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70화 (270/1,329)

제10화 2명의 환자 (1)

김지훈이 뻐근한 목과 어깨를 돌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금경태 과장에게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생긴 것이다.

‘양손을 다 쓸 수 있으면 수술을 할 때 그만큼 수월하겠지? 방법이 뭘까?’

병동으로 올라가 일과를 마친 김지훈이 마침 의국에 있던 유석재를 보며 물었다.

“선생님, 과장님이 원래 수술하실 때 양손을 다 쓰시나요?”

“그럼, 인마. 당연하지.”

“엥? 당연한 일이에요?”

“야, 복강경을 하려면 양손을 다 써야 돼. 배를 여는 것하고는 수술 방법 자체가 다르잖아. 그래서 하기도 힘들지만 배우기는 더 어려워.”

“그럼 원래부터 양손을 다 쓰신 게 아니네요.”

“그랬으면 벌써 말이 나왔겠지.”

김지훈이 이마를 탁 쳤다. 의외로 쉽게 이유를 알아냈다. 복강경을 이용한 수술을 하며 자연스럽게 양손을 쓰는 법을 익힌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전공의가 복강경 수술을 할 기회는 단연코 단 한 번도 주어질 수가 없었다. 도입한 지 몇 년 되지 않는 복강경 수술은 교수들에게도 부담스러운 분야였다.

김지훈이 새로운 고민에 휩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 수술을 하며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김지훈 역시 복강경 수술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복강경 수술이 아니더라도 양손을 잘 쓸 수 있다면 고난이도의 수술도 한결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그게 환자를 위해서도 좋은 일인데. 그렇다면 일단?’

니들 홀더를 손에 익힌다고 들고 다니면서, 따르륵 선생이라는 별명을 들었던 김지훈이었다. 수술을 잘하기 위해 수술 도구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손에 익혔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병동으로 나가 수술 기구 대신 드레싱 기구 2개를 양손에 하나씩 잡았다. 금경태 과장이 수술하는 모습을 되새기며 손을 놀렸다.

한동안 드레싱 기구를 들고 씨름을 하던 김지훈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역시 오른손잡이가 왼손을 잘 쓴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렵다.”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기대던 김지훈이 아무 생각 없이 시계를 보다 말고 얼굴이 사색이 됐다.

‘논문!’

부리나케 의국으로 들어간 김지훈이 논문을 잡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김지훈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손일석이었다.

(지훈아, 환자 있다. 논문 쓰지 말고 빨리 내려와라.)

“논문 쓰지도 못했어, 이 자식아.”

(나도 오늘은 건드리지도 못했다. 동지! 빨리 내려와. 빤뻬리야. 이준영 선생님과 수술 들어가세요.)

손일석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얄미울까?

정말 죽어라 죽어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후의 보루, 스승인 이준영 과장이 있었다. 이제는 금경태 과장과 관련이 된 것이라도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었다.

수술이 시작됐다.

수술 중에 엉뚱한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준영 과장의 손을 보며 금경태 과장이 수술을 하는 모습을 떠올리고 말았다. 2년차답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무색하게 오늘도 탔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귀신처럼 알아채는 이준영 과장이었다.

“김지훈, 너 또 이럴래?”

“아닙니다, 선생님.”

고개를 흔든 김지훈이 집중력을 찾고 수술에 임했다.

함께 수술에 들어온 안호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준영 과장의 살벌한 말이 연타로 터지고도 남을 때가 됐는데 오늘따라 띄엄띄엄하기만 했다. 그래도 등짝에 땀이 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수술이 끝나고 난 직후,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을 찾았다.

“선생님, 여쭤볼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오늘 오후에 금경태 과장님 수술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양손을 자유자재로 썼습니다. 수술을 하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턱을 만지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금경태가 양손을 자유자재로 써? 복강경 수술 때문이겠지만, 그만큼 노력을 많이 했다는 소리겠지. 솔직히 놀랍군. 그런 마음과 열정으로 환자와 제자들을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제 짐작으로는 양손을 다 써야 하는 복강경 수술 때문인 것 같은데, 혹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해서요.”

‘있지.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하든 양손을 모두 사용하면 돼.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다면 누구나 그렇게 했겠지. 될 때까지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데 할 수 있을까? 그것 말고도 네가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남았는데 말이야.’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보며 오른손을 들었다.

“방법? 난 이 손만 주로 써. 방법은 네가 찾아.”

예상했던 답이었다. 사실 김지훈이 묻고 싶었던 것은 방법이 아니었다. 수술 방을 나서는 이준영 과장을 뒤따르며 김지훈이 다급히 말했다.

“선생님, 정말 배워도 되는 겁니까?”

‘당연한 소리지. 양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이득이야.’

이준영 과장이 힐끗 뒤돌아보고는 말없이 당직실로 향했다. 특유의 표현인 무언의 허락이었다.

‘좋았어. 될 때까지 해 보자.’

김지훈이 주먹을 꽉 쥐며 각오를 다졌다. 배움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 시간 이후, 김지훈이 가운 주머니 양쪽에 항상 수술 기구를 넣고 다녔다. 시간만 나면 양손에 수술 기구를 들고는, 하다못해 볼펜이라도 잡고 돌리는 연습을 했다. 역시 왼손을 주로 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화요일 오전 일과가 끝나자 김지훈과 신현수가 논문을 붙잡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이제 하루 후면 이혁민 교수에게 초안을 보여야 할 시간이었다.

손일석이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며 투덜거렸다.

“시간 참 절묘하네. 하필이면 수요일이냐. 이럴 줄 알았으면 목요일 수술을 내가 들어가는 건데. 에휴! 난 두 손 번쩍 들었다. 이렇게 된 거, 신기동 선생님한테 타지나 말아야지. 지훈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시끄러워, 인마. 논문 좀 쓰자.”

“자식이, 이 형은 생사의 기로 앞에 서서 공포에 떨고 있는데 넌 논문이 눈에 들어와? 서운하다, 김지훈.”

온갖 방해 공작을 펼치던 손일석이 고개도 돌리지 않는 김지훈을 보며 한숨만 쉬었다. 논문과 혈관 수술은 두 마리 토끼였다. 하지만 어느 쪽도 놓치기 싫은 것이 본심이었다.

그 시간, 금경태 과장도 두 장의 복부 CT를 보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흐음! 이걸 어쩐다.’

한 과의 책임자인 과장이란 자리는 수많은 혜택과 함께 자부심을 준다. 그중 금경태 과장의 어깨를 가장 으쓱거리게 만드는 일은 상당한 힘을 가진 환자들이 과장이라는 이름만을 보고 스스로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오늘이 바로 그 대표적인 날이었다.

오전에 2명의 환자가 외래를 방문했다. 한 명은 서울고등검찰청 차장 검사의 부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실업가인 윤재철이었다. 2명 모두 병원이나 금경태 과장 입장에서는 VIP 중의 VIP였다.

병은 돈이나 권력이 있다고 해서 비껴가지 않는 법이었다. 그들 역시 위암이라는 질환을 피하지 못했다.

전문 분야가 세분화된 이상, 이혁민 교수가 수술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환자나 보호자가 모두 보통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환자들 역시 이혁민 교수를 보고 온 것이 아니었다.

금경태 과장은 이런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수술만 잘되면 대단한 인연을 맺을 수도 있었다. 특히 남편이 차장 검사이거나 상당한 재력가로 소문이 난 실업가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흐음! 차장 검사 부인은 2기 말 정도까지 진행이 됐지만 위치도 괜찮고, 수술에는 큰 무리가 없겠어. 고등검찰청 차장 검사라면 최소 일급 공무원에 준하는데, 당연히 내가 수술을 해야지. 문제는 윤재철, 저 사람인데.’

윤재철은 마취과 전공의인 윤서연의 아버지였다.

한 달 전에 위암 판정을 받았지만 다른 대학 병원 모두 수술을 자신하지 못했다. 암 덩어리가 위와 식도 경계부에 위치한 데다 이미 식도 하부 주변으로 암이 침범한 상태였다.

수술을 하게 되면 위를 모두 잘라내야 했다. 여기까지는 제법 벌어지는 수술 중 하나였기에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결정적인 문제는 식도 주변에 퍼진 암이었다.

제거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제거한다고 해도 식도의 상당 부분을 잘라 내야 하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남은 식도와 소장을 연결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더구나 만일 수술 후 식도와 소장 연결 부위가 새거나, 혹은 감염을 일으키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연결 부위가 심장을 포함한 기도나 대동맥 등 중요 장기들이 있는 종격동(mediastinum)에 위치하기 때문에 감염 발생 시 사망률이 대단히 높았다.

위험도가 너무 높아 이러한 문제를 환자에게 상세히 설명하지 않고는 수술을 할 수가 없었다. 높은 사망률을 언급해야 하는 의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고, 환자는 바짝 겁을 집어먹었을 것이다.

겁을 먹은 환자가 자신 없어 하는 의사를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여러 병원들을 전전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찌푸렸다.

흔히 보는 보통 환자라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혁민 교수에게 넘기면 마음 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윤재철은 금경태 과장의 입장에서 결코 통상적으로 보는 환자가 아니었다.

신동석 이사장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상당한 재력가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경제력을 가졌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반드시 인연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 금경태 과장의 철학이었다.

‘윤재철은 내게 어떤 이득을 줄 수 있을까. 어차피 돈이 관계된 일 말고는 부탁할 일도 없겠지. 그것도 자존심을 죽여 가며 말이야. 그럼 수술을 성공한다고 해도 문제없이 퇴원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많이 잡아야 십 프로? 그 십 프로에 확실하지도 않은 이득을 건다. 그건 아니지.’

성공한다고 해도 돌아오는 것은 명성이 다일 것이다.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면 무의미할 뿐이었다. 반면 실패한다면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았다.

돈이든 권력이든 힘을 가진 사람을 치료하는 일은 어느 경우든 흔히 대가를 얻거나 치르기 마련이었다. 만에 하나 과실이라도 생긴다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금경태 과장이 팔짱을 낀 채 고민에 잠겼다.

무사히 퇴원할 확률은 10프로에 불과했다. 실패할 확률이 90프로에 육박한다는 말이었다. 너무 위험했다. 환자가 충분히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긴다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어야 할 것이다.

‘이건 승산이라고는 전혀 없는 도박이야. 환자나 보호자가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내 명예는 물론, 그간 이룬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갈 수도 있어. 그렇다면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가야 하는데.’

답답한 가슴에 한숨을 내쉬던 금경태 과장의 눈이 번쩍였다. 앞으로 있을 수술 스케줄이 적힌 표였다. 한 장 한 장 차근차근 살피던 금경태 과장이 외래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 이 환자들 수술 스케줄을 다음 주로 당길 테니까 바로 연락해서 이번 주 내로 입원하라고 해.”

“예, 과장님.”

환자 명단을 받아 든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술 날짜가 2주나 남은 환자들이었다. 의아한 일이었지만 금경태 과장은 그런 질문을 허락할 정도로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혁민, 넌 분명 덤벼들겠지.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모르지만, 내 판단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잘하면 이번 수술이 아주 좋은 기회를 만들어 줄 수도 있겠어. 난 네가 나와 함께 수술을 잘한다는 세 사람 안에 든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안 들거든. 네 한계를 느껴 봐. 만일 수술을 포기한다면 볼 만하겠어.’

금경태 과장이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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