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스승이란 Ⅱ (3)
불현듯 가슴이 뜨거워진 김지훈이 고경아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정훈철이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김지훈이 힐끗 뒤돌아보며 웃고는 강가로 향했다.
철길을 따라 난 작은 길을 따라 걸었다.
고경아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좋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강바람이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현재를 즐기라는 말이 끊임없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래.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자. 사랑하는 경아 씨가 내 옆에 있고, 훈철이 형과 형수와 함께하는 시간조차 즐기지 못한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내겐 지금이 바로 특별한 시간이야.’
고경아의 손을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꽉 쥔 김지훈이 속삭였다.
“경아 씨, 사랑해요.”
고경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저도 사랑해요, 지훈 씨.”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행복함에 도취된 김지훈이 고경아를 와락 껴안았다. 깜짝 놀란 고경아가 버둥거렸지만 그럴수록 두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고경아의 부드러운 뺨을 따라 가쁜 숨결이 느껴졌다.
촉촉했던 입술의 감촉이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가져가던 김지훈이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고경아를 보았다.
“김지훈, 둘이 지금 뭐 해?”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진 고경아가 수줍게 웃었다.
“지훈 씨, 형부가 찾나 봐요.”
“에이! 훈철이 형은 눈치도 없나. 경아 씨, 다음에는 우리 둘이만 옵시다.”
김지훈과 정훈철이 툭탁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김지훈의 강력한 항의에 목소리를 높이던 정훈철이 한수임의 한마디에 목을 움츠렸다.
“여보, 당신이 잘못했어요. 하여간 결혼하기 전에도 그러더니 지금도 눈치라고는 좁쌀만큼도 없어요. 지훈 씨,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막상 듣고 보니 묘한 상황이었다. 한수임의 말에 반색을 하던 김지훈이 머리만 긁적였다.
‘형수가 왜 사과를 하지?’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 가며 어느새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고경아와 함께 뒷좌석에 앉아 마냥 즐거운 표정만 짓던 김지훈의 얼굴이 점점 굳었다. 손일석의 말은 정확했다.
‘무지하게 밀린다고 하더니 정말이네. 이러다 오늘 내에 병원에 도착할 수 있을까?’
차량 후미를 밝히는 붉은빛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고경아와 손을 잡은 채 잠이 든 김지훈이 누군가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 2시가 넘었다. 양수리가 준 행복의 여운까지 즐기기에는 너무 늦었다.
‘우와! 아침 회진 준비하려면 언제 일어나야 되지?’
일요일 밤에 미리 환자 파악을 해야 월요일 아침이 여유로운 법이었다. 그 시간을 고스란히 날렸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밝게 웃으며 고경아와 헤어진 김지훈이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래도 이번 주말만큼 많은 것을 얻는 때는 없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의사가 되자.
배움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죄는 지식이 아니라 사람이 짓는다.
현재를 즐겨라.
우리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라.
허경발 교수와 이준영 과장, 그리고 고경아와 정훈철 부부 모두에게 고맙고 감사했다. 흐릿하고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개운해지며,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
김지훈이 월요일 아침을 힘차게 시작했다. 마치 처음 1년차가 됐을 때처럼 의욕이 넘쳤다. 누구보다도 빨리 환자 파악을 마치고, 차트를 보며 오래간만에 서도진을 새까맣게 태웠다. 빨간 펜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니가 지금도 이런 거 틀릴 때야? 서도진, 정신 똑바로 차려. 너 아직 백 일 당직 중이야.”
“죄송합니다, 선생님.”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거리고 오전 일과를 마친 김지훈이 호흡을 가다듬고 오후 수술에 들어갔다. 입장이 백팔십도 바뀌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들으며 새카맣게 탔다.
“김지훈, 암은 발병 부위에 국한된 질환이야, 아니면 전신 질환이야?”
처음 듣는 질문이었다. 병소에 국한된 질환이라면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답은 빤했지만 이유를 대답할 수 없었다. 김지훈이 머뭇거리자 이혁민 교수 특유의 목소리가 가슴 깊숙한 곳을 푹 찔렀다.
“니 의사 되려면 아직 멀었구나. 위암 환자는 위를 떼고, 유방암 환자는 유방만 떼면 끝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답을 못해. 그럼 수술만 잘하면 최고의 일반 외과 의사가 되나?”
이건 확실하게 답을 할 수 있었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마찬가지다. 수술만 잘하는 의사는 기술자야. 환자는 일차적으로 육체적인 질환 때문에 오지만, 정신적 충격도 꽤 크다는 거 잘 알잖아. 결국 의사는 환자의 정신과 마음도 헤아려야 해. 암이란 놈이 온몸을 휘젓고 다니니까 다들 무서워하는 거 아니가? 그런 면을 종합하면 암은 전신 질환이야.”
“결국 환자의 모든 면을 고려해서 치료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의사는 그래야 된다. 그건 그렇고, 니 논문 준비는 열심히 하고 있겠지. 내일모레 초안 받는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현재를 즐기라는 말에 일요일을 열심히 즐겼지만 논문 역시 현실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논문과 관련된 내용을 심도 있게 물었다.
“미세 석회화 병변이 암일 가능성이 몇 프로나 나오나?”
“십오 프로에서 삼십 프로까지 다양하게 보고되고 있습니다. 우리 병원 케이스로는 약 이십삼 프로쯤 됩니다.”
“음! 꽤 되네. 그럼 수술법은 어떻게 되나? 진행 기수에 따라 전통적으로 수술해, 아니면 다른 각도로 접근하나?”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일부 논문에서는 치료법까지 언급됐지만, 김지훈이 써야 할 논문을 벗어난 내용이었다. 안 돌아가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힐끗 보고 지나친 내용이 제대로 생각날 리가 없었다.
이혁민 교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니 논문을 단순히 제출하기 위해서 쓰나? 내는 공부하라고 준 거야. 병은 아는데 치료법을 모르면 그게 뭐나? 니 학생이야? 아니지. 학생도 치료법은 달달 외워.”
불과 며칠 전에야 이준영 과장에게 간신히 2년차답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이젠 학생보다 못한 전공의가 됐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부터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장작불은 화끈할 정도로 뜨겁지만, 숯불 역시 화력은 무시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점점 타들어 가던 김지훈이 마침내 하얀 잿더미로 변할 즈음 수술이 끝났다.
“똑바로 해라. 니 이런 식으로 가면 전문의 되어도 껍데기만 남는데이. 2년차라는 놈이 주는 것만 달랑 받아먹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생님.”
힐끗 김지훈을 보며 입을 내민 이혁민 교수가 장갑을 벗으며 탁탁 손을 쳤다.
그때 서도훈이 빼꼼이 얼굴을 내밀었다.
“저… 이혁민 선생님, 과장님께서 김지훈 선생님 수술 들어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수술을? 무슨 수술?”
“외래에서 응급으로 급성 담낭염 환자를 올리셨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금경태 과장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이미 이준영 과장과 그 문제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주말에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대동하고 스승인 허경발 교수와 만나 뭔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대처할지는 온전히 김지훈의 몫이었다.
대놓고 걱정스러운 티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은근히 김지훈에게 원하는 바를 말했다.
“김지훈, 가 봐라. 수술 굉장히 잘하시는 분이니까 어떻게 수술하시는지 잘 배우고. 너 설마 과장님 앞이라고 떨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장례식장 문제를 비롯해 금경태 과장과의 문제를 이준영 과장과 함께 가장 잘 아는 이혁민 교수였다. 말속에 숨은 걱정과 염려를 김지훈이 모를 리가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선생님. 저 이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당당하게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우겠습니다. 절 어떻게 보는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김지훈이 힘차게 대답했다.
“환자 회복실로 옮기고 과장님 수술 들어가겠습니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수술실을 나가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지훈의 목소리가 예상 밖으로 너무 힘찼기 때문이다.
‘스승님과 이준영 선생님하고 자리를 함께하면서 확실히 뭔가를 얻은 건가? 그래, 김지훈. 일단 목소리가 힘차서 좋구나. 난 널 믿는다.’
이혁민 교수는 김지훈을 믿었고, 김지훈은 멘토인 이혁민 교수를 믿고 따랐다. 스승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김지훈에게는 행복한 일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수술에 들어간 김지훈이 여느 때처럼 최선을 다해 수술에 임했다. 급성 담낭염이 너무 심해 응급으로 담낭을 절제해야 할 환자였다.
눈을 크게 뜨고 수술을 어떻게 하는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불편한 마음이 사라져서인지 사소한 술기까지 눈에 쏙쏙 들어왔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은 대부분 주로 오른손을 사용하고, 왼손은 보조적인 역할로서만 사용한다. 의사들 역시 수술 중 왼손을 사용해야 하지만 보조적인 역할이라는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금경태 과장은 마치 왼손을 오른손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양손잡이였나? 아니지. 그렇다고 해도 수술은 대개 오른손을 주로 사용하는데.’
아뻬처럼 단순한 수술이 아닌 것이 천운이었다. 퍼스트를 서며 금경태 과장의 손에 최대한 집중을 했다.
분명했다. 금경태 과장은 놀랍게도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고 있었다.
일반 외과를 대표하는 3대 고수 중의 한 명이라는 소리가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동안 이런 사실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인데 의외였다.
금경태 과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김지훈의 눈가에 놀랍다는 기색이 역력하게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사실 스스로도 최근에 와 자신의 수술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복강경 수술은 양손을 다 자유자재로 써야 제대로 할 수가 있지. 그걸 일반 수술에 응용하니까 생각 외로 정말 괜찮은걸. 김지훈, 니가 이런 사실을 알 리는 없겠지만 내 손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겠지. 이준영도 이 정도는 아니니까 말이야. 스승님, 곧 저를 이준영보다 앞에 놓으셔야 할 겁니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던 금경태 과장이 김지훈을 보았다. 당근을 던지기에 아주 적절한 때였다.
“김지훈, 외과 의사는 말이야. 기본적으로 손이 좋아야 해. 머릿속에 제아무리 값비싼 진주가 들어 있어도 목에 걸어야 값어치가 나오는 법이야.”
전 같았으면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았을 김지훈이었다. 하지만 이젠 눈빛이 번쩍거릴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장님.”
금경태 과장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
“일단 어느 정도는 타고나야겠지만 노력하는 수밖에 더 있나? 그 방법은 스스로 찾아야 해. 그래야 자기 것이 되지 않겠어?”
뜬구름 잡는 말이었지만 외과 의사에게는 노력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다.
수술이 끝날 때까지 이것저것 말해 주던 금경태 과장이 장갑을 벗으며 피곤한 듯 어깨를 주물렀다.
“수고하셨습니다, 과장님.”
김지훈의 힘찬 목소리에 금경태 과장이 입가를 말았다.
‘생각보다 더 단순한 놈이었나? 일 년이 넘도록 눈길도 주지 않았다는 걸 벌써 잊은 거야? 어쨌든 나로서는 손해 볼 일이 아니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술실을 나가는 금경태 과장의 눈빛을 본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행동과 말은 확연하게 달라졌지만 자신을 보는 눈빛은 여전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