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66화 (266/1,329)

제8화 스승이란 Ⅰ (2)

일식집에 들어선 김지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홀에 있는 테이블 수보다 방이 더 많을 것 같았다. 김지훈이 쉽게 출입할 수 있는 식당이 아니었다.

‘되게 비싼 집 같은데 저녁을 사 주신다는 말씀은 아니었을 테고, 도대체 왜 여기로 부르셨을까?’

종업원에게 물어 예약된 방으로 향했다. 번호를 보며 방을 찾던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는 얼굴이 보였다.

“야, 혁원아.”

“어? 김지훈 선생님.”

본과 4학년인 이혁원이었다. 큰 키에 성격 좋고, 호감이 가는 인상까지 가져 선배들에게 제법 귀여움을 받는 후배였다. 평소 항상 밝은 웃음을 짓는 후배였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 여기 웬일이야?”

“만날 사람이 있어서 어머니하고 함께 왔습니다.”

“어머니? 인사드려야 하는데, 나도 만날 분이 계셔서 다음에 하자. 시간이 빠듯하거든. 미안하다. 맛있게 먹고 가.”

“예, 선생님.”

이혁원에게 손을 흔든 김지훈이 곧 예약된 방을 찾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에게 인사를 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신사와 동석을 하고 있었다.

“왔구나. 인사부터 드려. 스승님, 제가 말씀드렸던 김지훈입니다.”

“아! 그래. 김지훈 선생, 앉아요.”

‘지금 스승님이라고 하셨나?’

의아한 눈으로 노신사를 보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엉거주춤 선 채 감히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

허경발 명예 교수!

학교 다닐 때 특강 형식으로 강의를 할 때 딱 한 번 보았던 분이었다. 일반 외과 의사라면 누구나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대가 중의 대가였다.

일반 외과의 초석을 닦고 수많은 후진을 양성한 교육자이자, 전 세계 외과 의사들이 읽어야 하는 외과 교과서(sabiston)에 한국 의사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의사였다.

Doctor Hur′s operative cholangiography!

(의사 허경발의 수술 중 담도 촬영술)

최고의 실력만이 허경발이라는 이름을 알린 것이 아니었다.

평생 동안 한길만 달려온 한 인간으로서의 인품과 환자를 대하는 자세 앞에서는 누구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분이었다. 젊은 시절 대단히 무서웠다는 말이 있었지만 항간의 소문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지금은 현직에서 은퇴를 한 지 오래였고, 진료도 하지 않았지만 대학 병원의 명예 교수로 이름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외과에서는 여전히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원로 중의 원로였다.

거의 얼음처럼 굳은 김지훈이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김지훈입니다, 선생님.”

“반가워요, 김지훈 선생. 어서 앉아요.”

부드러운 말투와 감당할 수 없는 존칭에 더욱 당황한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김지훈, 앉아.”

이준영 과장이 메인 요리를 시켰다. 탁자 위에 놓인 빈 술병 하나와 접시를 본 김지훈이 슬며시 시계를 보았다. 단 1초도 늦지 않았다. 미리 식사를 한 것도 아닌데 술잔을 기울였다니, 다소 의아한 일이었다.

곧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스승님, 드시죠. 김지훈, 먹자.”

회부터 곁들인 요리까지 절로 군침이 돌았다. 평소대로라면 코를 박고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허경발이라는 최고의 일반 외과 의사와 스승인 이준영 과장이 있는 자리였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회 한 점을 먹고는 허경발 교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와! 내가 지금 허경발 선생님 앞에서 밥을 먹고 있는 거야? 이준영 과장님의 스승님이 허경발 선생님이라니, 정말 놀랄 일이다. 가만! 따지고 보면 스승님의 스승님도 내 스승님 아닌가? 우와! 가슴이 떨리네.’

회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 신경이 허경발 교수와 이준영 과장의 대화에 쏠렸다. 특별한 말이 오고 가지 않았지만, 김지훈으로서는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다.

언젠가 교과서에 실린 이름을 보며, 나도 저런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긴장한 채 자세를 풀지 못하는 김지훈을 본 허경발 교수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김지훈 선생, 한 잔 받아요.”

“예, 선생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릎을 꿇은 김지훈이 잔을 받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에 호흡까지 가다듬고 잔을 비웠다.

허경발 교수가 한 잔 더 따라 주며 그윽한 눈빛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까마득한 후배 의사인 전공의가 함께할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제자인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두고 스스로 자신의 제자라고 했다. 이 자리에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아끼고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이준영 과장의 스승인 자신 또한 김지훈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경발 교수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이준영 과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승님, 김지훈에게 좋은 말씀 한마디만 해 주십시오.”

“그럴까? 김지훈 선생.”

“예, 선생님.”

김지훈의 목소리에 기가 팍 실려 있었다.

허경발 교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 송재덕 과장과 이혁민 교수와 술을 함께했다. 자연스럽게 이준영 과장이 거론됐고, 덩달아 그때 역시 김지훈이 언급됐다.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보는 법이었다. 어떻게 일하는지, 심성은 또 어떤지 말만 들었지만 훌륭한 의사가 될 재목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오랜 경험과 연륜은 다름 사람의 말만으로도 옥석을 구분케 했다. 송재덕 과장이나 이혁민 교수가 겉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을 내릴 사람들도 아니었다.

거기까지 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 술에 취한 송재덕 과장이 잔뜩 흥분한 채 금경태 과장에 대해 하는 소리를 들었다. 단편적인 말들이었지만 금경태 과장에 관한 말들은 충격적이었다.

당장이라도 찾아가 진위를 밝히고 따끔하게 혼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명망 높은 외과 의사이자 스승이라고 해도 이미 물러난 세대였다. 제자들 간의 일은 이제는 의사 사회에서 가장 중추적인 세대가 된 제자들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다만 김지훈이라는 젊은 후배 의사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 역시 제자들의 몫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데리고 나온 것이다.

속속들이 사정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준영 과장과 금경태 과장 사이에 껴서 무척 힘들 것이 뻔했다. 비록 허경발 교수의 나름의 추측이었지만 김지훈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허경발 교수가 나직한 헛기침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김지훈 선생, 평생 동안 어떤 의사가 될지 고민해도 찾지 못하는 게 우리 의사들입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의사가 되세요.”

“예, 선생님.”

“그리고 옛말에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말이 있어요. 배움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걸 명심하세요. 죄는 지식이 아니라 사람이 짓는 법입니다.”

김지훈이 무릎을 꿇은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일반 외과 의사로서 정점에 오른 분의 말씀이었다. 곱씹고 또 씹어, 가슴속에 확실히 새겨 두어야 할 말이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의사. 배움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후우! 명심하자.’

묵묵히 듣고 있던 이준영 과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의사라면 누구나 두고두고 곱씹을 말이었다. 그런데 마치 김지훈이 처한 상황을 환히 아는 것처럼 지금 김지훈에게는 꼭 맞는 말이기도 했다.

“스승님, 혹시 이 교수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으셨습니까?”

“허허! 이 교수가 자네보다는 훨씬 자주 찾아와.”

웃음을 터트린 허경발 교수가 회 한 점을 집어 김지훈 앞에 놓았다. 김지훈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허둥댔다.

“김지훈 선생, 한참 힘들게 일할 땐데 많이 먹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직한 대화가 이어졌다. 사소한 말들조차 김지훈에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었다. 귀를 활짝 열고 오가는 말을 듣던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스승.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반듯한 자세로 스승의 말을 경청하는 제자.

막연하게 바라고 원했던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보고 듣고 자리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스승이란 어떤 존재일까?

최고의 명예를 얻은 허경발 명예 교수는 조금도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준영 과장 역시 겸손한 태도로 스승의 말을 경청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자에 대한 사랑과 염려, 그리고 스승에 대한 존경만이 가슴에 와 닿았다.

‘스승님!’

이준영 과장이 자신의 스승인 허경발 명예 교수와 만나는 자리에 부른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허경발 명예 교수가 자신의 스승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것도 아니었고, 오로지 자신만을 따르라는 의미도 아니었다.

스승과 제자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와 다름이 없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스승은 기꺼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 주고, 그 가르침을 가슴으로 배우고 따라야 하는 사람이 바로 제자였다.

‘정말 많은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

김지훈이 먹먹한 가슴으로 이준영 과장의 마음을 느꼈다.

접시 위에 놓인 회가 사라질 즈음, 허경발 교수가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시곗바늘이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준영아, 이제 일어나야겠어.”

“스승님, 조금만 더 있다 가십시오.”

“아니야. 미리 잡힌 약속이 있어. 그럼 일어날까?”

허경발 교수를 따라 모두 일어났다. 천천히 밖으로 나가던 허경발 교수가 문 위에 달린 번호를 보며 어딘가를 찾았다. 그리고 조용히 멈춰 섰다.

“김지훈 선생, 미안하지만 차를 안 가지고 와서 그런데 택시 좀 잡아 주겠습니까?”

“예, 선생님.”

일흔이 넘는 분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김지훈이 부리나케 일식집에서 나와 손을 들었다. 토요일 밤이라 그런지 좀처럼 빈 차가 보이지 않았다.

김지훈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허경발 교수가 이준영 과장을 보며 멈춰 선 곳 앞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드르륵!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그 순간 이준영 과장이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그간의 죄가 너무 무거워 차마 찾지 못했던 가족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반가움과 고통, 그리고 원망이 섞여 있었다.

“준영아, 내가 잘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날 봐서 서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구나. 마음속에 박힌 못을 이제는 뺄 때가 된 것 같다. 그럼 나 먼저 간다.”

“스승님.”

“나올 것 없어. 그리고 김지훈 선생에게 네 가족을 보이기는 이를 것 같구나.”

묵묵히 서서 아무 말도 못하는 이준영 과장과 가족들을 본 허경발 교수가 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택시가 잡혀 뒷문을 열고 허경발 교수가 타기를 기다리던 김지훈이 난데없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김지훈 선생, 정말 미안한데 집에 갈 때까지 부탁 좀 할 수 있을까요. 오래간만에 술을 마셨더니 취하는군요.”

누구 말인데 감히 토를 달까?

김지훈이 숨도 쉬지 않고 대답을 했다.

“예, 선생님. 이준영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나오겠습니다.”

허경발 교수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김지훈이 일식집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식사를 했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 말도 없이 갈 이준영 과장이 아니었다.

‘화장실에 계신가?’

화장실에도 없었다. 허경발 교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급해진 김지훈이 급히 걸음을 옮기면서도 이준영 과장을 찾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아주 살짝 열린 방문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영 과장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 중년의 여인과 이혁원이 앉아 있었다.

‘어라? 혁원이네. 그럼 옆에 있는 분이 어머니라는 말인데, 스승님과는 무슨 관계지? 가만! 혹시 사모님?’

짐작이 맞는다면 깜짝 놀라고도 남을 일이었다. 당장이라도 인사를 해야 할 자리였다.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하게 무거워 보였고, 허경발 교수를 기다리게 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 사정을 설명하면 괜찮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밖으로 나오던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혁원이가 스승님 아들?’

놀랄 노 자였다. 허경발 교수만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확인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꾸물거릴 틈이 없었다. 이준영 과장과 이혁원이라는 이름이 뒤통수에 단단히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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