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유혹 (2)
지금까지 평생 동안 이준영 과장을 이긴 적이 없었다. 음성에 가 있던 10년이 절대적 우위를 가져왔을 거란 생각도 몇 번의 수술만으로 무참히 깨졌다. 그런데 이제 이준영 과장이 키운 놈이 신현수를 앞서고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이준영 네놈은 정말 평생 내 앞을 막는구나. 신현수보다 뛰어난 놈이 있어서는 절대 안 돼.’
금경태 과장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그때 김지훈이 마지막 봉합까지 깔끔하게 마쳤다. 실을 자르며 거칠어지는 숨을 고르던 금경태 과장이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르며 김지훈을 보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2년차 중 가장 뛰어난 놈이 분명했다. 화풀이를 한다고 음성에 보낸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철저하게 밟는 것이 최선일까? 김지훈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최고의 제자를 키워 낸다면 스승의 이름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마련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이준영에게 또 한 번 질 수도 있었다.
금경태 과장의 머릿속에서 이준영 과장과 김지훈, 그리고 신현수가 어지럽게 맴돌았다.
‘김지훈이 이대로 커 간다면 이름이 알려질 가능성이 꽤 높아. 신현수보다 더 뛰어나게 크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준영과 이혁민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막을 방법이 있을까? 확실하게 막을 수 없다면 가장 득이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해. 그렇다면?’
눈을 번쩍인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좁혔다.
‘이준영이 제일 아끼는 놈이 날 따른다면 그놈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까? 게다가 이놈을 잘 이용하면 신현수까지 확실하게 내 손안에 잡을 수 있겠어. 두 놈을 모두 내 밑에 둔다면 이보다 좋은 투자는 없겠지.’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완벽한 한 수였다. 금경태 과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수술실을 나갔다.
거의 말 한마디 듣지 못한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환자를 회복실로 옮겼다. 오더를 내고 있는 중에 금경태 과장이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오더 다 냈으면 지금 바로 외래로 내려와.”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에 없이 목소리가 부드러웠고, 웃음기까지 보인 것 같았다.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다.
김지훈과 금경태 과장이 마주 앉았다. 일반 외과에 지원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말없이 김지훈을 보던 금경태 과장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역시 이게 가장 유리한 방법이야.’
“김지훈, 수술을 꽤 잘하네.”
“감사합니다, 과장님.”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 이유 없이 도끼눈을 떴던 금경태 과장이었다. 그런데 수술을 주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칭찬까지 하고 있었다. 김지훈이 복잡한 마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래도 겉으로는 웃어야 할 것이다. 금경태 과장의 본심을 안다고 해서 척을 진다면 유리할 것이 없었다. 지금은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접고 냉철해야 할 때였다.
“너 난킴(예비역)이지?”
“예. 육 개월 방위 갔다 왔습니다, 과장님.”
“그렇구나. 그럼 전문의 따고 나면 바로 취직을 하든, 학교에 남든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할 상황이네.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 바라는 거라도 말이야.”
작년 입국식 날 분명 개업을 운운했다. 자신이 한 말을 잊은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모른 척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점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제길! 고민할 일이 아니야. 어차피 찍혔다면 과장 자리에 있는 한 내가 병원에 남는 문제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을 텐데 망설일 일이 뭐가 있어. 내 꿈이 무엇인지 알아도 상관이 없잖아.’
김지훈이 살짝 어깨를 흔들었다.
“병원에 남고 싶습니다.”
“그래? 그게 참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지. 네가 수술을 하는 걸 보니까 어렵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세상이 반드시 실력으로만 승부가 나는 곳은 아니야. 널 끌어 주고, 밀어줄 사람이 필요해. 더구나 신현수가 있는 마당이라 누가 후원해 주든 쉽진 않아.”
“알고 있습니다.”
금경태 과장이 매서운 눈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담담한 목소리가 다소 의외였지만 성격 탓일지도 몰랐다. 김지훈은 분명 긴장과 흥분을 느낄 것이라 여겼다. 전공의의 앞날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과장이 후원이라는 말을 했는데 심적 동요가 없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놈의 욕심이 얼마나 클까? 실력은 뛰어나지만 고아에 신현수라는 벽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절박하겠지? 그래야 일이 수월해지는데. 가만! 이놈처럼 고지식하게 일을 하는 놈도 없잖아.’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수 있었다. 일만 파고드는 사람일수록 세상사에는 무지하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과장과 전공의의 관계였다. 약간의 호의가 담긴 달짝지근한 제안을 던지면 김지훈이 자신을 따르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정말 남고 싶어? 그렇다면 다른 건 다 떠나서 일단 네 열정과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 해. 나중에 돈 벌고 싶다고 나간다고 하면 널 믿었던 사람이 어떻게 되겠어?”
김지훈이 눈빛을 굳혔다. 그동안 알고 있던 금경태 과장의 모습과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어쩌면 일반 외과 의사로서의 자부심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최고의 써전이 되고 싶습니다.”
‘최고의 써전? 그게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웃기는 놈이군. 하지만 지금은 그만큼 생각이 확고하다는 말이겠지. 욕심도 클 테니 아주 반가운 말이야.’
“최고의 써전이라. 일반 외과 의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일이지. 하지만 말이야. 그러려면 길이 있어야지. 길은 어디에든 있기 마련이지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져. 눈앞에 바로 나타날 수도 있고, 영영 찾지 못할 수도 있어. 교수들 중에서도 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헛된 희망만 주는 사람이 있지. 잘 구별해야 할 거야.”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세상 경험이 많지 않으니까 어려운 말일 수도 있지만 잘 생각해 봐. 그리고 다음 텀에 내 파트를 돌지?”
“예, 과장님.”
“그러고 보니 이제 한 달도 안 남았군. 다른 건 몰라도 내 파트를 돈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생각을 해야 할 거야. 어쩌면 네가 찾는 길이 보일 수도 있어. 단, 길은 하나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놈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 어느 교수든 여러 명을 마음에 두진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김지훈이 머뭇거렸다. 직접적인 말은 안 했지만 자신을 따르면 밀어준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나를 보는 시선이 바뀐 걸까? 변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왜 이러지?’
금경태 과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김지훈은 분명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2년차인 네게는 어려운 말일 수도 있겠지. 어쨌든 케이스가 되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수술을 줄 생각이다. 물론 네가 하기 나름이지만 지금은 기대가 커.”
‘수술을 더 준다고?’
수술이라는 말에 김지훈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뛰어나면 그만한 보상이 따르는 법이야. 흐음! 말이 길어졌다. 하여튼 오늘 수술 정말 잘했다. 올라가 봐. 아! 그리고 하나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어. 수술에만 메이저와 마이너가 있는 게 아니야. 세상도 똑같아.”
외래에서 나온 김지훈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에 대한 금경태 과장의 마음이 변할 것일까?
‘길은 하나라고 했지. 일석이 말대로 줄 세우기일까? 이제 고작 2년차인 내게? 이유가 뭘까? 정말 줄을 잘 선다면 병원에 남겨 준다는 말을 한 걸까?’
금경태 과장의 말은 명백했지만 온갖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 눈빛마저 백팔십도 변했기 때문이다.
정말 마음이 변했다면 이보다 반가운 일은 없었다. 꿈을 이룰 수 있는 확실한 길을 찾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금경태 과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만은 없었다. 길은 하나라는 말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내게 스승님은 단 한 분뿐이다.’
이준영 과장과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교차했다.
금경태 과장이 정말 변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준영 과장과 회진을 돌 때면 여전히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다른 때는 확연히 달랐다. 심지어 밤새 수술을 들어가 피곤해 보이면 신현수 앞에서 어깨를 두드리기까지 했다.
“신현수, 김지훈. 둘 다 아주 보기 좋구나. 지금처럼만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더구나 자신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듯 일주일도 안 돼 탈장에 이어, 담석으로 담낭을 절제해야 할 환자의 수술에서 퍼스트를 세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술을 하며 자세하게 설명까지 했다. 이런 경우는 신현수가 유일하다고 했는데 정말 뜻밖이었다.
“담낭 절제는 생각보다 어려울 것이 없어. 간에 붙어 있는 장기니까 제거할 때 간에 손상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고, 담낭에서 나오는 담관을 최대한 제거하는 것만 명심해.”
금경태 과장의 손은 기계적이라고 할 정도로 정확했다. 마치 교과서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래서 다들 수술을 가장 잘하는 세 명의 교수 중 한 명이라고 인정하는구나.’
사람은 사람이고, 실력은 다른 문제였다. 최대한 수술에 집중했다. 지금 보고 배워야 할 것은 담낭을 절제하는 방법과 과정이었다.
어느새 주요 과정이 끝나고 마무리에 들어갔다.
김지훈이 내심 감탄하는 기색을 보이자 금경태 과장이 이를 놓치지 않았다.
“수술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말이야, 응급 수술도 중요하지만 정규 수술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알아야 돼. 우리 과 수술에서 외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되겠어?”
맞는 말이었다. 전공의들이 하고 싶어 하는 수술은 거의 대부분 정규 수술이었다. 단적인 예로 대표적인 정규 수술인 암 수술은 거의 모든 술기와 지식을 총동원해야 했다. 그런 수술을 집도해 보는 것만큼 엄청난 경험도 없었다.
“김지훈, 어때. 정규 수술에 관심이 가?”
아니라면 거짓말이었다.
“예, 과장님.”
“당연한 일이지. 그렇지만 4년차가 되어도 못 받는 놈은 못 받아. 그게 다 신뢰의 문제야. 내가 신뢰할 수 있어야 수술도 줄 수 있으니까 말이야. 김지훈, 넌 믿을 수 있을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실력이야말로 신뢰의 첫 번째 요소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수술만 잘한다고 신뢰를 주진 않아. 손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도 있잖아. 인간적으로 통하는 게 있어야지.”
인간적으로 통해야 한다는 말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마무리가 진행되는 내내 김지훈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수술을 끝낸 금경태 과장이 다음 환자를 기다리는 동안 김지훈을 불러 나지막하게 말했다.
“넌 2년차로서는 상당히 훌륭해.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충분히 알았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수도 있겠어. 그리고 다음 환자는 복강경을 이용해 담낭을 절제한다는 거 알지? 이거 하나는 꼭 알아 둬. 앞으로 복강경은 물론이고, 새로운 기구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대세에 뒤처지게 될 거야.”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일반 외과의 수술 방법도 점점 변하고 있었다. 이삼 년 전 복강경이 도입되면서 예전처럼 복부를 크게 절개하지 않고도 담낭을 제거할 수 있었다. 젊고 도전적인 의사일수록 이런 신기술에 더욱 관심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김지훈도 예외는 아니었다.
‘후우! 복강경 수술은 정말 많이 봐야 하는데. 삼사 년차 선생님들 때문에 현수도 아직 못 들어가는 수술에 들어오라고 할 리가 없겠지?’
“알겠습니다, 과장님.”
김지훈의 눈에 아쉬움이 스쳤다. 금경태 과장이 이를 놓치지 않았다.
‘욕심이 나겠지. 하지만 누구도 복강경에 손을 대서는 안 돼. 복강경 수술을 시작한 사람이 얼마 안 되는 만큼, 이 방면에 대가가 된다면 이준영 따위는 우스워질 수도 있어. 김지훈, 넌 그냥 이런 수술을 가르쳐 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돼.’
사실 금경태 과장도 완벽하게 숙련된 술기는 아니었다. 비용이 비싼 데다 담낭 절제술에만 국한된 상황이었고, 그나마 적용할 수 있는 환자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케이스가 적으면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고 해도 자신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수술이었다.
“그래. 그건 그렇고 말이야. 아까 말한 것처럼 어떻게 보면 실력보다 신뢰 문제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돼. 어떤 관계든 간에 가장 좋은 방향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거야. 윈윈(win-win)이란 소리 들어 봤지?”
“예, 과장님.”
“바로 그거야. 누군가 끌어 주면 확실하게 따라야지. 다른 데 눈 돌리는 것만큼 안 좋은 모습도 없는 법이다. 이 정도 얘기하면 너도 충분히 내 말을 알아들었을 거야. 난 지금 신현수만큼 네게도 기대를 걸고 있어. 다음 주에 케이스 또 하나 잡아 보자. 올라가 봐.”
역시 복강경 수술을 제대로 볼 기회는 주지 않았다. 꾸벅 인사를 하는 김지훈의 눈가에 실망감이 스쳤다.
금경태 과장이 입가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