들이 통증과 불편함을 전했지만, 윤재철이 눈가에 주름이 만들어질 정도로 웃었다.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연이 아버님도 저렇게 웃을 줄 아셨네.’

놀람도 잠시, 아예 입을 다물지 못할 일이 생겼다. 윤재철이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의 손을 잡았다. 눈시울까지 벌겋게 변해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혁민 교수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 분 교수님을 믿지 못했었습니다.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을 몰라보고 의심했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평생 두 분을 잊지 못할 겁니다.”

이제 암과의 싸움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무척 이르고 성급한 말이었지만, 윤재철은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암흑 같은 나날 속에서 이제야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본 것이다.

윤재철이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 선생도 고마워요. 비록 과는 다르지만 서연이도 김지훈 선생처럼 되도록 가르쳐 주세요.”

중환자실에서만 보았을 뿐인데 얼굴이 화끈거릴 말이었다. 하지만 윤재철은 수많은 직원들을 거느린 기업의 오너였다. 더구나 자수성가한 사업가이자 입지전적인 사람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누구보다도 정확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지금도 대놓고 하는 칭찬에는 어색했던 탓이었다.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중환자실에서 나갔다. 불과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금경태 과장과 신현수가 들어왔다.

‘너무 노골적인 거 아냐? 도대체 어떻게 스승님이나 이혁민 선생님만 오시면 조금 있다가 바로 나타나지?’

지금까지 자신을 살피고 있는 김지훈을 보고 있던 윤재철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사이에 잠이라도 든 것처럼 금경태 과장의 기척에도 더 이상 눈을 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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