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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262화 (262/1,329)

제6화 불타는 2년차들 Ⅱ (3)

불과 이삼 일 사이에 너무도 많은 것을 느꼈다. 그동안 스스로 노력한다고 여겼지만 절박할 정도의 치열함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분명 달라져야 했다.

‘내 목표는 최고의 혈관 전문 외과의가 되는 거다. 최소한 지훈이하고 현수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내 꿈을 이룰 수 있겠지? 아직 늦지 않았어. 가자.’

“파이팅!”

손일석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지르고는 의국을 나갔다. 남아 있던 1년차들이 의아한 표정만 지었다.

서도진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도훈아, 어째 형들이 다 이상해진 것 같지 않냐?”

“그러게. 가끔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해. 일에 미친 건지, 아니면 몸이 강철인지 모르겠다. 우리도 2년차 때 저렇게 살아야 되나?”

“야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2년차 되면 그냥 뻗어 버릴 거야.”

“나도.”

안호석과 천광호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서도진이 씨익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자 1년차들이 일제히 손바닥을 마주쳤다.

과연 1년차들은 어떤 2년차가 될까?

지금 이 시간까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일을 했다. 1년차들의 열정 또한 2년차들 못지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수요일 오후 수술이 시작되자마자 김지훈이 긴장된 표정으로 이민혁 교수 수술을 들어갔다. 유방 종물 수술만 내리 4개였다. 오전 내내 시간이 날 때마다 유방 수술에 대비했다. 하지만 김지훈의 수준과 이혁민 교수의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해부학 공부는 했지.”

“예, 했습니다.”

“그럼 그건 기본이니까 됐고, 미세 석회화 진단 방법에 대해 말해 봐라.”

“예. 먼저 유방 촬영에서 석회화를 확인하면 입체 유방 촬영을 통해 갈고리가 달린 철사(hooked wire)를 병변 내에 위치시킵니다.”

“그때 쓰는 바늘과 철사의 굵기는 어떻게 되나? 그리고 정확한 위치에 고리가 걸렸는지 어떻게 확인하지? 마지막으로 수술 시 갈고리를 중심으로 얼마나 절제해야 해?

이혁민 교수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정확한 답을 원하고 있었다. 문제는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김지훈이 온갖 인상이란 인상은 다 쓰면서 논문을 상기했다.

“십육 게이지 바늘을 이용하고, 철사 두께는…….”

떠듬떠듬 대답을 하는 김지훈을 슬쩍 쳐다본 이혁민 교수가 톡톡 손등을 쳤다.

“고민은 머리로 하고, 손은 움직여야지. 퍼스트 안 서나? 유방에 대한 공부를 하는 이유가 꼭 논문을 쓰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니 평생 유방 수술은 한 번도 안 할 것 같나. 우리 과를 왜 일반 외과라고 부르는지 이유는 알 거 아냐?”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일반 외과, 즉 General Surgery에서 일반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모든 외과의 기본이며, 그에 따른 광범위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일본식 제도를 따랐기 때문에 전공의 시작부터 외과가 갈라진다. 하지만 미국 같은 경우 정형, 성형, 흉부, 신경외과 등 외과 계열을 전공하려면 먼저 일반 외과를 해야 해당 분야의 수련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만큼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과라는 의미였다.

“효율을 중시하는 미국 애들이 공연히 그런 제도를 유지하지는 않겠지. 그런데 니는 유방 수술 하나 더 배워야 한다고 벅차하는 것 같네. 힘드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혁민 교수의 조용한 질책이 계속 이어졌다.

“유방 병변에 갈고리를 걸었다고 해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전에 병변 위치를 최대한 정확하게 예측해야 손상을 줄일 수 있다. 그러려면 이론에 밝아야지. 머릿속에 든 게 없으면 손이 겉돌기 마련이다. 근데 니 손은 그냥 나만 따라오네.”

여전히 목소리 하나 높이지 않았지만 김지훈의 안색은 심각하기만 했다. 관심이 있든 없든 일반 외과 영역의 수술이었다. 전공의라면 아주 전문적인 영역은 몰라도 수술에 앞서 최소한의 지식은 숙지하고 들어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마지막 수술까지 조용한 목소리만이 오고 갔다.

수술 방을 나온 김지훈의 머리가 푹 젖어 있었다. 논문을 앞세우고 있지만 이혁민 교수는 분명 보다 깊이 있는 이론을 요구하고 있었다. 새로운 과제였다.

‘스승님과 이혁민 선생님이 각기 다른 말씀을 하실 리가 없어. 결국 환자와 질환, 그리고 수술에 대한 말씀들이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는 말을 하지만 정말 다른 것일까? 내가 처음 접하는 수술이라고 해도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다면 최소한 당황하지는 않겠지.’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는 누구보다도 친밀한 관계였다. 수술을 두고 하는 말을 보면 얼핏 초점이 다른 것 같지만 외과 의사로서 서로 상반된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김지훈이 일반 외과가 얼마나 어려운 과인지 새삼 느꼈다. 하나를 알면 더 넘기 어려운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정말 시간은 없고, 배워야 할 것은 산더미였다.

그래도 데이트는 해야 했다.

항상 만나던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다. 종로 먹자골목에 가 오래간만에 생선 구이를 먹었다.

술 생각이 간절했지만 지금 알코올은 최대의 적이었다.

“경아 씨, 커피 마시러 갈까요?”

김지훈의 말에 고경아가 깜짝 놀라며 웃었다.

“술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자고요? 웬일이세요?”

“아! 그게 말이죠. 내가 지금 논문을 써야 하는데 시간이 정말 없네요. 국내 학회라면 어찌어찌 지나가겠는데, 세계 학회 제출 논문이거든요. 채택이 되든, 안 되든 최선은 다해야죠. 그래서…….”

“그래서요?”

“커피 마시면서 논문 자료 좀 읽으면 안 될까요? 이 주 안에, 아니 열흘 안에 초안을 써야 하거든요. 안 그러면 이혁민 선생님한테 맞아 죽을 것 같아요.”

고경아의 눈이 쫙 찢어졌다.

“아휴! 못 살아. 이준영 선생님부터 다들 왜 그러신데요. 혹시 지훈 씨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에휴! 그건 아니고, 어쨌든 조금만 봐줘요. 참! 그리고 나 내일도 오프예요.”

“내일도요? 그럼 응급실 당직은 누가 서요?”

“이제부터 현수가 목요일마다 당직을 설 거예요.”

“정말이죠? 그동안 너무 힘들어해서 마음이 아팠는데 정말 잘됐네요.”

반색을 하던 고경아가 바로 시무룩해졌다.

“그럼 뭐해요. 논문 준비해야 되잖아요.”

“그게 또 그러네.”

김지훈이 애써 미안한 마음을 감추며 고경아의 손을 잡았다.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김지훈이 카페 대신 먼저 서점을 찾았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점원에게 부탁해 요즘 가장 잘나가는 책 한 권을 사 들고 함께 조용한 카페에 들어섰다.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살핀 김지훈이 남들이 잘 안 보이는 구석 자리에 가 앉았다.

따뜻한 커피 두 잔이 고소한 향기를 풍겼다.

슬며시 고경아의 옆에 앉은 김지훈이 미리 준비한 논문 자료를 꺼냈다. 새침한 표정을 짓는 고경아를 보며 씨익 웃은 김지훈이 자연스럽게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고경아가 흠칫 놀랐다.

“가만히 있어요. 이래야 눈에 쏙쏙 들어오지. 경아 씨는 책 읽고, 난 논문 읽고. 하하하! 그 책 오늘 다 읽으면 내일은 새로운 책 한 권 더 읽는 게 어때요?”

김지훈이 고경아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논문 자료를 읽었다.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 소리와 함께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김지훈의 손에서 논문 자료가 툭 떨어졌다. 어느새 잠에 빠진 김지훈이 웅얼거리며 고경아의 어깨에 고개를 비볐다. 조용히 책을 읽던 고경아가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공중전화 위에 10원짜리 동전 2개를 놓고 울먹이던 남자였다. 그랑블루라는 멋진 영화 대신 아이들 영화인 슈퍼마리오를 보는 내내 코를 골던 남자였다. 휴가도 내팽개치고 배운다고 음성에 달려간 남자였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지 만날 때마다 술을 찾는 남자였다.

생각해 보면 정말 매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김지훈이라는 남자를 사랑하는 이유 따위는 없었다. 치열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자신의 어깨를 내어 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설랬다.

‘그래요. 힘들면 언제든 제 어깨에 기대서 쉬세요. 난 지훈 씨가 정말 좋아요. 사랑해요, 지훈 씨.’

정신없이 자고 있는 김지훈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감미로운 음악 사이로 진한 커피 향이 부드럽게 퍼졌다.

그 시간, 오프인 손일석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혈관 해부학과 수술 방법, 그리고 논문까지 공부해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씨펄! 채택이 될 리는 없겠지만 최대한 멋지게 쓰자. 씨펄! 분명히 타겠지만 신기동 선생님께 확실하게 보이자. 신기동 선생님, 저 혈관 외과 하고 싶습니다.”

밤이 늦도록 숙소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응급실 당직인 신현수 역시 시간이 날 때마다 논문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오늘 아침 금경태 과장이 작심을 한 듯 엄청난 양의 과제를 내주었다.

“네 논문이 채택되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일 오프지?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주는 자료들 모두 읽고 요약해.”

“과장님, 저 내일 응급실 커버해야 합니다.”

“신현수, 아직도 어떤 일이 더 중요한지 몰라? 수술을 배울 기회는 얼마든지 있지만, 전공의 때 세계 학회에 논문을 낼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야. 채택이 된다면 그만한 경력이 어디 있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 말대로 오프 때는 논문에만 집중해. 응급실은 어차피 김지훈 일이었잖아.”

신현수로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금경태 과장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준영 과장에게 배우고자 하는 것은 책에도 없는 내용이었다. 배울 기회가 또 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는 없다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수술을 배울 기회는 또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이준영 선생님에게 배우지 못하면 김지훈에게 뒤처질 게 뻔해. 난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어. 최고가 되려면 이 정도쯤은 웃으면서 헤쳐 나가야 돼.’

금경태 과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지만 이준영 과장에게 배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시도도 해 보지 않고, 김지훈만큼의 노력도 하지 않고 뒤처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일이었다.

응급실 환자를 보고 올라온 신현수가 찬물에 샤워를 하고는 책상 앞에 앉았다. 수북하게 쌓인 금경태 과장이 준 자료들을 보며 눈빛을 굳혔다.

방법은 오직 하나, 잠을 줄이는 것뿐이었다.

“으아아! 경아 씨.”

어디선가 11시가 넘도록 단잠을 잔 김지훈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2년차들의 치열한 생활이 이어졌다. 누구 한 명 그냥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

김지훈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주구장창 탔다.

무뚝뚝하면서도 위압적인 목소리의 이준영 과장.

“김지훈, 수술의 개념을 확실하게 잡아야 할 거 아냐?”

부드러운 목소리 속에 엄한 질책을 담는 이혁민 교수.

“김지훈, 논문 초안 잡고 있나? 확실히 하자. 니 이러다 아예 제출도 못하겠다. 그럼 되겠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냅다 비수를 꽂는 신기동 교수.

“김지훈, 넌 수술 들어온 게 몇 번인데 아직도 이 모양이야? 해부학만 알면 혈관 수술에 대해 다 안 거야? 굼벵이도 이것보다는 빠르겠다.”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그 말속에 담긴 마음을 알고 있기에 이겨 낼 수 있었다. 잘했다, 혹은 수고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뿌듯해졌다.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교수들이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확실하게 배우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수술에서 들은 이준영 과장의 말에는 날아갈 것 같았다.

“이제야 조금은 2년차답네.”

칭찬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박한 말이었지만 스승인 이준영 과장의 말이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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