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유혹 (1)
손일석도 혈관 수술에 들어갈 때마다 하얗게 재만 남았다.
“넌 수술 배우고 싶다는 놈이 아직도 해부학에서 헤매? 힘들어? 그런 정신 상태로는 혈관 수술 근처에도 오지 마. 너 그러다 환자 잡는다.”
사실 오상익 교수 파트의 일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물론 1년차들에게 일을 미룬다면 한결 수월해지겠지만 그럴 손일석이 아니었다.
그동안 거의 혼이 나지 않았던 신현수 역시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혼이 났다. 이준영 과장은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로 신현수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깎아내렸다.
“너 아직도 1년차야?”
그저 이 한마디뿐이었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프까지 반납해도 일주일에 겨우 한두 번 이준영 과장의 수술을 들어갈 기회가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더 많은 기회를 잡아야 했지만 응급 수술을 일부러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한 일이었다. 게다가 금경태 과장이 전에 없이 많은 일을 시키고 있었다.
“이거 내일까지 정리해 와. 아직도 한참 더 보강하고 다듬어도 부족해. 그리고 그저께 정리하라고 한 건?”
“여기 있습니다.”
“이 논문들에서 말하는 핵심이 뭐야? 그걸 잘 잡아내서 우리 병원 케이스와 확실히 맞춰야 돼. 이 논문은 너뿐만이 아니라 제1저자인 내 명예도 걸려 있어. 확실하게 해. 아! 그리고 내일 오후 수술 들어와. 네가 할 만한 담낭 수술 환자니까 준비 철저히 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신현수였지만 엄청난 하중이었다. 하지만 신현수 역시 논문이 채택되기를 간절히 바랐기에 그만큼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논문만큼은 김지훈을 확실하게 눌러야 해. 단순히 잘 썼다는 소리로 만족할 수는 없어. 세계 학회? 보란 듯이 통과해서 내 능력을 보여야 해.’
가끔 이준영 과장의 수술에 들어간다고 한 이후 금경태 과장이 더욱 많은 일을 준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확신은 없었다. 그렇다고 금경태 과장의 태도가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세계 학회에 논문을 제출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수술을 주는 횟수 역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리어 예전에는 아뻬나 탈장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은 수술을 받았다. 그만큼 준비할 것이 많았지만, 누구보다도 빠르게 고난도의 수술을 하는 만큼 배우는 것 역시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논문과 금경태 과장이 주는 중압감과 압박 속에서도 신현수는 악착같이 이준영 과장의 수술을 들어가고자 했다.
김지훈이나 손일석 역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모습이 서로의 눈에 보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후우! 이 자식들, 정말 열심히 하네.’
2년차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
어느새 데이트하기 정말 좋은 5월이 왔다. 하지만 김지훈에게는 단순히 다음 달이 왔을 뿐이었다. 간신히 논문 초안을 작성했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논문을 써야 할 시간이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쓰고 있었지만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혹시 덜컥 채택되는 거 아냐? 제길! 차라리 복권이 되기를 바라지. 이렇게 썼는데 채택이 되면 누가 못 쓰겠어? 그래도 일단 최선은 다하고 보자.’
타고 배우고 정말 바쁜 나날이었다.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비록 마이너 수술이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수술을 받기 시작했다. 오프 때마다 꼬박꼬박 고경아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물론 한 손에는 항상 논문 자료가 들려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의 위안이자 활력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신현수 외에는 2년차 누구에게도 수술을 주지 않았던 금경태 과장이 손일석에게 아뻬를 준 것이다.
깜짝 놀라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금경태 과장에게 일말의 기대도 남지 않은 김지훈에겐 약간 거슬린다는 생각 이외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웬일이야. 하긴 난 찍혔고, 일석이는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럴 수도 있겠지.’
김지훈이 수술을 끝내고 온 손일석을 물끄러미 보았다.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금경태 과장은 수술에 관한 한 3대 고수 중의 한 명이었다. 아무리 아뻬라고 해도 분명 배운 것이 있을 것이다.
“어땠어?”
손일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그랬어. 나름 기대를 했는데 다른 선생님들하고 수술했을 때랑 크게 다르지 않더라. 지훈아, 같은 파트도 아닌데 수술을 왜 주셨을까?”
“그건 들어간 놈이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
“하기 그렇긴 하네. 이상해. 이무 이유 없이 수술을 줄 과장님이 아닌데. 분명 뭐가 있어. 고민을 해 볼 문제야. 에이! 할 일도 많은데 이건 또 언제 해결하냐.”
“신경 안 쓰면 되지, 인마.”
“그래도 과장님이 갑자기 수술을 줬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너도 막상 수술 받아 봐라.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네요. 하긴 과장님 성격상 너한테…….”
손일석이 말을 하다 말고 흠칫 놀라며 김지훈을 보았다. 하마터면 찍은 놈에게 수술을 줄 리가 없다는 말을 할 뻔했다. 다행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일석이 말대로 그럴 일이 없겠지. 내가 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두고 신경을 쓰고 있지?’
아무리 기대를 안 한다고 해도 막상 같은 경우를 당한다면 김지훈 역시 여간 신경이 쓰일 문제긴 했다.
손일석이 책을 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상하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김지훈이 금경태 과장에게 찍혔다는 소문이 틀린 말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유가 뭐가 됐든 너도 받을지 몰라. 다 같은 2년찬데 설마 나만 주시겠어?”
손일석의 마음은 알지만 설마라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금경태 과장이 오후 회진이 끝난 후 김지훈을 불렀다.
“김지훈, 너 탈장 해 봤어?”
여전히 표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정말 깜짝 놀랄 일이었다.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대답을 했다.
‘설마 내게도 수술을 주려는 걸까?’
“예. 두 번 해 봤습니다.”
“어디서?”
“음성하고 구미에서 한 번씩 받았습니다.”
“그래? 이 교수에게 미리 말해 놓을 테니까, 내일 아침 첫 수술에 들어와. 네 손 좀 보자.”
너무 놀란 나머지 김지훈이 미처 대답도 하지 못했다.
급히 손일석을 찾았다.
“일석아, 과장님이 수술을 왜 줬는지 짐작되는 이유라도 있어? 고민해 본다고 했잖아.”
“이제 하루 지났어, 인마. 그런데 왜?”
“내일 아침에 탈장 수술을 준단다. 이거 뭐냐?”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탈장 수술을 주신다고? 정말이야?”
“그럼 없는 말 지어내겠어?”
김지훈의 말에 손일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그럼 내 짐작이 맞을지도 모르겠네.”
“뭔데? 빨리 말해 봐.”
“어허! 서두르지 말고 진정해, 인마. 내가 누구냐? 손일석이잖아. 정보망을 풀로 가동했더니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이 있더라. 그 말들을 종합해서 유추해 볼 때 2년차들 중에서 나중에 병원에 남을 재목이 있는지 알고 싶다는, 뭐 그런 감을 받았어.”
“병원에 남을 사람?”
“우리가 전문의 될 때쯤하고, 나 군대 갔다 올 때쯤에 한두 자리가 난다는 것 같아. 그런데 웃기지 않냐? 우린 이제 2년찬데 뭘 보고 판단하신다는 거야? 그리고 한 자리면 현수로 땡 아냐? 그렇다고 벌써 줄 세우기를 하는 건 아닐 테고 말이야.”
“줄 세우기?”
손일석이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최철한 선생님과 유석재 선생님하고는 이혁민 선생님을 쏙 빼고 따로 회식도 했대. 원래 전부터 삼사 년차 중에 뛰어난 사람은 자기 라인을 만든다는 소문이 있었거든. 눈에만 들면 나중에 교수 자리라든지, 아니면 하다못해 다른 병원 과장 자리를 알아봐 준다는 소리도 있어.”
“자기 라인을 만든다고?”
“지훈아, 의사가 교수뿐이냐? 예를 들어 지금 당장 의사 협회장 선거가 있다고 생각을 해 봐. 우리도 회비 냈으니까 똑같은 한 표야. 따르는 의사가 많으면 그만큼 힘이 세지는 거지. 과장님이 득 안 되는 일을 할 리가 있냐?”
손일석도 금경태 과장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득이라는 소리에 장례식장 문제가 혀끝까지 나온 김지훈이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손일석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수술을 들어가 봐야 알 일이었다.
‘줄 세우기라고? 그 말이 맞는다고 하면 나한테 수술을 줄 리가 없잖아. 어차피 한 번 찍으면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것도 서울에서는 정말 받기 힘든 탈장 수술을 준다니, 정말 알 수가 없는 일이네.’
밤새 싱숭생숭했다.
다음 날 아침, 온갖 상상을 하며 수술실에 들어선 김지훈이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은 원래 수술 중에 거의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신현수가 어시스트를 설 때가 유일한 예외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듣던 대로 역시 금경태 과장은 수술을 앞두고 별다른 말이 없었다. 김지훈에게도 거의 시선을 주지 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 손안에 확실히 있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문제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뒤집어야 해.’
신현수가 이준영 과장의 수술에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는 것이 빤히 보였다. 엄청난 과제와 그동안 못해 본 수술을 주는 것도 소용이 없었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일이었지만, 금경태 과장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그 이유를 찾아야 했다. 신현수는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했고, 기필코 손안에 잡아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신현수의 수준을 볼 때 이준영의 수술을 봤다는 것만으로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분명 뭔가 더 있었다. 자신의 지난날과 신현수의 현재 모습을 생각하며 깊게 고민한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결코 지고 싶지 않은 강력한 라이벌!
자존심을 걸고 반드시 꺾고 싶은 라이벌!
그런 존재가 있다면 신현수의 성격상 용납을 못할 것이고, 앞서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2년차 중의 한 명이었고, 김지훈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동안 눈길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대부분은 알고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실력을 확인해야 했다.
고리는 손일석이었다.
‘짐작대로 손일석이 제법 뛰어나긴 하지만 확실히 아니야. 결국 김지훈이라는 말인데, 이놈이 정말 신현수를 긴장시킬 정도로 뛰어날까? 하긴 이준영과 이혁민이 꽤 아끼는 것 같긴 했어. 일단 손이 어떤지 확인해 보자. 그래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겠군. 제길! 이준영이 서울에 오는 것을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는데.’
환자가 들어오고 마취가 끝나고 나서야 눈길을 준 금경태 과장이 퍼스트 자리에 서며 말했다.
“시작해.”
“감사합니다, 과장님.”
수술이 시작됐다. 김지훈이 수없이 머릿속으로 반복한 수술 과정을 되새겼다. 누가 주었든, 어떤 의미가 있든 환자는 환자였다. 신중하게 메스를 받아 든 김지훈의 손이 움직였다.
피부를 가르고 근육 층을 열었다. 장이 삐져나오는 탈장 주머니를 찾아내 제거하고, 주변 근육을 단단히 보강했다.
이제 세 번째 수술이었지만 확실한 개념하에 정확하게 수술을 했다. 2년차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매끄러웠다.
금경태 과장의 눈가에 점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제 세 번째에 불과한데 어떻게 이 정도로 수술을 할 수 있지? 설마 나한테 잘 보이려고 거짓말을 한 거야?’
전화 몇 통이면 빤히 드러날 일을 두고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금경태 과장의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수술이 거의 끝나갔다.
김지훈이 수술하는 모습에 집중하던 금경태 과장이 갑자기 이를 악물었다. 수술용 모자와 마스크가 아니었다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것이다.
‘이준영? 왜 이 자식 손에서 이준영이 보이지? 그렇구나. 이준영과 이혁민이 이 자식을 아끼는 이유가 이거였어. 결국 신현수를 긴장시킨 이유 역시 이놈의 손이었어.’
금경태 과장의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자신이 있는 힘을 다해 키운 신현수보다 김지훈이 더 뛰어나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