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55화 (255/1,329)

제4화 어려운 수술일수록 기본기가 중요하다 (1)

박경일 교수와 송동화 과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개인적으로는 서울 병원에 근무하는 것이 최상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송재덕 과장이나 이혁민 교수가 금경태 과장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치사하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줄을 잘 서야 했다. 자칫 엉뚱한 줄을 잡으면 도리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금경태 과장이 입가를 말았다.

‘이 정도에 덥석 물 정도였으면 말도 안 꺼냈어. 최소한 내 말을 고민만 해도 송재덕의 입지가 좁아지는 효과가 있지. 물론 확실하게 내 밑에 들어온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줄 수도 있어.’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어. 난 자네 둘을 물망에 두고 있는 것뿐이야. 보다 능력이 있는 적임자가 나타난다면 나라고 어쩔 수 있겠나. 물론 능력이라는 게 실력만을 말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겠지?”

선뜻 답이 안 나오자 금경태 과장이 양주 한 잔을 더 권하며 말을 이었다.

“세상은 말이야. 운이 필요할 때가 많아. 아무리 잘난 놈도 자신을 과신하면 인생 망치는 법이지. 반면에 남들에게 약간이라도 인정받을 정도의 능력만 갖추면 도리어 기회가 많아지는 경우도 있어. 그만큼 여러 가능성을 다 염두에 두고 노력하기 때문이야. 나나 자네들이나 똑같아. 먼저 기회를 잡은 사람이 결국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게 세상 아닌가.”

박경일 교수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송동화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금경태 과장이 입맛을 다시며 일어났다.

“오늘 내가 한 말은 둘만 알고 있어. 말이 새 나가면 내가 줄 수 있는 기회마저 사라질 수 있어. 자네들과 경쟁해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누가 좋아하겠어? 일어나지. 다들 기다리겠네.”

“예, 과장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박경일 교수의 말에 금경태 과장이 힐끗 쳐다보며 등을 두드렸다.

“부담 갖지 마. 그냥 내 마음이야. 술 생각나거나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금경태 과장이 먼저 자리를 떴다.

송동화 과장이 이마를 주무르며 물었다.

“선생님,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정말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나도 모르겠다. 요새 외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건 알지? 송 과장,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파워 게임에 휘말릴 수도 있어. 잘 생각해. 재수 없으면 닭 쫓던 개 된다.”

“송재덕 선생님이나 이혁민 선생님과 상의를 해 볼까요?”

박경일 교수가 피식 웃었다.

“구미가 외지긴 해. 나도 구미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천안에 오니까 들리는 소리가 참 많더라. 금경태 과장님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야.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는 구미에서도 쫓겨난다.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지만, 확실하게 결정을 한 후에 움직여. 단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하는 거 잊지 마.”

“선생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어떻게 해? 우리 같은 말단이야 병원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는 거지.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어?”

박경일 교수의 말에 송동화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야릇한 눈빛을 보였다.

금경태 과장의 말은 누구에게나 솔깃한 말이었다. 일반 외과 개편과 이준영 과장의 등장이 어떤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한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입국식이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몇몇 교수들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1년차들에게 아직도 술을 주고 있었다. 점점 사람이 술을 먹는 건지, 술이 사람을 먹는 건지 모르는 상황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결국 술이 사람을 먹었다.

1년차들이 감히 교수들과 윗년차들 앞에서 꽥꽥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4년 동안의 트레이닝 기간 동안 유일하게 그런 일탈이 허락되는 시간이었다. 모두들 크게 웃으며 귀엽다는 듯 박수까지 쳤다.

여느 때와는 달리 금경태 과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구석에 앉아 삼사 년차 몇 명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난 입국식 때는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대신 다른 교수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혁민 교수도 기분이 무척 좋은지 서도진을 붙들고 노래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지러움 속에서도 단연코 귀에 쏙 들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현수야, 2년차 되니까 좋지? 수술 많이 했겠구나. 많이 했지? 몇 개나 했어?”

“예. 과장님께 몇 번 받았습니다.”

“에이! 몇 번이 뭐냐. 이왕 줄 거면 왕창 줘야지, 왕창. 경석아, 그렇지? 내 말이 맞지? 넌 많이 했잖아.”

“예, 과장님. 감사합니다.”

송재덕 과장이 천안으로 돌아갈 때 운전을 해야 하는 이경석이 말짱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그럼 고마워해야지. 아암! 고마운 일이지. 근데 현수야, 지훈이 어디 갔어? 지훈이. 일석인 또 왜 안 보여.”

“저… 당직이라고 아까 말씀드렸는데요.”

“그랬니? 그랬구나. 맞다, 맞아. 아이구! 이놈의 자식들, 입국식 날 술도 못 마시고 고생하는구나. 고생 참 많이 하네. 지훈이, 그 자식 보고 싶네. 음! 보고 싶어.”

송재덕 과장이 술 몇 잔 마신 후부터 자꾸 김지훈을 찾았다. 신현수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눈치가 빤한 이경석이 쓰윽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신현수를 앞에 두고 김지훈을 보러 가자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과장님, 잠깐 병원에 다녀오시는 게 어떨까요? 이준영 선생님 보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입국식인데 가긴 어딜 가? 여기 있어야지. 에이! 여기 있어야 되나? 경석아, 여기 있어야지? 그래. 여기 있어야 돼. 나도 과장이잖아.”

송재덕 과장의 말은 빤했다. 하지만 입국식 자리였기에 적당한 핑계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위치였다. 1년차들을 두고 천안 일반 외과 과장이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잠시 눈가를 찡그리던 이경석이 눈을 반짝였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술이 좀 과하신 것 같습니다.”

“나 많이 안 먹었어. 세 잔? 네 잔 먹었나? 맞다. 네 잔 먹었네. 양주가 독하긴 독해. 아주 독하네.”

“그럼 잠깐 바람이라도 좀 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송재덕 과장이 짐짓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눈은 웃고 있었다.

“그래도 될까? 경석아, 내 얼굴 많이 빨개졌지? 나이 먹으니까 예전만 못해. 음! 안 좋아. 경석아, 내 얼굴 빨갛니?”

“예. 많이 빨가십니다.”

“그렇지?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린다 했어. 아주 화끈화끈해. 그래. 바람 좀 쐬자. 허허! 니가 경석이지? 그래, 경석이. 좋다. 좋아. 마음에 들어.”

이경석이 신현수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눈길을 주고는 송재덕 과장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송재덕 과장이 찬바람을 쐬자마자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경석아, 응급실 근무가 힘든데 큰일이다. 큰일이야. 얼마나 힘들겠니. 그러다 쓰러질까 봐 걱정된다. 우리 준영이 어떻게 하니, 준영이. 지훈이 그놈은 어디 있을까? 병원에 있겠지. 가자. 빨리 가자.”

골목길 사이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빠르게 사라졌다.

그 시간, 김지훈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복부 CT를 보고 있었다. 보행자 교통사고로 들어온 환자의 CT 소견이 심상치가 않았다.

“일석아, 판크레아스(pancreas:췌장)가 나간 것 같지?”

“그런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잘라졌지?”

두부 정도의 강도를 가진 췌장은 머리(head), 몸통(body), 꼬리(tail)로 나뉜다. 머리 부분은 담도 및 십이지장과 연결이 돼 있어 매우 위험한 부위였다. 몸통과 꼬리 부분 역시 다른 장기와 연결돼 있진 않지만, 소화액을 만들기에 손상을 받으면 상당히 위험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췌장은 배 속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후복막 안에 묻혀 있기 때문에 외상으로 인한 손상을 받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그런데 환자의 CT 사진에서 췌장 중간 부위에 수직으로 난 검은 선이 보였다. 췌장이 몸통 부분에서 반으로 잘라졌다는 의미였다.

“지훈아, 우리 판단이 맞는다면 제거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지?”

“췌장이 봉합한다고 붙는 장기가 아니잖아. 몸통 일부와 꼬리 부분을 제거하고 나면 절단면은 어떻게 처리하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잘린 면에서 소화액이라도 새면 사망률이 꽤 될 거야.”

십이지장루가 생겨 고생을 했던 장민수보다 훨씬 위험한 경우였다. 수술 중 췌장 속에 묻힌 소화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단백질 분해 효소가 새어 나오면 췌장 자체를 녹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파괴된 췌장에서 연쇄적으로 소화 효소가 더욱 많이 빠져나오게 된다. 결국 주변 장기까지 모두 녹일 수 있었다. 그만큼 수술을 할 때 세심하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준영 과장은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수술의 경험이 많고, 노련한 의사였다. 문제는 경험이 없는 김지훈이었다. 더구나 집도의만큼 퍼스트가 중요한 수술이었다. 확실하게 수술 방법과 개념을 파악하지 못하면 퍼스트를 제대로 서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타고, 안 타고의 문제가 아니라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일석아, 미안한데 검사 결과 나오는 대로 수술 스케줄 좀 챙겨 줘. 나 잠깐 의국에 갔다 올게.”

“알았어. 근데 의국엔 왜 올라가?”

“수술을 어떻게 하는지 기본 정도는 알아야 할 거 아니냐.”

손일석이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아이구! 이놈의 정신은 언제 차리려고 이러지? 신기동 선생님에게 안 타려면 저런 건 정말 배워야 돼. 어휴! 그동안 빼먹고 다닌 게 한두 개가 아니네.”

1년차가 없는 탓에 손일석이 바빠졌다. 하지만 지난 1년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보낸 2년차였다. 기본적인 수술 준비가 빠르게 시작됐다.

급히 의국에서 수술에 관한 교과서를 들고 온 김지훈이 정신없이 책을 읽었다. 주의해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을 알아야 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과정은 절단면의 처리다. 여기서 실수가 생기면 수술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어.’

수술의 목적은 절단된 췌장의 몸통과 꼬리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고민할 것도 없었다. 결국 환자의 예후를 좌우할 수 있는 수술 과정이 이번 수술의 핵심 요소였다.

그 어떤 수술보다도 집도의와 퍼스트의 손 그 자체가 중요했다. 호흡이 어긋나거나 손이 맞지 않는다면 손상된 췌장을 제거하기는 하겠지만 결과는 천양지차였다.

아직도 고민할 부분이 많았지만 수술에 필요한 검사 결과가 모두 나왔다.

김지훈이 심호흡을 하고는 당직실로 들어섰다. 책을 읽고 있던 이준영 과장이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수술 있어?”

“예, 선생님. 그런데 선생님께서 먼저 복부 CT를 확인하시고 수술을 결정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왜?”

“췌장 손상이 의심됩니다.”

그제야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들었다. 췌장은 복부 내 장기 중 수술을 하기 가장 까다롭고 위험한 장기였다. 더구나 복부 CT로도 정확한 소견을 얻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어떤데?”

“몸통 원위부에서 절단이 된 것 같습니다.”

굉장히 드문 경우인 데다 김지훈의 판단이 맞는다면 결코 쉽지 않은 수술이 될 것이다.

이준영 과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눈가를 찌푸리며 응급실로 나갔다. 그동안 이런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김지훈이 더욱 긴장했다.

복부 CT를 보던 이준영 과장이 눈가를 잔뜩 찡그렸다.

김지훈의 판단은 정확했다. 절단된 면을 기준으로 췌장의 몸통 일부와 꼬리 부분을 제거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김지훈, 환자가 몇 살이야?”

“스물한 살입니다.”

“유리한 만큼 불리하네.”

체력이 강한 나이인 만큼 수술 후에 별문제 없이 회복될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문제가 생긴다면 젊은 나이이기에 훨씬 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낼 수도 있었다.

심각한 기색으로 잠시 고민을 하던 이준영 과장이 보호자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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