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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271화 (271/1,329)

제10화 2명의 환자 (2)

그날 오후, 신기동 교수가 날린 비수에 온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손일석이 의국에 들어오자마자 비통한 표정으로 허물어졌다. 김지훈이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웃었다. 하지만 그런 여유도 잠시였다.

응급 수술이 떴다. 이준영 과장과 불과 2시간 동안 수술실에 있었을 뿐이었다. 곧 김지훈마저 휘청거리는 다리를 끌고 간신히 의국에 올라와 손일석 옆에 쓰러졌다.

“왔냐? 탔구나.”

“응. 죽고 싶다. 다시 한 계단 내려앉았어. 언제 2년차 되냐고 하시네.”

“지훈아, 우리 인생이 왜 이렇게 파란만장할까? 그렇게 탔는데도 아직까지 탈거리가 남아 있다는 게 난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아.”

“넌 멀었어, 인마. 난 일 년이 넘도록 타고 있잖아. 그것도 장작불에 숯불에 칼까지 번갈아 맞으니까 정말 죽겠다.”

온전하게 남은 사람은 신현수뿐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아침부터 하루 종일 얼굴이 좋지 못했다.

손일석이 쩝쩝거리며 물었다.

“현수야, 탄 건 우린데 니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설마 우리만 탄 게 서운한 건 아니지? 현수야, 넌 끝까지 정신 차려야 한다.”

신현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경을 고쳐 썼다. 금경태 과장이 건넨 논문을 토대로 새로 작성한 논문을 볼 때마다 답답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결 수준이 높아진 논문과는 달리 신현수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2년차 3명이 저마다 고민을 안은 채 의국을 지켰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일과를 마쳤다.

드디어 공포의 수요일 저녁이 왔다. 회진을 끝낸 이혁민 교수가 2년차들을 불렀다.

2년차들의 표정이 복잡했다.

“논문을 보기 전에 먼저 할 말이 있다. 사실 세계 학회에 논문이 채택될 가능성은 대학 병원마다 한두 건에 불과할 거다. 더구나 너희들은 이제 2년차고, 주어진 시간도 세 달이 채 안 됐으니까 가능성이 제로라고 봐도 무방해. 하지만 논문은 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지식을 깊게 만들고, 그만큼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용한 도구야.”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아예 제출하지도 못하는 겁니까?”

“우리 병원에서는 세 건만 제출할 수 있는데, 그 정도로 잘 썼다면 가능하겠지. 일단 작성한 논문들 주고 이걸 읽어 봐. 내가 유석재하고 함께 쓴 논문이다. 너희들이 쓴 논문과 비교해 보면서 무엇이 부족한지, 혹은 무엇을 잘했는지 스스로 판단했으면 한다.”

이혁민 교수가 2년차들의 논문을 받으며 다른 논문 하나를 건넸다. 신현수가 고개를 숙인 채 망설이고 있었다.

“신현수, 논문 안 가지고 왔나.”

“아닙니다.”

신현수의 손에 2개의 논문이 들려 있었다. 스스로 작성한 논문과 금경태 과장의 논문을 사실상 표절하다시피 한 논문이었다. 양심과 야심을 사이에 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어떤 걸 내야 하지? 우리나라에서 세계 학회가 또 열릴까? 열린다고 해도 그때는 전문의가 돼 있겠지. 이런 성과를 낼 수 있는 기회는 이번뿐이야. 하지만 양심을 팔아 가면서까지 이렇게 해야 하나?’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분명히 약점을 잡히는 거야. 하지만 따지고 보면 과장님도 출세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잖아. 우리 둘만 입을 다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신현수가 이혁민 교수의 재촉하는 목소리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던 손이 마침내 한 개의 논문을 선택했다.

‘이 자식은 그냥 내면 되지. 되게 뜸들이네. 하긴 니가 우리 중에 제일 잘 쓰긴 했을 텐데 이혁민 선생님 말씀에 실망했겠지. 욕심 안 내면 그게 사람이냐.’

김지훈이 내심 쓴 입맛을 다시며 꼼꼼하게 유석재의 논문을 읽어 내려갔다. 아무리 2년차가 되자마자 쓴 첫 논문이라지만, 어차피 참고 자료는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교해 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났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우! 이게 년차의 차인가? 아무리 이혁민 선생님과 함께 썼다지만, 내 건 거의 국민학생 수준이네.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해.’

손일석도 얼굴만 찡그리고 있었다. 반면 신현수는 건성으로 논문을 읽고는 초조한 표정으로 이혁민 교수를 보고 있었다.

논문을 모두 검토한 이혁민 교수가 묘한 눈빛으로 신현수에게 힐끗 시선을 주고는 입을 열었다. 어느 틈엔가 빨간 볼펜이 들려 있었다.

“김지훈, 손일석, 노력한 흔적은 보인다만 고칠 부분이 상당히 많네. 내가 체크를 해 줄 테니까 다시 작성하면서 아까 말한 것처럼 깊게 공부를 해 봐.”

“예, 선생님.”

의외로 질책을 하지 않았다. 그 덕에 대답은 힘찼다. 하지만 이혁민 교수의 손에 들린 빨간 볼펜이 화려한 춤을 추는 순간 김지훈과 손일석의 얼굴이 까맣게 죽어 갔다.

‘하나, 둘, 셋, 넷……. 여덟, 아홉. 어이쿠! 저걸 다 고치느니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게 낫겠네.’

논문이 온통 빨간색으로 도배가 됐다. 내용은 물론 매끄럽지 못한 서술에 사소해 보이는 실수까지 모조리 잡아냈다.

“김지훈, 빨간색 볼펜 있나. 볼펜 하나로는 부족하겠어.”

얼굴이 화끈거리며 식은땀이 났다.

서도진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논문을 가득 채운 빨간 표시가 가슴이 아프도록 눈을 찔러 왔다. 결국 김지훈과 손일석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묵묵히 자리만 지켰다.

이혁민 교수가 곧이어 신현수의 논문을 읽었다. 무슨 이유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까지 썼다.

‘신현수가 아무리 뛰어나다지만, 이건 2년차 수준이 아닌데. 설마 과장님이 3년차 대신 신현수와 함께 썼단 말인가?’

“신현수, 내가 놀랄 정도로 정말 잘 썼다. 수고했어. 그런데 말이야. 오해하지 말고 들어. 이거 너 혼자 쓴 거 맞나? 세 달 만에 어떻게 이런 논문을 쓸 수 있지?”

순간 흠칫 놀란 기색을 보인 신현수가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과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이혁민 교수의 표정이 묘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과장님이? 그래. 그랬구나. 그래도 정말 훌륭하다. 역시 신현수답다. 사소한 문제들이 몇 군데 보이지만 이 정도면 제출할 수 있겠어. 수고했다.”

김지훈이 너무 놀라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두 귀로 똑똑히 들었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현수 거는 제출이 가능하다고? 그럼 유석재 선생님이 쓴 논문과 수준이 비슷하다는 말이잖아.’

축하해 주어야 할 일이었지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같은 년차였다. 조금 더 고생을 했다지만 신현수 역시 시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결과는 천양지차인 것이다.

김지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뒤지는 일이라도 최소한 격차는 크게 나지 않아야 신현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라이벌이라고 여겼는데 한참 앞에서 달리고 있었네. 도대체 안 보이는 곳에서 얼마나 노력을 한 거야? 후우!’

충격이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한다고 여겼지만, 신현수는 그 이상의 노력을 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다.

한참 동안 고민에 잠겼던 김지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스로에게 실망만 하고 정작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더욱더 뒤처질 것이다. 끝내는 까마득한 차이가 날 것이다.

‘그래. 다시 달려 보자. 아직 시간은 많아. 신현수가 있다는 것은 내겐 행운이야. 기죽지 말자. 나도 할 수 있어.’

정말 간만에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투지가 느껴졌다.

잠시 2년차들을 보던 이혁민 교수가 일어섰다.

“다들 수고했다. 내 말 명심하고, 김지훈하고 손일석은 다음 주까지 다시 작성해 와. 신현수는 보강에 힘을 쓰고.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끝까지 최선을 다해라.”

“예, 선생님.”

김지훈의 목소리만 힘차게 들렸다.

잠시 신현수에게 눈길을 준 이혁민 교수가 막 의국을 나가려는 순간 금경태 과장이 들어왔다. 어쩐 일인지 손에 차트 하나와 엑스레이 봉투가 들려 있었다.

금경태 과장이 일어나는 이혁민 교수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곧 심각한 표정으로 차트를 내밀며 복부 CT를 걸었다. 2년차들이 자동적으로 자리를 지켰다.

“이 교수, 이 환자 좀 봐야겠어.”

환자를 두고 상의하는 일이 거의 없는 금경태 과장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차트를 확인하고는 꼼꼼하게 CT를 보았다. 점점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거 원격 전이만 없다 뿐이지, 거의 말기와 다름없는 상태가 아닙니까. 식도 주변으로 너무 퍼진 데다 위치가 나빠서 위를 자른다고 해도 소장을 연결하기가 정말 어렵겠습니다.”

“그렇지. 나도 동감이야. 수술을 성공한다고 해도 합병증이 발생할 가능성 역시 상당히 높겠지?”

“상당히 높다고 봐야죠. 만일 종격동 부위에 감염이 된다면 치사율이 구십 프로는 넘을 겁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지금까지 이 정도로 조언을 구한 적은 없었다. 금경태 과장의 행동이 이상하긴 했지만 이혁민 교수가 눈가를 좁히며 환자에 집중했다.

“암을 그대로 남겨 둔 채 시행하는 항암 치료는 거의 효과가 없을 테고, 방사선 치료는 도리어 다른 합병증만 발생시킬 겁니다. 환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일 방법은 수술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수술만이 답이다, 이거지. 이 교수, 가능하겠어?”

“너무 위험해서 선뜻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환자나 보호자가 동의를 한다고 해도 정말 신중하게 결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금경태 과장이 고민이라는 듯 길게 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그럼 힘들겠군. 사실 외래를 통해 날 찾아온 환자야. 하지만 올해부터는 파트 구분을 확실히 하기로 했으니까, 이 교수가 환자를 맡아 자세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 좋겠어. 사실 나보다 위암 쪽은 수술을 훨씬 많이 했으니까 그게 맞고.”

“제가요? 그럼 제게 환자를 맡긴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다시 한 번 CT와 차트를 본 이혁민 교수의 눈이 반짝였다. 평소 어려운 수술일수록 도전하고 싶어 하는 성향이 강한 이혁민 교수였다. 이번 경우 역시 어떻게든 수술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았다.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금경태 과장이 짐짓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환자가 마취과 2년차인 윤서연의 아버지야. 환자에게 잘 설명해 줘. 신경도 좀 더 쓰고.”

그 순간 김지훈과 손일석이 깜짝 놀라 서로를 보았다. 그런데 신현수는 아예 벌떡 일어나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목소리를 높였다.

“과장님, 환자가 서연이 아버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 아! 두 집안이 친분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사실이었어?”

의외일 정도로 격한 신현수의 반응에 금경태 과장이 살짝 당황했다. 신현수의 숨이 거칠어졌다.

전공의가 된 이후 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양가는 최근까지도 윤서연과 자신의 결혼 얘기가 오갈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윤서연이 만나기를 꺼려하는 기색을 보였고, 신현수 역시 김지훈과 연관된 기억으로 감정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도 힘들 때마다 윤서연을 떠올리곤 했다. 스스로는 부인하고 있었지만, 어느 틈엔가 질투와 분노 속에서도 사랑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금경태 과장의 시선을 느낀 신현수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예. 잘 아는 분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암에 걸리셨다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딸이 우리 병원 전공의인데 왜 다른 병원을 찾았는지 몰라도, 한 달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를 했어. 이렇게 된 이상, 이 교수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현수 너도 환자에게 잘 설명해.”

“예, 과장님.”

신현수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단순히 친분만 있는 사이가 아니었나?’

혼사가 오고 갈 정도로 깊은 사이인지 모르는 금경태 과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혁민 교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내일 환자에게 연락해, 이 교수 앞으로 입원하라고 할 테니까 잘 봐줘. 이 교수, 서운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웬만한 실력으로는 수술하기 너무 위험하고 어려운 케이스니까 무리하지 마. 그러다 문제 생기면 입장이 많이 난처해질 수 있잖아.”

교묘하게 이혁민 교수의 자긍심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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