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스승이란 Ⅱ (1)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허경발 교수가 김지훈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김지훈 선생, 훌륭한 스승을 만났으니 열심히 하세요. 내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겁니다.”
엄한 말과는 달리 인자하기만 한 목소리였다.
김지훈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떨려 왔다. 이제 2년차에 불과한 자신이 이준영 과장의 제자라는 것을 허경발 교수가 인정한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선생님.”
김지훈의 진지한 목소리에 허경발 교수가 넉넉한 웃음을 보이며 어깨를 두드렸다.
허경발 교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던 김지훈이 다시 일식집으로 향했다.
***
그 시간, 금경태 과장이 퇴근도 미루고 외래에 앉아 신현수와 논문을 검토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 읽으며 한숨만 내쉬었다.
“신현수, 생각보다 논문이 너무 미진해. 내가 준 자료는 다 읽어 본 거야?”
“예. 다 읽고 반영했습니다.”
“그래.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지. 하지만 이 논문은 부족한 정도가 아니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으니 이렇게밖에 더 나오나.”
신현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모두 투자해 작성한 논문이었다. 김지훈이나 손일석과는 달리 금경태 과장에게 많은 도움까지 받았다. 그런데도 금경태 과장의 눈에 미치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창피하기만 했다.
“다시 쓰겠습니다.”
“신현수, 이제 곧 6월이야. 제출할 시간이 보름 정도밖에 안 남았어. 게다가 지금까지 수정한 것만 벌써 몇 번째야? 계속 국내 학회 수준에도 내기 힘든 상태라면 논문 제출 자체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어.”
전공의가 된 이후 이런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간 단 한 번도 질책한 적조차 없었던 금경태 과장이었다. 모자란 부분이나 실수가 있어도 항상 웃고, 고쳐 주었었다.
신현수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과장님, 반드시 제출하고 싶습니다.”
“수준이 안 되는데 무슨 수로? 이리저리 눈만 돌리고 있으니 내가 주는 것도 제대로 소화를 못 시키고 있잖아. 그리고 지금 네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알아?”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금경태 과장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후우! 이사장님께서 내게 널 맡긴다고 하셨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어. 그런데 그동안 보인 네 태도는 뭐야? 양손에 떡을 쥔 채 하나도 놓지 못하겠다는 거야? 신현수, 그 정도 사리분별도 못하나.”
무슨 말을 하는지 분명했다. 더 이상 이준영 과장의 수술에 기웃거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신현수에게는 당황스럽고 괴로운 일이었다.
‘왜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고 강요를 하시는 겁니까? 과장님과 이준영 선생님에게 모두 배운다면 그게 저한테는 가장 유리한 일이 아닙니까?’
신현수가 이를 악물었다. 수많은 지식을 쌓아 가야 할 전공의가 누군가를 선택해 단 한 사람에게만 배운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유독 이준영 과장에게만은 날을 세우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금경태 과장에게 반발을 한다는 것 역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순간 머리가 지끈거린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세계 학회부터 생각하자. 이번 달만 지나면 다른 파트로 가니까 숨 돌릴 여유가 생길 거야.’
소나기는 피하고 보는 법이었다.
신현수가 나름 고민을 한 후 대답을 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과장님.”
“믿어도 되겠어?”
“예, 과장님.”
“그럼 다른 소리 하지 말고 논문에만 집중해. 그리고 다음 텀에는 오상익 교수 파트를 돌아. 임 교수하고 구 교수가 잘 가르쳐 줄 거야.”
“예? 그건 이혁민 선생님께서 정하시는 문제가 아닙니까?”
‘신현수, 네가 감히.’
금경태 과장의 눈에 분노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항상 근엄하게 보여야 할 신현수 앞에서 함부로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부글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금경태 과장이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긴 하지만, 내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지. 그리고 네가 그런 문제를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야. 넌 내가 하라는 대로만 따라와. 그러면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의사가 될 수 있어. 그걸 명심해.”
“예, 과장님.”
현실은 현실이었다. 아무리 이사장의 아들이라고 해도 자신이 전공하는 과 과장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신현수의 단단하고 날카롭던 기운이 꺾이기 시작했다.
‘더 혼내서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려 주고 싶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럼 이젠 당근을 줄 땐가?’
금경태 과장이 묘한 웃음을 터트리며 서랍을 열었다.
“신현수, 받아. 내가 쓴 논문이다.”
얼떨결에 논문을 받아 든 신현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 학회 논문인데 교수들이 준비를 안 할 줄 알았어? 우리 병원에서 제출할 수 있는 논문은 단 세 편뿐이야. 아마 서울에서 두 개를 제출하고, 천안에서 하나를 내게 되겠지. 이 교수 때문에 2년차들에게도 논문을 주긴 했지만, 내가 보기엔 경험을 쌓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어.”
“그럼 애초에 제출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단 말입니까?”
“제출은 할 수 있어. 단, 우리 과 자체 심사를 통과해야 가능한 일이야. 만일 네가 교수들보다 더 뛰어난 논문을 작성한다면 통과할 수도 있겠지.”
신현수가 물끄러미 자신의 논문을 보았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 만일 아무런 제한이 없다면 세계 학회에 몰려들 논문 수는 심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또한 이런 기회를 교수들이 그냥 지나칠 리도 없었다. 조금만 고민해 봐도 당연한 일이었다.
헛된 고생이었을까? 아니면 이혁민 교수의 의도대로 귀중한 경험이었을까?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교수들보다 훌륭한 논문을 쓸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전공의 중에는 가장 잘 썼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금경태 과장이 팔짱을 끼며 소리 없이 웃었다.
“신현수,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마. 내가 쓴 논문과 네가 쓴 논문을 잘 섞어 봐.”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첫 번째 저자에는 교수들 이름이 올라가게 돼 있어. 두 번째 저자로 누구를 올리느냐가 문제지. 내 논문을 보고 다시 작성해 온다면 제출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쓴 논문을 본 사람은 네가 유일하니까 다른 걱정을 할 필요도 없어.”
형식은 몰라도 내용적으로는 사실상의 표절이었다. 엄연히 금경태 과장이 쓴 논문을 신현수 자신이 쓴 것처럼 포장한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법적으로 말하면 안 되는 일이지. 내게도 이런 일은 큰 손해야. 하지만 난 네게 기회를 주고 싶다. 내가 키운 제자가 최고의 의사라는 말을 듣는다면 스승의 입장에서 그보다 좋은 일은 없는 법이거든. 훗날 네가 병원을 끌어가야 할 때도 큰 도움이 될 거고 말이야.”
금경태 과장이 처음으로 스승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 말에 담긴 의미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알고 있기에 신현수도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논문은 별개의 문제였다. 합법과 불법 이전에 양심이 걸린 일이었다. 그러나 금경태 과장의 말을 따른다면 불과 2년차의 신분으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경력을 쌓을 수도 있었다.
‘과장님과 내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아무도 모를 일이다. 평생 동안 묻고 간다면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을 거야.’
이마에 주름을 만들어 가며 고민을 하던 신현수가 금경태 과장을 보았다. 뿌리치기에는 너무도 강한 유혹이었다.
길게 숨을 내뱉은 신현수가 결정을 내렸다.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이번에는 세계 학회라 전문의들이 일 저자가 되지만, 사실 국내에서도 흔히들 그렇게 해. 전공의가 쓴 논문에 교수 이름이 일 저자로 오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어? 걱정하지 말고 논문에만 집중해. 그리고 내 말 확실히 따라.”
마지막 말이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자신이 쓴 논문을 주어서라도 키우겠다는 건지, 아니면 오로지 자신만을 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 세계 학회가 먼저야.’
신현수가 결국 2개의 논문을 집고 말았다.
그 순간 금경태 과장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신현수, 나중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내게도 타격이 있겠지만 네가 가장 큰 타격을 입겠지. 점점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타격도 그만큼 커지는 법이야. 지금은 세계 학회에 눈이 팔려 그 생각을 못하겠지만, 결국 너도 그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논문을 이사장 아들인 신현수의 약점과 바꾸는 것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금경태 과장이 피곤한 듯 기지개를 펴며 일어섰다. 신현수가 따라 일어나자 툭툭 어깨를 쳤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난 네 스승이야. 널 최고로 만들고 싶다. 그리고 김지훈도 키울 생각이다.”
“김지훈을요?”
신현수가 깜짝 놀라자 금경태 과장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뛰어난 놈이니까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어.”
“중요한 사실이라니요?”
“사람에겐 말이야. 자신을 긴장시키는 라이벌이 있어야 발전이 빠른 법이지. 물론 아차 하는 순간 역전이 될 수도 있지만, 결과는 신현수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겠어? 올라가 봐.”
외래에서 나가는 신현수를 보는 금경태 과장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김지훈은 확실히 신현수가 자존심을 걸고 싸우는 라이벌이 분명했다.
논문과 김지훈.
‘이혁민이 내게 큰 도움을 주는군. 김지훈이 내 파트를 돌아야 한다고 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길 정말 잘했어.’
신현수를 통제할 수 있는 두 가지 무기를 손에 쥔 것이다.
금경태 과장은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다.
***
허경발 교수를 모셔다 드리고 일식집으로 돌아오던 김지훈이 차창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일반 외과 의사로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명예를 다 얻은 허경발 교수는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최근 잇따라 어려운 수술을 해내며 이름을 다시 알리고 있는 이준영 과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다. 그런 선생님께 스승님이 배우셨고, 이제 내가 스승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다면 언젠가는 내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이 가지 않을까?’
최고의 써전!
누구나 꿈꾸는 일이지만, 이내 현실에 밀려 잊는 꿈이었다. 하지만 손에서 메스를 놓은 그날까지 꿈을 잊지 않고 노력한다면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스승님께서 날 그 자리에 부르신 이유는 허경발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 주기 위해서였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의사. 배움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죄는 사람이 짓는다. 이 말씀을 잊지 말자.’
버스에서 내려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자 모든 것이 더욱 확실해졌다. 김지훈에게 이준영 과장은 영원한 스승이었다. 스승이 내려 준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말과 태도가 진실이든 아니든,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일반 외과 전공의로서 금경태 과장이 가진 지식을 온전히 배우고, 옳지 못한 일을 본다면 반면교사로 삼으면 될 뿐이었다. 공연한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김지훈이 주먹을 불끈 쥐며 당당하게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오늘따라 흐린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사방을 밝히는 거리의 화려한 불빛 때문인지 두 개의 별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제 스스로 서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걱정하지 마세요. 절 아껴 주시는 분들이 정말 많고, 저도 강하게 살 겁니다. 올바르지 못한 일에는 허리를 구부리지도 않겠습니다.’
어떻게 대처하고, 행동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을 하자 마음이 후련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일식집으로 향하던 김지훈의 입가가 자꾸 찢어지기 시작했다.
허경발 교수의 제자인 이준영 과장이 바로 자신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열심히 하라는 격려와 함께 인정도 받았다. 앞으로 하기 나름이겠지만, 이는 곧 최고의 일반 외과 의사인 허경발 교수의 제자 중 한 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우와! 그럼 스승님과 큰 스승님, 이렇게 되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김지훈이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친놈처럼 혼자 히죽 웃다가, 두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기를 반복했다.
문득 이준영 과장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