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자 (2)
아프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 입국식이 언제인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목소리를 높이자 서도진이 움찔 놀라며 공연한 겁을 냈다. 1년차는 2년차의 말과 동작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바로 위의 년차는 하늘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에이 씨! 도진이 너 죽여야 하는데 하필이면 당직인 주에 하냐. 도진아, 몸 관리 잘해라. 응급실에서 포도당으로 해결할 수준이 아니다.”
“그렇게 많이 먹어요?”
김지훈이 히죽 웃었다.
“너는 술 좀 먹으니까 대충 일주일 치를 하루에 먹는다고 생각하면 돼. 그 정도는 먹어 줘야 일반 외과 전공의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지. 야! 그러고 보니 이번 주말만 지나면 도진이 너랑 정식으로 한 식구가 되는 거네.”
서도진이 암담한 눈빛을 보이다 슬며시 웃었다.
정식으로 의국원이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한 달 반 만에 먹는 술은 또 얼마나 달콤할까?
김지훈도 서도진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더 이상 앉아 있어 봐야 졸려서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이혁민 교수의 말대로 체력 관리 또한 의사가 해야 할 일이었다.
의국 문을 열던 김지훈이 손가락을 튕기며 빨간 볼펜을 빙빙 돌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서도진의 얼굴이 어떨지 환히 보였다.
‘도진아, 이 볼펜 한 자루로 백 일 당직 끝내자.’
손일석과 함께 간간이 오는 환자들을 보는 사이 밤이 지났다. 더 이상 응급 수술은 없었지만, 이 밤 역시 피곤함을 잔뜩 던져 주었다.
***
정규 수술이 없는 토요일 오전이 왔다. 하지만 날카롭고 예리한 질문이 쏟아지는 주말 집담회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긴장된 시간이었다.
뒷자리에 앉아 발표를 하는 1년차들을 보던 김지훈이 슬며시 금경태 과장을 보았다. 최근에 들어서 얼굴이 좋은 때가 없었다. 특히 이준영 과장이 질문을 하거나, 혹은 이름이 거론되거나 하면 더욱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눈가를 찡그리던 김지훈이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희한한 일이었다. 그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금경태 과장과 구영선 교수, 그리고 임동완 교수.
오상익 교수와 이혁민 교수, 그리고 신기동 교수와 교수들 뒤에 앉아 무뚝뚝한 얼굴로 발표를 듣는 이준영 과장.
조그만 일반 외과 교실이 둘로 나뉘어 있었다.
누가 좋은 의사들이고, 누가 나쁜 의사들일까?
전공의들에게 나쁜 교수는 없어야 정상적인 일이었다.
열심히 배우고 일하는 전공의들은 북돋아 주고, 그 반대라면 혹독하게 질책하는 존재가 바로 교수들이었다. 각자 마음속에 담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찌 보면 모두가 스승이고, 제자들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만은 다르게 보였다.
며칠 전만 해도 감히 정면으로 쳐다보기도 힘들었던 사람이었다. 기분 나빠하는 눈빛과 표정을 접할 때마다 전전긍긍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1년차에게 환자와 수술에 대해 묻는 모습을 보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김지훈의 눈빛이 점점 깊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의사가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사고팔 수 있지? 죽은 사람을 먼저 싣고 오면 도리어 화를 내고, 다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의사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사람이다. 날 싫어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게 정말 다행이야.’
금경태 과장의 수술 실력은 누구나 인정을 했다. 일반 외과 과장이자 부원장으로서 가진 능력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수많은 논문 발표는 금경태 과장의 학문적 성취도 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이제 의사가 된 지 3년째에 불과한 김지훈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의사도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환자라는 사실이었다.
아픈 사람이 없다면 의사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직업일 것이다. 각자 의사가 된 이유와 목표는 다르겠지만, 그러한 이유 때문에 혹독한 수련 과정을 참고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
금경태 과장에 대한 믿음이 산산이 깨졌다.
‘다음 텀에는 오상익 교수님이나 과장 파트를 돌겠지? 오상익 교수님 파트를 돈다고 해도 결국 구영선 교수님과 임동완 교수님의 오더를 받아야 할 텐데, 날 어떻게 대할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김지훈이 깊고 나직한 숨을 내뱉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면 구영선 교수나 임동완 교수와는 거의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신현수나 손일석의 경우를 생각하면 더욱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담한 일이었다.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하는 시기에 자칫 3개월을 허송세월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문득 이준영 스승과 이혁민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무엇을 배울지는 내 선택이라고 하셨지.’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굳이 얼굴을 맞대야만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나가듯 한 말과 수술을 하는 모습만 보아도 배울 것은 넘치고도 남았다. 하기 나름이었다.
금경태 과장과 몇몇 교수들이 어떻게 대하든 꿋꿋이 앞만 보고 가면 배워야 할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파트가 달라졌다고 스승과 이혁민 교수가 멀리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어떤 일을 하든 내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리 큰 도움을 받아도 할 수 없을 거야.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날 믿어 주시는 스승님과 이혁민 교수님이 계시잖아. 신기동 교수님도 계신가? 송재덕 과장님, 박경일 선생님에 최철한 선생님하고 유석재 선생님, 일석이도 있잖아? 1년차 놈들도 날 믿겠지?’
서로를 믿고 함께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불현듯 가슴이 뜨거워지며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은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배워야 할 때였다.
인간 망종처럼 행동한 정갑수를 보면서도 배운 것이 있는데, 하물며 일반 외과 과장에게 배울 것이 없을까?
김지훈이 금경태 과장의 말에 집중했다.
사람 속에 무엇이 들었든, 지식에 관한 한 배울 것은 확실히 있었다. 아니, 무궁무진했다.
집담회가 끝나자마자 모두 썰물처럼 빠져나가 토요일 업무를 처리했다. 오후 5시에 시작하는 입국식 때문에 준비할 것이 많았다. 삼사 년차들이 바삐 병원 안팎을 뛰어다니고, 1년차들 역시 남은 일을 빠르게 마무리했다.
오후 4시가 지나자 남은 사람은 김지훈과 손일석뿐이었다. 1년차들도 때 빼고 광을 내기 위한 시간이 필요해 한 시간 일찍 내보냈다.
“일석아, 벌써 일 년이 지났네. 시작할 때는 1년차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지난 것 같지 않냐?”
“그러게. 에휴! 그래도 너는 건진 게 있잖아. 난 옆구리가 시려서 그런지 별 감흥이 없다. 광호하고 호석이 술 좀 먹여야 하는데, 하필이면 이런 날 당직이냐. 제길! 논문이고 뭐고 다 귀찮다.”
사실 김지훈도 맥이 빠지긴 했다. 입국식은 1년차만이 아니라 전공의들 모두에게 의미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정식으로 의국원이 된 1년차들에게 축하의 술 폭탄을 던지고, 근무 여건상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의국원들이 모두 모이는 유일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일석아, 신기동 선생님 수술은 어떻게 할까?”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화요일은 내가 들어가고, 니가 목요일을 맡는 게 어때? 아예 날을 정해야 준비하기가 편할 것 같은데.”
“난 상관없어. 치프 선생님에게 허락만 받아.”
“오케이! 그렇게 하자.”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평소 대화를 나눌 시간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단둘이 남자 막상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웃긴 일이지만 중간에 있어야 할 술이 빠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물끄러미 창밖만 보던 김지훈과 손일석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일어나 스테이션에 딸린 조그만 당직실로 향했다. 병원에 남아 있는 전공의라고는 딱 둘뿐이었기에 편안한 잠자리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언제 어디서 콜이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손일석의 웅얼거리는 잠꼬대가 들렸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신기동 선생님.”
금경태 과장과의 일을 생각하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열심히 일하고 배우는 동기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빨리 벗어나야 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시간, 입국식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서울 병원 교수들은 물론 천안의 송재덕 과장과 박경일 교수, 그리고 구미에 새로 부임한 송동화 과장까지 올라왔다.
1년차들의 인사와 재롱이 끝나고 술잔이 돌기 시작했다. 곧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하나둘 모여 앉았다.
구영선 교수와 함께 앉아 1년차들에게 차례로 술을 주던 금경태 과장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박경일 교수와 송동화 과장을 불러 옆방으로 건너갔다.
금경태 과장이 호박 빛깔의 양주를 따르며 잔을 들었다.
“박 교수, 송 교수, 한잔해.”
“예, 과장님.”
연거푸 두 잔을 권한 금경태 과장이 헛기침을 했다.
“박 교수, 천안으로 간 지 얼마 안 됐는데 일하면서 불편한 점은 없고?”
“예, 없습니다.”
“송재덕 과장님도 잘해 주시지?”
“그럼요. 구미보다 훨씬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송동화 교수, 자네는 어때?”
“저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잔이 빈 것을 본 금경태 과장이 양주를 따라 주며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따로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할 얘기가 좀 있어서 불렀어. 아는지 모르겠지만, 박 교수와 송 과장을 발령 내기 전에 고민을 많이 했어.”
“고민을 하셨습니까?”
다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은 박경일 교수의 물음에 금경태 과장이 손을 저었다.
“아! 다른 뜻은 없으니까 오해하지 마. 이삼 년 내에 서울 병원 스태프들을 확대 개편할 가능성이 높아. 그래서 미리 올릴지, 아니면 번거롭게 이리저리 옮기느니 그때 한 번에 올릴까 고민을 했다는 말이야.”
“서울 병원 스태프를 더 늘린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돼야지. 내 파트에도 주니어가 있어야 하고, 오상익 교수님이나 이혁민 교수도 마찬가지잖아. 물론 신현수가 있어서 한 자리는 빠지겠지만, 최소한 두 자리 정도는 더 필요해.”
송동화 과장이 눈을 반짝였다. 구미보다는 서울이 백번 나았다. 발령만 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과장님, 오상익 선생님 파트는 지금도 세 명이니까 불확실해도, 이혁민 선생님 파트는 확실하게 한 명이 더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래서 내가 고민이 많아. 대충 누구를 뽑을지 생각은 하고 있지만 다른 교수들은 어떨지 모르겠어. 누구나 다 자기하고 마음과 손발이 맞는 사람하고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겠어?”
“그거야 당연한 말씀이지만, 결국 과장님께서 최종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금경태 과장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그런 시대는 지났어. 또 내가 부원장까지 하고 있어서 예전처럼 신경을 쓰기가 힘들어. 이삼 년 후에는 신상민 병원장님도 은퇴를 하실 나이가 되고 하니까 더 힘들 수도 있고 말이야.”
금경태 과장이 은연중 자신이 병원장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그동안의 관례와 피상적으로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송동화 과장이 입술에 침을 축였다.
“점점 바빠지시겠습니다, 과장님.”
“그럴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나도 명색이 일반 외과 의산데, 우리 과 일을 등한시할 수는 없잖아. 기반이 탄탄해야 병원장도 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나도 가급적이면 내 뜻을 잘 아는 사람을 뽑고 싶은 게 사실이야.”
박경일 교수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희들은 힘들다는 말씀이시네요. 천안하고 구미에 있는데 과장님 의중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거리가 문젠가? 마음이 문제지. 시간 날 때 가끔씩 올라와.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서울 병원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미리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빙빙 말을 돌리고 있었지만 금경태 과장 특유의 화법이었다. 결코 자신의 속내를 정확히 드러내진 않지만 원하는 바는 분명하게 전하는 스타일이었다.
결국 자신의 뒤에 서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