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스승이란 Ⅰ (1)
의국에 올라온 김지훈이 고민에 잠겼다.
금경태 과장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확실하게 알았다. 말을 따랐을 때 어떤 보상이 있을지 모르지만, 추호도 금경태 과장의 라인에 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금경태 과장의 수술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전공의 입장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함부로 상의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단 2명만은 예외였다.
신중하게 생각한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을 찾았다. 이준영 과장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수술 환자가 아니면 당직실에는 절대 들어오지 않는 김지훈이었다. 자신의 말도 있었지만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김지훈의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최근에 과장님 수술을 몇 번 들어갔었습니다.”
“알고 있어.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워. 수술은 정말 잘하는 의사야.”
‘사이가 정말 안 좋다는 걸 알고 있는데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준영 과장의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진 김지훈이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금경태 과장이 자신에게 한 말을 모두 설명했다. 이준영 과장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금경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이제 2년차에게 줄을 서라는 말을 하다니 제정신이야? 배울 시간도 부족한 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후우! 후배들 줄 세우는 버릇을 여전히 못 버렸구나.’
이준영 과장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동안 김지훈을 대하는 태도가 갑자기 달라진 금경태 과장을 보며 불안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 무엇인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준영 과장이 답답한 숨을 내쉬며 김지훈을 보았다. 장례식장 문제까지 알고 있는 이상, 금경태 과장의 말에 혹할 김지훈이 아니었다. 어떻게 행동하고,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말이 분명했다. 이를 빤히 알고 있었지만 이준영 과장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김지훈, 어떤 결정을 하든 스스로 결정해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정확한 답이 나오는 법이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할 나이가 아니야.’
한참 만에야 침묵이 깨졌다.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시간 비워 놔.”
엉뚱한 말에 김지훈이 눈만 껌뻑거렸다.
“예? 토요일은 쉬는 날이신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있으니까 다른 약속 잡지 마.”
“혹시 무슨 일이신지……. 선생님, 그것보다도 제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지그시 김지훈을 보며 말했다.
“고민해. 그건 네 몫이야.”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준영 과장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목소리를 들어서는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안색이 몹시도 좋지 못해, 문득 도리어 고민거리를 안겨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몫이라는 말씀은 맞는데, 그래도 조언이라도 해 주시지. 에이! 내 문제 말고도 고민할 일이 많으실 텐데 괜히 말씀드렸나?’
당직실을 나온 김지훈이 병동으로 올라가다 말고 부랴부랴 공중전화를 찾았다. 주말 오프를 앞두고 당연히 고경아와 약속을 했다. 일단 토요일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스승님의 오더라는 말에 고경아가 한숨만 쉬었다. 김지훈만이 존경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고경아도 이준영 과장의 말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 가며 마음으로 귀여워해 주는 교수는 이준영 과장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아이! 왜 그러신데요?)
“나도 모르겠어요. 일요일에 만나요.”
(알았어요. 일요일에 언니하고 형부 만나기로 한 거 잊지 마세요.)
간만에 정훈철과 만나기로 했다. 그 덕에 단둘만의 시간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
‘후우! 요새 왜 이렇게 일이 꼬이냐.’
김지훈에게 금경태 과장의 뜬금없는 호의는 분명한 부담이었다. 손일석은 물론 신현수도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그간의 사정을 아는 의국원들은 모두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말을 꺼낼 일도 아니었다.
“과장님이 갑자기 왜 저러시지? 그동안 김지훈이 찍히지 않았었나?”
예전의 모습이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느 쪽인지는 모르지만 김지훈이 찍혔다는, 혹은 찍혔었다는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금요일 밤, 잠시 한가한 시간을 맞은 김지훈이 논문을 앞에 펼쳐 놓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몰랐다.
‘스승님, 이혁민 선생님, 금경태 과장.’
어느 순간부터 알게 모르게 금경태 과장에 대한 존칭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 정도로 실망을 했고,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의 일이 이상하게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가끔은 정말 자신에 대한 시선이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금경태 과장의 말에 줄을 서라는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곤 했다.
막연하고 혼란스러운 상념들이 끊이지 않았다.
고민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할수록 점점 고민이 깊어졌다. 고민을 하는 것인지, 신경이 쓰이는 것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금경태 과장의 돌연한 변화가 김지훈을 크게 흔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래저래 혼란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토요일 오후가 다가왔다.
‘어후! 죽겠다. 뭘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금경태 과장을 믿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머릿속이 복잡하냐. 스승님을 볼 낯이 없네.’
일과를 끝낸 김지훈이 오래간만에 목욕탕으로 달려갔다. 개운하게 목욕을 하자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이 말한 약속 장소를 찾았다. 근사한 일식집이었다.
김지훈이 도착하기 한 시간 전, 이미 약속 장소에 도착한 이준영 과장이 다소 긴장된 눈빛으로 누군가를 기다렸다.
잠시 후, 한 명의 노신사가 들어섰다. 이준영 과장이 벌떡 일어났다.
“스승님!”
그렇게 무뚝뚝하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이준영 과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노신사의 눈가도 흔들렸다. 한동안 얼굴을 마주한 채 미소만 짓고 있던 노신사가 이준영 과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앉자, 준영아.”
“제 절부터 받으십시오, 스승님.”
이준영 과장이 큰절을 했다.
“이제야 인사를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스승님.”
“아니야. 죽기 전에 날 찾아와서 내가 고맙구나.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아닙니다. 공연히 심려만 끼쳤습니다.”
“별말을 다 하는구나.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함께 트레이닝을 한 송재덕 과장과 이혁민 교수도 모두 제자들이었다. 음성의 일부터 최근의 일까지 이미 모두 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승은 직접 듣고 싶어 했다.
이준영 과장이 담담히 지난 세월을 말했다.
묵묵히 듣기만 했지만 노신사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실렸다. 별다른 말은 안 했지만 때론 안타까워하고, 때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10년, 아니 이제 11년이나 지났다.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고맙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이준영 과장이 유난히 김지훈이라는 이름을 힘주어 말했다. 젊은 시절부터 함께했던 이들보다 더 마음에 두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준영 과장의 스승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김지훈 선생을 마음에 두고 있구나.”
“알고 계셨습니까?”
“이 교수와 송 과장이 얘기를 많이 하더구나.”
이준영 과장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훌륭하게 키워 보고 싶습니다.”
“준영아, 넌 잘해 낼 수 있을 게다. 송 과장과 이 교수도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은데, 나도 응원을 해 주마.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제자를 훌륭하게 키우는 것만큼 기쁘고 보람된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이준영 과장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검기만 했던 스승의 머리에 하얗게 눈이 내린 지 오래였다. 꼿꼿했던 허리는 구부정해졌고, 찻잔을 잡는 손은 앙상했다.
그렇게 늙어 가는 스승의 마음을 까맣게 태웠다.
문득 스승에게 배웠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쳤다.
송재덕 과장과 이혁민 교수, 그리고 신기동 교수와 금경태 과장까지 스승은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지만, 스승은 그중에서도 유난히 이준영 과장을 총애했다.
아무리 어린 후배 의사들에게도 함부로 말을 놓지 않는 스승이었다. 제자들이라 할 수 있는 이들에게도 꼬박꼬박 존대를 하며, 선생이라는 호칭을 반드시 붙였다.
하지만 이준영 과장에게만은 이름을 불렀다. 물론 사적인 자리에 국한된 일이었지만, 사람 좋은 송재덕 과장에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단 한 번도 남들 앞에서 내색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준영 과장은 스승의 마음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불현듯 가슴이 아려 오고, 눈가가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이 못난 제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준영 과장을 본 스승이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들었다.
“준영아, 술 한 잔 다오.”
“예, 스승님.”
물끄러미 술잔을 보던 스승이 잔을 비웠다.
“오늘은 술이 달구나. 한 잔 받아.”
이준영 과장이 무릎을 꿇고 잔을 받았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술을 못할 법도 했지만 스승은 이준영 과장의 잔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윽한 술 향기 속에 스승과 제자의 대화가 이어졌다.
특별할 것도 없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이준영 과장은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평생을 의사로 살아온 스승과 의사로 살아가야 할 제자의 자리였다. 자연스럽게 병원 생활에 대한 말들이 오고 갔다.
“금 과장하고는 어때?”
이준영 과장이 잠시 고민을 했다.
스승에게 인사를 드리려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김지훈을 꼭 보여 주고 싶었다. 금경태 과장과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김지훈에게 큰 도움을 줄 스승이었다. 평생을 의업에 몸을 바친 스승의 말속에 담긴 무게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금경태 과장과의 관계를 정확히 안다면 자신이 하기 힘든 조언을 해 줄 스승이었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이준영 과장과 금경태 과장이 어떤 사이인지 잘 알고 있는 스승이었다. 의업보다 돈과 명예에 집착하는 제자를 보는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이제 의사의 길에 들어선 김지훈을 어떻게 대하는지까지 알게 된다면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승님께는 나도 금경태도 모두 제자다. 더 이상 심려를 끼쳐 드릴 수는 없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이구나. 힘든 일이 있더라도 네가 참고 함께했으면 좋겠다.”
“예, 스승님.”
무언가 알고 있는 것처럼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스승이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누구보다도 아끼는 제자였기에 이제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기를 바랐다. 두 눈 속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준영아, 이제 마음의 안정을 찾았으면 원이 엄마를 봐도 되지 않을까?”
이준영 과장이 흠칫 놀랐다.
“원이 엄마요?”
“그래. 아직도 늦지 않았어. 지금 네 모습을 보면 누구보다도 기뻐할 거야.”
가족!
그 어떤 사람보다 그리운 사람들이다. 하지만 음성에 파묻혀 세상에서 도망치려 했을 때 너무도 모질게 했다. 눈물로 호소하는 아내와 자식을 매몰차게 외면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지훈을 만난 이후 충격에서 벗어나며, 후회와 죄책감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야 했다. 그래서 더욱 일에 집착했는지도 몰랐다.
“스승님,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아내와 원이를 볼 면목도 없고요.”
“준영아,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내겐 원이 엄마도 내 자식과 다름이 없어. 원망도 들을 테고 너를 외면할지 모르지만, 반드시 다시 만나 살아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두려움에 아내와 자식을 외면한다면 평생 후회 속에 살게 될 거야.”
이준영 과장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서울에 올라온 이후 일에 집중할수록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하지만 무슨 낯으로 가족을 본단 말인가?
스승의 마음을 알기에 대답은 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래. 잘 생각했다.”
고개를 끄덕인 스승이 술 한 잔을 따라 주었다. 가벼운 전채 요리만으로 술 한 병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