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스승이란 Ⅱ (2)
부리나케 달려갔지만 일식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이! 인사도 못 드렸는데 벌써 가셨네.”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던 김지훈이 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막 정문을 통과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응급실을 보자 이준영 과장과 이혁원이 다시 생각난 것이다.
‘혁원이가 스승님하고 도대체 어떤 관계지? 정말 아들인가? 그럼 전에 얘기를 했을 텐데.’
전공의가 교수들의 개인사나 가정사를 알 수는 없었다. 떠도는 소문들은 믿을 바가 아니었고, 굳이 교수들의 사생활까지 알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준영 과장은 단순한 교수가 아니라 스승이었다.
문득 음성 병원과 허경발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에게도 선생이라는 말을 꼭꼭 붙이며 존칭을 썼던 허경발 교수가 이준영 과장에게는 이름을 불렀다. 그만큼 각별한 사이이며, 실력을 인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허경발 선생님의 제자에 내가 보기에는 어떤 교수님들보다 수술을 잘하시는 스승님인데, 음성 병원에서 근무하실 이유가 없잖아? 그런데 왜 그 병원에서 십 년이나 계셨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1년차 때 이준영 과장이 음성에서 청주까지 데려다주며 했던 말이 기억났다. 치명적인 의료사고를 내고 더 이상 수술을 하지 못한다던 의사가 있다고 했다.
불현듯 그 의사가 이준영 과장 자신을 빗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런 상황에 빠졌다면 음성 병원에서 일반 외과 과장으로 근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스승님이 의료사고를 냈다? 자만하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하신 이유가 그거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 충격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서울 병원에 다시 복귀하실 수 있었단 말이네. 후우!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까?’
공연히 가슴이 답답해진 김지훈이 인상을 쓰다 말고 고개를 흔들며 머리를 툭툭 쳤다.
‘에이! 재수 없는 생각을 하고 있어. 의료사고를 내실 스승님이 아니잖아. 다른 사정이 있으셨겠지. 그런데 혁원이는 또 뭐야?’
규모가 작다지만 어쨌든 음성 병원도 대학 병원의 브렌치였다. 더구나 지금 이준영 과장은 서울 병원 응급실 과장이고, 이혁원은 본과 4학년이었다. 서로 알고 있는 사이라면 이준영 과장은 몰라도 임상 실습을 돌고 있는 이혁원이 말을 꺼낼 만도 했다.
우연한 만남이었을까?
물론 이준영 과장이 오후 7시에 근무를 시작해 아침 7시 전후에 회진을 도는 까닭에 이혁원과 마주칠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일식집에서 본 자리는 상당히 어색하고 무겁게 보였다. 처음 보거나 문제가 있는 자리라면 아직 학생인 이혁원이 함께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을 텐데 짐작이 가는 바가 없었다. 김지훈이 투덜거렸다.
“설마 가족인가? 에이! 그럼 벌써 혁원이가 말을 했겠지. 둘이 성격이나 외모나 하나도 안 닮았잖아. 일단 혁원이를 족치면 답이 나오겠지. 일석이도 한몫을 할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이준영 과장과 이혁원의 얼굴이 뒤통수에 따라붙었다.
엉뚱한 추측이란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의국으로 들어간 김지훈이 시계를 보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서도진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선생님, 오프 아니세요?”
“오프지. 근데 이게 발목을 잡는다. 이러다 이혁민 선생님한테 개박살 나겠어.”
김지훈이 논문 자료를 흔들었다.
밤늦도록 논문과 씨름을 한 김지훈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도무지 진척이 보이질 않았다. 논문이 원래 쓰기 힘든 건지, 준비가 덜 돼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젠 내일의 데이트와 만남을 위해 자야 할 시간이었다.
기지개를 펴며 일어선 김지훈이 1년차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100일 당직의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채 다들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슬쩍 차트를 보니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고생들 해라. 이렇게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어? 나처럼 찍히지는 말고.’
숙소로 올라간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당직인 신현수와 오프인 손일석이 책상에 머리를 박고는 코를 골고 있었다. 머리 밑에는 논문이 깔려 있었고, 손에는 볼펜이 쥐어져 있었다.
공연한 한숨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김지훈이 멍한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응급실에 환자가 있는지 신현수는 보이지 않았고, 손일석은 꿈나라에 가 있었다.
하품을 하며 시계를 보던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약속 시간까지 3시간이나 남았다.
‘평소에는 한 시간이라도 더 잤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은데, 막상 오프 때는 눈이 더 빨리 떠진단 말이야. 희한한 일이야. 논문을 빨리 쓰라는 계신가?’
김지훈이 어젯밤에 작성한 논문과 자료들을 비교하며 빨간 줄을 쭉쭉 그었다. 반복해서 읽을수록 어딘가 어설펐고, 부족하기만 했다.
‘어후! 죽겠다.’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던 김지훈이 요란한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자명종 소리였다. 자고 있던 손일석이 마치 자연스럽게 깬 것처럼 스르르 눈을 뜨며 일어났다.
“지훈아, 뭐 하냐. 논문 써?”
“어휴! 넌 어떻게 저 큰 소리에 놀라지도 않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논문은 잘되어 가?”
“죽겠다. 준비는 안 돼 있고, 초안은 다음 주 수요일까지 내야 하는데 약속까지 있어. 이 사태를 어떻게 하지?”
“너나 나나 마찬가지다. 에휴! 오프면 뭐해.”
요란스럽게 세수를 한 손일석이 책상에 앉아 논문을 펼쳤다. 툭하면 머리를 긁으며 짜증을 내는 모습이, 손일석 역시 논문 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결국 손일석이 볼펜을 냅다 던지며 투덜거렸다.
“에이! 세계 학회고 나발이고 모르겠다. 씨펄! 지훈아, 넌 오늘 데이트한다는 거지?”
“응. 조금 있다가 바로 나가야 돼.”
“데이트하는 날까지 책상머리를 붙들고 있으니 너도 참 불쌍한 인생이다. 애쓰지 말고 빨리 준비하고 나가, 인마. 그러다 제수씨 도망간다.”
아닌 게 아니라 김지훈도 내심 걱정이긴 했다. 그동안 고경아가 잘 참아 주어서 그렇지, 다른 여자 같았으면 벌써 결별을 선언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김지훈이 볼펜을 책상에 탁 놓으며 일어섰다.
“그래. 논문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지. 일석아, 나 나간다.”
“사랑? 이 자식이 나가려면 곱게 나가지, 염장을 지르고 있네. 빨리 없어져, 인마.”
부랴부랴 외출 준비를 하며 광을 낸 김지훈이 손을 흔들다 말고 손가락을 튕겼다.
“아 참! 일석아, 혁원이 있잖아. 이혁원이. 이 자식이 이준영 선생님과 뭔가 관계가 있는 것 같아. 하오문인지, 뭔지 하는 애들 좀 풀어서 알아봐.”
“이준영 선생님하고 혁원이? 뭔 소리야?”
김지훈이 대강 당시 상황을 둘러댔다. 허경발 교수를 만났다고 하기에는 상황이 껄끄러웠다.
“그래? 이준영 선생님이 혁원이하고 중년의 여인을 만났단 말이지. 네 생각은 사모님일지도 모른다, 이거고. 그럼 혁원이가 아들이라는 소린데. 흐음! 묘하게 흥미가 생기네. 알았어. 알아볼게. 그런데 십중팔구 가족은 아닐 것 같다. 니 촉은 믿을 수가 없거든. 현재까지 상황도 그런 추측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깜짝 놀랄 일이었지만 손일석의 반응이 의외로 뜨뜻미지근했다. 하긴 아들이 본과 4학년이었다면 지금까지 말이 안 나왔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긴 했다.
“내 촉도 살아 있을 때가 있어, 인마. 나 간다.”
“가라, 이 자식아. 제길! 날이 이렇게 화창한데 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눈가를 찡그리며 투덜거리던 손일석이 김지훈이 쓴 논문을 슬며시 집어 들었다.
꼼꼼하게 논문을 읽은 손일석이 씨익 웃었다. 아무 만족스럽게 보였다.
“그렇지? 김지훈, 너도 한계가 있어야지. 그렇게 일을 하면서 논문까지 잘 쓰면 니가 슈퍼맨이지, 사람이냐? 아이고! 왜 마음이 이렇게 가벼워지지? 사악해지면 안 되는데. 아! 천진난만, 순진무구의 표상인 내 스타일 다 구겨지네.”
실실 웃으며 논문을 검토하던 손일석의 안색이 급변했다.
‘아니지. 투자한 시간으로 따지면 내가 논문을 더 잘 써야 되잖아. 비슷하다는 게 말이 돼? 이런 제기랄! 김지훈, 너 정말 이럴래? 넌 친구도 아냐, 이 자식아.’
눈을 부릅뜬 손일석이 씩씩거리며 논문에 집중했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김지훈보다 더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 사실이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 손일석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논문을 보던 손일석이 기지개를 폈다.
“에휴! 집중도 안 되고. 일단 이럴 땐 머리를 식히는 게 좋지. 그럼 이준영 선생님 호구조사 좀 해 볼까? 하오문 문도들아, 문주님 나가신다. 오더 받아라.”
혼잣말도 참 열심히 맛깔나게 잘하는 손일석이었다.
그 시간, 김지훈이 꿈결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정훈철의 차를 타고 양수리로 갔다. 승희가 외갓집에 가는 바람에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김지훈은 아쉬웠지만, 정훈철과 한수임은 도리어 좋아 죽었다.
손일석의 말이 아니더라도 능내역 근처는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모양이었다. 정훈철이 걱정하지 말라며 쭉쭉 차를 몰았다. 봉쥬르를 조금 지나친 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시골 보리밥 집.
간판도, 식당도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꽁보리밥에 10여 종류의 나물을 넣고 고추장으로 슥슥 비빈 후 한입 물자 감동의 물결이 사정없이 몰아쳤다. 구수한 된장국을 곁들였을 때는 가히 환상적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양이 적은 고경아와 한수임도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훈철이 형, 이 집 음식 정말 맛있네요.”
“그럼 당연하지. 내가 동생한테 맛없는 거 사 주겠어?”
“형부, 언니, 다음에 또 와요.”
“그럼. 우리 처제가 원한다면 언제든 콜이지.”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법이었다. 다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보리밥 집을 나와 봉쥬르로 향했다. 나지막한 언덕을 따라 강가로 내려가자 넓은 주차장이 나왔다.
차에서 내린 김지훈과 고경아가 탄성을 내뱉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한강과 강가를 따라 늘어선 푸른 산들이 한눈에 보였다. 주차장 앞으로 길게 뻗은 철길을 따라 열차가 기적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빠아아앙!
“아! 좋다.”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봉쥬르로 들어섰다. 통나무로 지은 작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에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불꽃이 튈 때마다 나무 타는 특유의 냄새가 진하게 퍼졌다.
커피 한 잔을 들고 모닥불 주위에 앉았다.
일요일인데도 사람이 많지 않아 한적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모두들 흠뻑 취했다. 고경아와 한수임이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일들을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김지훈과 정훈철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절대 빠지지 않아야 할 것이 있었다.
이심전심!
마음이 통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외쳤다.
“동동주에는 파전!”
시큼한 술 냄새와 고소한 파전 냄새가 퍼졌다. 한 사발 한 사발 비워질 때마다 김지훈과 정훈철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분위기에 취한 고경아와 한수임도 웃고만 있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정훈철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Carpe. 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너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라!
김지훈이 따라 외쳤다.
Oh! Captin! My Captin!
정훈철의 얼굴 위로 이준영 과장의 얼굴이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