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진정한 써전들 (2)
신현수가 슬쩍 이혁민 교수를 보았다. 수술 결과가 가장 궁금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윤서연과 가족들일 것이다. 8시간이 넘도록 무작정 기다렸으니 지금쯤은 가슴이 새카맣게 탔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수술실을 나가려는 신현수를 본 이혁민 교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현수, 잠깐만 기다려라. 김지훈, 서도진, 니들도 내 말 잘 들어. 오늘 수술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방법이나 과정이 아니라 이준영 선생님의 마음이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나와 함께 수술을 하셨는지 깊이 생각하고 배워라.”
막연한 짐작이 이혁민 교수의 말을 통해 확신으로 바뀌었다. 오늘 일반 외과 의사들이 가져야 할 진정한 자세를 본 것이다.
순간 묘한 감동에 휩싸인 김지훈이 힐끗 신현수를 보았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신현수도 김지훈을 보고 있었다.
‘현수야, 우리도 선생님들처럼 됐으면 좋겠다. 이기고 싶은 라이벌도 좋지만, 이게 더 좋은 것 같은데?’
‘내가 김지훈과?’
생각은 다르지만 눈빛에 담긴 의미는 같을지도 몰랐다.
김지훈에겐 진정한 라이벌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손일석과 이경석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밤 10시가 돼서야 윤재철 환자가 회복실로 옮겨졌다.
9시간 만에 수술실에서 나온 윤재철의 안색이 창백하기만 했다. 언제든 수술실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차마 아버지의 수술을 볼 수 없었던 윤서연이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윤재철이 눈도 뜨지 못했다. 눈가가 벌게진 윤서연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버지의 손만 잡고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진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윤재철 환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버님, 눈 떠 보세요. 수술 끝났습니다, 아버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르자 윤재철의 입이 살짝 열렸다. 나직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는 것도 힘든지 눈꺼풀만 파르르 떨렸다.
윤서연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빠! 저예요. 눈 떠 보세요.”
하나뿐인 딸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눈도 뜨지 못하던 윤재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윤서연이 온기를 주려는 듯 차갑기만 한 아버지의 손에 뺨을 가져갔다. 그 순간 윤재철이 윤서연의 뺨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서연아.”
단 한마디 말에 윤서연이 참고 참았던 울음을 펑펑 터트리고 말았다.
“아빠,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의사면서도 암세포가 아버지의 위와 식도를 갉아 먹을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지난 한 달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너무나 미안한지 윤서연의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지훈이 신현수에게 눈짓을 했다. 이젠 중환자실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신현수가 아버지의 손을 놓지 못하는 윤서연의 어깨를 잡았다.
“서연아.”
윤서연이 서둘러 눈가를 닦으며 일어났다. 이혁민 교수가 수술 방 앞에서 가족들에게 수술 결과를 설명하고 있었다. 가볍게 허리를 숙여 윤재철의 상태를 확인한 이혁민 교수가 윤서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윤서연 선생, 수술 잘됐으니까 이제 순조롭게 회복되시길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걱정하지 마라.”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설움에 북받쳐 간신히 대답을 한 윤서연이 눈물을 감추려는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윤재철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미 대기하고 있던 유석재가 김지훈과 함께 환자를 보았다. 바이탈은 안정적이었고, 긴 수술에도 불구하고 윤재철이 빠르게 의식을 되찾았다.
어느 틈에 나타난 이준영 과장이 이혁민 교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스승님도 오늘 같은 날은 좀 쉬시지. 스승님, 제가 잘 볼 테니까 마음 놓고 집에 가셔서 푹 쉬세요.’
차마 말은 못하고 눈빛만 보내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수술이 끝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금경태 과장이 나타난 것이다. 순식간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금경태 과장이 이준영 과장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이 교수, 수술 잘 끝냈다는 소리 들었어. 정말 수고했어. 나도 신경이 많이 쓰여서 말이야. 환자분은 괜찮으신가?”
“지금까지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보호자들에게는 설명했지? 환자 상태가 괜찮다면 가족들 면회를 허락해도 되지 않겠어?”
고개를 끄덕인 이혁민 교수가 드레인을 확인한 후 보호자 면회를 허락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설명은 이미 들었지만, 온갖 줄을 주렁주렁 단 채 힘들어하는 윤재철을 본 가족들이 울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윤서연이 점점 더 힘들어했다.
“서연아, 걱정하지 마. 금방 회복되실 거야.”
김지훈도 그저 이 말만 할 수 있었다.
잠시 환자와 가족들을 지켜보던 금경태 과장이 헛기침을 하며 윤재철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윤재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금경태 과장이 가족들을 보며 웃었다.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회복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이 교수가 정말 힘든 수술을 잘해 냈네요. 비록 제 앞으로 입원한 것은 아니지만 저도 신경을 많이 쓰겠습니다. 혹시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실 때 이 교수가 없으면 저라도 성심껏 대답을 해 드릴 테니 언제든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어찌 됐든 일반 외과 과장의 말이었다. 가족들이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지만 김지훈은 쓴 입맛을 다셨다. 고생은 다른 사람들이 다 했는데, 문득 엉뚱한 사람이 생색을 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 정말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지?’
평소에는 단 한 번도 다른 파트 환자에게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금경태 과장이었다. 착잡한 마음에 멍하니 면회를 지켜보던 김지훈이 누군가를 보며 살짝 손을 흔들었다. 급한 환자 때문에 잠깐 병동에 들렀던 신현수가 온 것이다. 금경태 과장이 역시 신현수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잘 아는 분이라고 했지만 환자에 대한 마음이 아주 좋아. 현수까지 이렇게 신경을 쓰니, 환자분은 물론 가족분들도 마음을 푹 놓으셔도 좋겠습니다.”
금경태 과장이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이혁민 교수의 눈치를 보면서도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확실히 과장이라는 자리가 가진 힘은 정말 대단했다.
결국 이준영 과장이 먼저 자리를 떴다. 곧 짧기만 한 가족 면회도 끝났다. 그제야 금경태 과장이 윤재철에게 걱정 말라는 말을 하며, 이혁민 교수의 팔을 잡고 중환자실을 나갔다.
“이 교수, 이젠 퇴근하지. 김지훈, 유석재,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현수 너도 신경 좀 쓰고.”
돌아선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무섭도록 차가워졌다. 윤재철 환자 앞에 선 이준영 과장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까닭 모를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불과 세 달도 채 안 됐는데, 이준영 과장은 이혁민 교수는 물론 신기동 교수와의 관계를 예전 이상으로 완벽하게 회복시켰다. 더구나 그들과 함께 누구나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는 수술을 잇따라 성공했다.
내일 아침이면 이준영 과장의 이름이 또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정치력이나 로비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일한 방법은 수술을 통해 이준영 과장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뿐이었다.
‘더 이상 물러날 수는 없어. 더 어려운 케이스가 온다고 해도 이젠 반드시 내 손으로 성공시켜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준영 저놈 때문에 내 입지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어.’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금경태 과장의 얼굴에서 웃음기마저 사라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먼 곳에서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겉보기에는 중한 환자에 대한 관심이었지만, 본심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오늘 수술한 최윤성 환자도 고령이라 위험합니다. 그렇게 관심이 있으시면 한 번쯤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한 번 싫어지기 시작하자 점점 더 싫어졌다. 어떤 이유에선지 신현수도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환자를 보다 갑자기 유석재에게 허락을 구했다.
“선생님, 오늘 제가 오픕니다. 환자분을 평소 아버님이라고 부르며 따랐던 분입니다. 제가 킵을 하겠습니다.”
“니가? 괜찮겠어?”
“옆에 있어 드리고 싶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리 같은 2년차라고 해도 파트가 다른 이상 곤란한 일이 있기 마련이었다. 신현수가 김지훈의 오더와 다른 오더를 내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유석재가 힐끗 김지훈을 보고는 단단히 주의를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킵은 해도 좋은데, 오더는 지훈이하고 도진이가 낸다는 거 잊지 마.”
“알겠습니다.”
김지훈이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환자와 얼마나 가까운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오프까지 반납하겠다는 신현수의 마음에 공연히 가슴이 뿌듯해졌다.
이혁민 교수가 뒤늦은 회진을 돌았다. 중요한 환자 몇몇을 본 후, 마지막으로 최윤성 환자를 찾았다. 환자의 곁에 앉자 발을 주물러 주던 아내가 수술 후 통증에 한참을 시달리다 이제야 잠이 들었다고 했다.
유석재가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노티를 했다. 하지만 이혁민 교수는 환자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면서 살펴야 할 것들을 확인했다. 환자 부인의 물음에도 웃으면서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병실을 나가던 이혁민 교수가 서도진을 보았다.
“오늘 밤 환자 잘 봐라.”
아침에 수술을 들어가 이제야 수술 방에서 나왔지만, 1년차에게 주어지는 여유는 없었다. 서도진이 피곤한지 눈을 껌벅이며 대답을 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밤 11시가 넘어서야 이혁민 교수가 퇴근을 했다. 정말 길고도 힘든 하루였지만 무사히 수술이 끝난 덕인지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김지훈도 마음만은 정말 가벼웠다.
‘중환자실은 잠시 현수에게 맡기고 일단 환자부터 보자.’
김지훈이 다시 최윤성 환자를 찾았다. 아직도 발을 주물러 주고 있던 부인이 급히 일어났다.
“그냥 앉아 계세요. 말씀 들으신 대로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앞으로 제일 중요한 건 나이가 많으시기 때문에 빨리 움직여야 하는 겁니다. 거동이 늦어져 폐렴이라도 오면 정말 큰일 날 수 있어요. 아셨죠?”
“이렇게 아파하는데 언제부터 움직여야 하죠?”
“내일 아침에는 앉히시고요. 상황을 봐서 소변 줄을 빼드리면 그때부터는 화장실을 직접 가시게 해야 합니다. 다들 수술 후에는 힘들어하시지만 그게 제일 좋습니다. 움직인다고 상처 터지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환자의 부인이 김지훈의 손을 잡으며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김지훈의 눈에는 순박하고, 다소는 말이 굼뜬 시골 할머니로 보였다. 문득 어릴 적 보았던 할머니가 떠오른 김지훈이 한동안 자리를 지켰다.
“할머니, 이젠 저도 일하러 가야겠네요. 제 말 절대 잊지 마세요. 할아버지 투정을 들어 주시면 안 됩니다.”
김지훈이 일어나자 환자의 아내가 주스 하나를 건넸다. 싱긋 웃으며 잘 먹겠다고 하자, 환자 부인의 얼굴에 행복하고 고마운 미소가 걸렸다.
중환자실은 잠시 신현수에게 맡겨도 좋을 것이다. 의국에 들어선 김지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수술 기록지를 작성하는 서도진이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Diagnosis : Advanced stomach cancer with esophagus invasion
(진단명 : 식도를 침범한 진행된 위암)
Op name : total gastrectomy with esophago-transverse colon and jejunal anastomosis
(수술명 : 식도와 평행 결장 문합술 및 평행 결장과 공장 문합술을 이용한 위 전 절제술)
딱 여기까지 쓰고 볼펜만 돌리고 있었다. 수술을 보고 공부한 대로 쓰면 되는 수술 기록지였지만 오늘 수술은 거의 보질 못했다. 당연히 갑갑한 일이었다.
“도진아, 왜 안 쓰고 있어?”
“아후! 쓰긴 써야 하는데 뭐 본 게 있어야지요. 잘못 쓰면 선생님이 쫙쫙 빨간색으로 그냥 날리실 거 아니에요.”
“너 지금 백 일 당직 거의 끝났다고 나한테 개기는 거지? 야! 서도진이 많이 컸네. 일단 책 보고 써, 인마. 나도 거의 못 봤는데 빨간 볼펜은 무슨.”
서도진이 반색을 하며 이제야 수술 책을 펼쳤다. 김지훈이 딴청을 피우는 척하며 책에 눈길을 돌렸다. 이미 한 번 읽은 내용이었지만, 오늘 간간이 본 수술 과정을 상기하자 그나마 세부적인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