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61화 (261/1,329)

제6화 불타는 2년차들 Ⅱ (2)

김지훈의 손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퍼스트를 설 때는 물론 수술을 할 때 역시 침착하고 자연스러웠다. 무리하거나 급한 기색은 없었고, 그렇게 느낄 여지조차 없었다.

등을 따라 전해지는 서늘한 느낌에 손일석이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김지훈은 같은 년차이자 친구였지만 수술에 관한 한 한참 앞에 서 있었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확신처럼 드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바로 전 수술까지만 해도 새카맣게 태우던 이준영 과장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만족했다는 의미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손일석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김지훈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김지훈이 조금은 앞서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그 이상이었다.

‘씨펄! 난 그동안 뭐 한 거야? 지훈이가 쓰러질 정도로 일을 하고 있을 때 난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게 틀림없어. 지금처럼 배우고 일해서는 절대 지훈이를 이길 수 없어. 안 돼.’

손일석이 이를 악물었다. 신현수보다 더 이기기 힘든 라이벌이 바로 가장 친한 친구인 김지훈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손일석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지자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일석아, 너 갑자기 얼굴이 왜 그래?”

문득 수술 중 이준영 과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도대체 김지훈이 얼마나 수술을 만족스럽게 한 것일까?

“이준영 선생님이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신 거야? 그 정도로 완벽하게 했다는 소리야?”

“완벽은 무슨! 원래 수술 주시면 단 한마디도 안 하시는 선생님이셔. 너도 나중에 기회 돼서 수술 받아 보면 맨 처음에는 의아할 거다. 아니면 지금처럼 착각하든지.”

김지훈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지만 손일석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김지훈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남은 일은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주말에 연이어 벌어진 수술이 손일석의 마음과 자세를 확 바꿔 놓았다.

“김지훈, 너 각오해. 죽었어. 그리고 고맙다, 인마.”

웬 뚱딴지같은 소릴까?

김지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손일석이 눈앞에 주먹을 들이대며 힘차게 흔들었다. 이유가 뭔지 모르지만 김지훈도 문득 정말 각오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물론 머릿속에 든 의문이 떠나진 않았다.

그날 저녁, 김지훈과 손일석이 사방에 책을 펼쳐 놓고 끙끙댔다. 왜 위궤양 환자의 위를 잘라야 했는지 확실한 이유를 알아야 했다. 오직 하나의 일념뿐이었다.

이론에 관한 것까지 탈 수는 없다!

***

새로운 주가 시작됐다. 입국식의 떠들썩함과 흥분이 빠르게 사라졌다.

김지훈에게는 또 다른 시작이기도 했다. 화요일에는 손일석이 신기동 교수의 수술에 들어가고, 오프를 조정한 신현수가 목요일마다 응급실 당직을 서기로 했다. 하지만 늘어난 시간과 여유는 고스란히 이혁민 교수의 차지였다. 월요일 아침 회진을 마친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을 불러 세운 것이다.

“김지훈, 논문 준비한 거 가져와 봐라.”

“죄송합니다. 준비를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김지훈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래? 그동안 시간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남은 시간이 없다. 이 주 내에 초안을 작성해라. 그래야 다음 달에 제출이라도 해 볼 거 아니가. 손일석하고 신현수가 일을 분담하니까 가능하겠지?”

의외로 평온한 말투였지만 2주라는 말이 귀에 콱 박혔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눈앞이 캄캄한 일이었다. 국내 학회에 제출한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촉박한 정도가 아니라 없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하물며 세계 학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멘토인 이혁민 교수의 말이었다.

월요일 오전 일과를 마친 김지훈이 의국에 처박혀 논문에 집중했다. 논문을 쓴다고 해서 할 일을 덜어 주는 교수는 없었다. 이혁민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오후에 벌어지는 유방 수술을 앞두고 유석재 대신 김지훈을 콜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일에 수술 방법에 관한 책은 펴 보지도 못했다. 이혁민 교수가 걱정이 가득한 김지훈에게 폭탄을 하나 더 던졌다.

“외과 논문은 실제 수술을 보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쓰기 힘들다. 앞으로 유방 수술은 다 들어와라.”

백번 지당한 말이었다. 하지만 언제 논문을 쓴단 말인가?

수술 내내 이혁민 교수는 나직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질문을 해 댔다. 김지훈의 얼굴이 갈수록 뻘게졌다.

“유방의 해부학적 구조는 공부를 했나?”

“공부하겠습니다.”

“유방암의 진행 기수 기준이 어떻게 되지?”

“공부하겠습니다.”

“미세 석회화 병변에서는 손으로 종물을 만질 수 없는데, 진단 방법이 어떻게 되나.”

“공부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혁민 교수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웃고 말았다.

“논문을 쓸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네. 니 정말 하나도 모르나? 학교 다닐 때 어느 정도는 배웠잖아. 유방 파트가 아무리 마이너라고 해도 그 정도는 기억해야 하는 거 아니가?”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기에는 확실하게 정리가 되질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수술까지 확실하게 공부해 오겠습니다.”

“다음 수술까지? 확실하나.”

“예, 선생님.”

김지훈의 대답에 이혁민 교수가 묘한 눈빛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당돌한 대답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설픈 지식으로 둘러대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태도일 수도 있었다.

‘다음 수술이라고 했지. 그럼 수요일에 보자.’

불과 이틀 남았다. 자신의 말에 얼마나 책임을 질지 두고 볼 일이었다.

수술 방에서 나온 김지훈이 기지개를 크게 펴며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풀었다. 질문을 할 때마다 공부하겠다는 답만 했지만, 단 한 번도 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준영 과장에게 탈 때와 비슷한 긴장과 중압감이 느껴졌다.

‘이혁민 선생님의 포스도 정말 만만치 않으시네.’

생각할수록 희한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유방암 환자와 단순 종물 환자 수술을 모두 마치자 오후 시간이 모조리 사라졌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녁 회진을 돈 김지훈이 응급실을 커버하며 두툼한 교과서와 밤새 씨름을 했다. 희미해졌던 유방에 관한 기초 지식이 하나둘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시간과 체력, 그리고 잠과의 싸움이었다.

‘해부학부터 시작해야 한다니, 논문은 도대체 언제 쓰지? 이혁민 선생님이 그냥 지나칠 분도 아니고, 정말 산 넘어 산이네. 우아! 졸립다.’

책과 씨름하다 깜빡 졸았는데 어느새 화요일 아침이 밝았다. 김지훈의 눈이 벌겋기만 했다.

화요일은 그나마 나았다. 이혁민 교수 파트의 수술이 없는 데다 신기동 교수의 수술은 손일석이 들어간 덕이었다. 재빨리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고 시간 나는 대로 교과서에 매달렸다.

피곤에 찌든 시뻘건 눈으로 온통 영어뿐인 교재를 봐서 그런지 눈앞이 뱅뱅 돌 지경이었다. 결국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구석에 처박아 둔 전가의 보도를 꺼냈다.

야마! YAMA(You Are My Assistant)!

단시간 내에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핵심을 정리해 놓은 야마는 역시 훌륭한 도구였다. 여기에 교과서까지 참조하자 뜻밖일 정도로 많은 시간을 절약했다.

정신없이 야마에 열중하던 김지훈이 시계를 보다 인상을 쓰며 구르다시피 공중전화 박스를 찾았다. 의국원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고경아에게 전화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아 씨, 내일 오프인 거 알죠? 만날까요?”

(어디서요?)

“어디긴요. 항상 만나는 데죠.”

(좋아요.)

까딱했으면 전화도 하지 못할 뻔했다. 한시름을 놓은 김지훈이 의국으로 올라가는 길에 슬쩍 응급실을 살폈다. 웬일인지 한산했다. 밤 12시 넘어서까지 응급실 콜이 없어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교과서와 야마를 동시에 덮은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찬물에 세수를 하고는 차근차근 머릿속에 담은 것을 다시 정리했다.

그때 문득 논문 자료를 읽으며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었다. 그 순간 이혁민 교수의 말이 스쳤다.

‘논문을 쓸 준비가 하나도 안 됐다고 하셨나? 아! 그게 이 말이었구나. 미세 석회화든 뭐든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데 어떻게 논문을 써?’

정말 귀중한 가르침이었다. 번뜩 정신이 난 김지훈이 부랴부랴 커피 두 잔을 뽑아다 놓고 다시 교과서를 펼쳤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정말 오래간만에 응급실 평온이 쭉 이어졌다.

새벽 2시가 훌쩍 넘었다. 이제는 눈을 붙여야 할 때였다. 무작정 잠을 줄이다가는 아는 것도 잊을 판이었다.

간만에 오랜 시간 공부를 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마음이 뿌듯해진 김지훈이 크게 기지개를 펴며 일어섰다.

그때 지금까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손일석이 초췌한 얼굴로 들어와서는 천장을 쳐다보며 한숨만 푹푹 쉬었다.

“너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지훈아, 살맛이 안 난다. 주말에 충격받고 나름 어제 최선을 다해 준비했는데 오늘 개박살 났다. 이준영 선생님이 총이라면 신기동 선생님은 칼이네. 그냥 가슴을 푹푹 쑤신다.”

김지훈이 웃었다.

“겨우 하루 탄 것 갖고 그러는 거야? 미친놈. 한숨 그만 쉬어, 인마. 그러다 하늘 무너지겠다.”

“넌 만날 타서 면역이 된 모양인데 내겐 충격이다. 천하의 손일석이 그렇게 탈 줄 누가 알았겠어.”

손일석이 무너지는 것처럼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쿵 소리와 함께 들려온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 소리에 1년차들이 숨을 죽였다.

“2년차 되면서 지금까지 쭉 타 온 나도 있는데 아주 지랄을 해요. 그래서 지금까지 방황하다 온 거야?”

“방황은 무슨. 숙소에서 공부하다 왔어, 인마. 그리고 니가 저녁 내내 의국에 죽치고 앉아 있으면 1년차들이 얼마나 부담스럽겠니.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자식아.”

“어라? 난 오늘이 거의 처음이야, 인마. 지가 만날 의국에서 죽치고 있었으면서. 그러는 너는 이 시간에 왜 왔어?”

“하도 갑갑해서 잠시 머리 좀 식히려고 온 거야, 인마.”

“에휴! 난 가서 자야겠다. 어째 응급실이 지금까지 조용한 게 불안하네.”

김지훈이 하품을 하며 의국을 나갔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손일석이 갑자기 히죽 웃었다. 신현수의 묘한 표정이 생각난 것이다.

‘자식, 지훈이가 우리 중에서 수술을 제일 잘하는 것 같다는 소리가 그렇게 충격적이냐. 얼굴하고는. 그나저나 오프 때도 집에 안 가고, 그 자식도 이를 악물었네.’

모든 일과가 끝나자마자 혼자 조용히 혈관 해부학을 공부하기 위해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신현수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논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고물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에 신경이 쓰여 잠시 쉬다가 우연히 주말에 있었던 일을 꺼냈다. 신현수가 생각 이상으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준영 선생님 수술을 보니까 어때?”

“대단하지, 뭐. 근데 말이야, 난 지훈이가 더 대단해 보이더라. 그동안 새카맣게 타면서 배운 게 엄청난가 봐. 우리 중에서 수술을 제일 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후! 쪽팔려. 내가 더 잘해야 하는데 말이야. 안 그러냐? 신현수.”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신현수가 거의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동기들 중에 가장 감정 표현이 적은 신현수였기에 상당히 의외였다. 그런데 손일석도 그 모습에서 묘한 충격을 느꼈다.

‘현수, 너도 지훈이를 보며 뭔가 느낀 게 있었구나. 그래서 과장님한테 찍힐 걸 각오하면서도 이준영 선생님 수술을 들어가려고 한 거야? 아버지가 이사장인 너도 그 정도 노력을 하는데, 난 뭘 하고 있었지?’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뛰어난 놈들이 더 노력하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든 손일석이 신현수가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고 혈관 해부학에 집중했다.

새벽 2시가 넘어가자 어깨가 뻐근하고 머릿속까지 몽롱해 바람도 쐴 겸 숙소를 나왔지만 갈 곳은 의국뿐이었다. 그런데 김지훈도 그때까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신기동 교수에게 탄 것을 핑계로 댔지만, 어쩌면 김지훈과 신현수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는지도 몰랐다.

손일석이 이제야 일을 마무리하는 1년차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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