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53화 (253/1,329)

제3화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자 (1)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마구 뒤섞였다.

금경태 과장에 대한 분노.

미래에 대한 불안과 알지 못할 두려움.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일해 온 사실에 대한 허무함과 좌절.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른 척하고 이대로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미친 척하고 금경태 과장에게 말이라도 해 봐야 하는 걸까?

김지훈이 머리를 흔들었다.

온갖 생각에 혼란스럽기만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치 짙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누군가 김지훈을 굳게 잡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한참 동안 말없이 김지훈을 보던 이준영 과장이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김지훈, 상황을 알고 나니까 속이 시원해?”

“아닙니다.”

“그럼 속 시원하게 해결하자. 병원 그만둬.”

김지훈이 눈을 부릅떴다. 스승인 이준영 과장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이제 와 이런 일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도리어 투지처럼 강한 감정이 치솟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

“계속 꿈을 향해 달려갈 거야?”

김지훈이 악에 받친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그럴 겁니다.”

‘그래. 이 모습이 바로 김지훈 너야.’

이준영 과장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그러면 뭐가 문제야? 금경태 과장이 무서워?”

김지훈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교수들도 금경태 과장과 등을 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개 전공의가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면 그게 도리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김지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두려웠다. 그동안 금경태 과장이 보인 권위와 교수들에 대한 막연한 존경심이 발목을 잡았다. 더구나 과장이라는 자리는 병원에 남고자 하는 전공의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제 2년차인 김지훈이 단번에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높은 벽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참담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현재 일반 외과를 대표하는 교수는 금경태 과장이었다. 김지훈에게 그런 사람을 무시하라는 소리를 해야 한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김지훈, 넌 과장님과의 문제에 신경 쓰지 마라. 옳지 못한 것은 우리가 싸워서 바로잡을 거다. 지금처럼 최선을 다해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게 니가 할 일이다.”

“과장님을 무시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무시할 수 있으면 해.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배워야 한다. 과장님에게도 네가 일반 외과 의사로서 배워야 할 것이 있어. 남자답게 한번 싸워 봐.”

‘싸우라고요? 내 자신과 싸우라는 말씀이시겠죠?’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혁민 교수의 말을 소홀히 들을 수는 없었다. 곱씹고, 또 곱씹어 그 속에 든 의미를 안다면 당당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속의 답답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답은 결국 자신의 생각과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지독히도 길게 느껴지는 침묵이 흘렀다.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가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래. 난 내 갈 길을 향해 가면 돼. 과장님이 아무리 날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해도 나만 중심을 잡으면 되는 일이야. 가자. 스승님과 이혁민 선생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자. 그게 진정으로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야.’

마침내 김지훈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물끄러미 커피가 담겼던 컵을 보며 말했다.

“김지훈, 일반 외과를 왜 했는지 잊지 마. 생각해 보면 금경태에게도 배울 것이 있어. 단, 무엇을 배워야 할지는 네 선택이겠지.”

수술이나 환자에 관해서는 조금도 가르쳐 줄 생각도 없을 금경태 과장이었다. 하지만 의사에게 필요한 것은 실력만이 아닐 것이다. 김지훈 스스로 가고자 하는 방향도 명예와 권위가 아니었다.

먼저 진정한 의사가 되어야만 최고의 써전이 될 수 있었다. 금경태 과장의 행동과 모습은 어떤 의사가 참된 의사인지를 항상 생각하게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선생님.”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의 등을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선생님 말씀대로 네가 일반 외과를 택한 이유를 잊지 마라. 꿈을 잃으면 설사 금경태 과장님에게 총애를 받는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의사 협회 회장이 최고의 의사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명심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잘해 왔다. 내 비록 네게 스승 소리는 못 들었지만, 너는 내 제자야. 우릴 믿어라. 이준영 선생님은 제자 하나 못 지킬 정도로 약한 사람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고.”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를 보았다. 따스한 눈빛을 보이며 웃고 있었다. 너 하나쯤은 지키고도 남는다는 눈빛이었다.

‘스승님, 선생님.’

스승과 멘토의 의지가 느껴졌다. 문득 이 정도는 어려움도 아니라는 강한 자신감이 다가왔다.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의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과장님 때문에 일반 외과를 택한 건 아니잖아. 난 내 길을 가면 돼. 스승님과 선생님과 함께라면 힘들 것도 없어. 도리어 난 행복한 놈이었어.’

김지훈의 눈빛이 변했다. 불안과 두려움 대신 자신감과 열정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한동안 김지훈을 보며 눈가를 좁히던 이준영 과장이 표정을 싹 지우며, 그만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만 올라가 봐.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경고다. 다신 아프지 말고, 쓸데없는 일에 정신 팔지 마. 넌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야.”

“예, 선생님. 올라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힘차게 소리치며 당직실을 나갔다.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선생님, 정신력 하나는 저놈을 따라갈 사람이 없겠습니다. 나 같으면 몇 달이 지나도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도 속이 시커메져 있겠지. 이 교수.”

“예, 선생님.”

“이럴 때 제일 좋은 약은 일이야. 혈관 수술은 신 교수하고 상의해서 되도록 손일석에게 주고, 이 교수도 이젠 수술 좀 끌고 들어가서 가르쳐. 그래야 다른 생각을 못할 것 같아.”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저놈이 언제 확실하게 벗어날지 걱정이 되지만 기대도 되네요.”

때론 위로 대신 더 강한 자극이 약일 수도 있었다. 김지훈에겐 지금 금경태 과장을 잊고도 남을 강한 자극이 필요했다. 전공의에게 그런 자극은 정신없이 일하고 배우는 것뿐이었다.

‘김지훈, 모든 직업이 마찬가지겠지만 의사는 누구보다도 정신력이 강해야 한다.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밀고 나가. 뒤는 우리가 받쳐 주마.’

입술을 모으며 생각에 잠겼던 이준영 과장이 피식 웃었다.

“이 교수, 돈 좀 있어?”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병원 하나 세울 돈 좀 벌어 놔. 우리하고 송재덕 선생님에 저놈까지 있으면 최고의 수술 팀 하나는 만들고도 남겠다.”

이혁민 교수가 크게 웃었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손일석하고 이경석에 신현수까지 있으면 2년차들만으로도 환상의 수술 팀 하나 나오지 않을까요? 이놈들만 잘 키우면 어려운 일도 아니겠습니다.”

“신현수를? 이사장님은 어쩌고?”

“가만 보니까 선생님에게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데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런가? 괜찮네.”

때 아닌 농담에 이준영 과장도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지훈아, 넌 내가 반드시 지켜 준다. 아니, 넌 나처럼 의지가 약한 놈도 아니니까 스스로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을 거야.’

한동안 이준영 과장과 김지훈에 대해 대화를 나눈 이혁민 교수가 시계를 보며 일어섰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저는 이제 가 보겠습니다. 아! 그런데 김지훈이 금경태 과장님과의 일을 알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동안 행동을 보았을 때 이런 일을 두고 함부로 입을 열 김지훈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준영 과장을 아무리 신뢰한다고 해도 전공의 입장에서 이런 문제를 꺼내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말없이 웃기만 했다. 이혁민 교수가 당직실을 나서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제일 먼저 찍은 놈인데 어째 점점 밀리는 것 같네.’

어떻게 알았든 부러운 사제지간이었다.

의국에 들어선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차팅 때문에 정신이 없는 1년차들.

논문을 쓰느라 머리도 안 드는 손일석과 신현수.

3년차였지만 아직도 뭔가를 하고 있는 유석재.

이 늦은 시간에도 다들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크든 작든, 그들 중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맞아. 나만 힘든 게 아니지. 어차피 찍힌 채로 살았고, 지금은 단지 내가 알았다는 차이밖에 더 있어?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난 내 자신과 스승님, 그리고 이혁민 선생님을 믿고 가면 돼.’

어깨를 빙빙 돌리며 의자에 앉은 김지훈이 정말 오래간만에 논문에 필요한 자료를 뽑아 들었다. 한 달이나 늦었다. 어떤 결과를 얻든 최선을 다해 볼 일이었다.

“일석아, 논문 많이 썼어?”

“많이 쓰긴. 이제 자료 정리했어. 이걸 언제 쓰냐. 으휴! 세계 학회에서 논문이 채택되면 온 병원이 난리가 날 텐데. 유석재 선생님, 영어 공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유석재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영어는 왜?”

“선생님 논문이 채택될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확 오네요. 외국 애들이 바글바글할 텐데, 발표를 한국말로 할 수는 없잖아요. 미리 연습해야 폼이 좀 살죠.”

“미친놈. 세계 학회가 동네 유치원이냐?”

유석재가 실없는 소리 말라면서도 웃었다.

손일석이 입맛을 쩝쩝 다시다 말고 하품을 했다. 졸음과 싸워야 할 시간이 훌쩍 지난 지 오래였다.

논문 자료에 열심히 줄을 그어 가며 고민을 하던 신현수가 이제야 고개를 들었다.

“김지훈, 너 얘기 들었지?”

“무슨 얘기?”

“나 오프 때 하루는 응급실 근무하기로 한 거 말이야.”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신현수를 노려보았다.

‘가만있어 봐. 저 자식이 지금 스승님께 배우지 못해서 안달이 났다고 하는 거야? 이런! 나도 아직 배울 게 산더미라는 말 똑똑히 들었는데 절대 안 되지.’

이럴 때일수록 티 나지 않게 태연해야 했다.

“일석이가 신기동 선생님 수술 들어오니까 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이틀에 한 개 정도 뜨는데, 그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해.”

이틀에 한 개?

김지훈이 슬쩍 수술 개수를 절반 정도로 줄이자 다들 묘한 표정을 지었다. 죽다 살아난 놈이 할 말이 아니었다. 지금도 눈빛은 살아났지만 몰골은 1년차와 똑같았다.

“교수님들 오더야. 니가 수요일에 오프니까 내가 화요일이나 목요일 중 하루 설게. 그때그때 상황 봐 가면서 결정하자.”

“현수야, 괜찮다니까.”

“오더를 어떻게 우리 마음대로 어겨?”

대꾸도 못할 정도로 신현수의 말투가 차갑고 냉랭했다. 이럴 때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았다. 반드시 이준영 과장의 수술에 들어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 자식이 정말 단단히 마음을 먹었네. 어휴!’

신현수의 말대로 교수들이 내린 결정이었다. 김지훈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수술이 제일 없는 날이 언제지?’

응급 수술이 예약하고 하는 수술인가?

곰곰이 수술이 가장 없는 날을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그런 날은 없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괴로워하던 김지훈이 인상을 잔뜩 구기며 논문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결정된 일을 두고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유석재와 손일석이 사라졌다. 아직 일이 남은 1년차들과 신현수가 아직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김지훈도 질세라 논문 자료에 집중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피곤에 눈이 자꾸 감겼다.

머리를 흔들며 잠을 쫓던 김지훈이 무심코 달력을 보았다. 벌써 4월 두 번째 주가 다 지나고 있었다.

그 순간 뭔가 뇌리를 스쳤다.

“도진아, 입국식 한다는 소리 없었어?”

“입국식이요? 이번 주말에 하는데요.”

“으응? 이번 주말? 그럼 내일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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