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일반 외과를 왜 했지? (1)
손일석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에휴! 지훈아, 목요일까지만 아프면 안 될까?”
“이제 좀 살 것 같은데. 왜, 인마.”
“그래야 한 번이라도 수술을 더 들어갈 거 아니냐. 너 일하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기회가 확 줄지 않겠어?”
“너 내 친구 맞아? 아주 아프라고 제사를 지내라, 인마. 그런데 무슨 일로 둘이 다 올라왔어?”
신현수가 입을 열려다 말고 침대 밑을 보았다. 음료수 박스기 바리바리 쌓여 있었다. 병동과 응급실, 그리고 중환자실까지 쳐도 세 박스면 충분했다. 그런데 여섯 박스가 넘었다.
‘이게 다 어디서 왔을까?’
언뜻 사소한 일이었지만 김지훈이 그동안 어떻게 일을 했고, 어떻게 사람들을 대했는지 알 만했다.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든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최근 들어 점점 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야. 여기서 더 문제가 되기 전에 확실히 기회를 잡아야 해. 그동안 받아 온 트레이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분명 부족해.’
신현수가 지그시 이를 물며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픈데 이런 말해서 미안하지만, 이준영 선생님께서 요구하시는 게 뭐야? 말해 줄 수 있어?”
“그렇지? 내가 딱 맞혔네. 지훈아, 이왕 말을 할 거면 신기동 선생님 것도 부탁한다. 일단 이거 하나 먹고.”
손일석이 주스 하나를 따서 내밀었다. 이제는 살 만한지 김지훈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신기동 선생님은 간단해. 혈관 수술을 할 부위의 해부학 구조를 꿰뚫고, 어시스트는 고 간호사한테 물어봐. 그리고 계속해서 쭉 타면 돼.”
“지훈아, 안 타는 방법은 없어?”
“그럼 내가 아팠겠냐? 하도 타서 아픈 거야. 뭐 하나 공부하라고 하셔서 공부하면 줄줄이 다른 게 또 나와.”
손일석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오늘 단 두 번의 수술을 보았지만 혈관 수술이 주는 매력은 도리어 더욱 강해졌다. 활화산처럼 불길을 쏟는 신기동 교수의 눈은 마력이자 강렬한 자극이었다. 보다 빠른 길을 찾고 싶었지만 여느 수술처럼 혈관 수술에도 지름길은 없었다.
신현수도 갑갑한 표정을 지었다.
“이준영 선생님은?”
“많이 탔구나. 살벌하지? 눈물 안 흘렸으면 다행이다. 연타로 타 봐라. 그냥 한강에 빠져 죽고 싶을 거다.”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만 알려 줘.”
“이준영 선생님은 신기동 선생님보다 더 어려워. 작년 초반에 무지하게 타다가 좀 나아졌었어. 그런데 올해 들어오니까 다시 1년차 초반이야. 가르치시려고 하는 게 상황에 따라 다른 것 같아.”
신현수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구체적으로 말해 봐.”
“나도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1년차 때는 집도의가 최대한 수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게 퍼스트 역할이라고 하시는 것 같아.”
“그럼 2년차는?”
“케이스 발표 때 이혁민 선생님이 하신 말씀 있잖아. 수술의 목적이 명확해야 정확한 방법이 나온다. 그래야 실수를 줄인다. 그게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다음에는 수술을 못 들어갔잖아. 그리고 그게 맞는다고 해도 안 태우실까? 역시 쭉 탄다고 생각해야지. 선생님들 눈에 우리가 얼마나 우스워 보이겠냐.”
김지훈의 말에 신현수의 얼굴이 굳었다.
기본을 강조한 이준영 과장의 말을 생각해 볼 때 자신에게 2년차의 역할을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지난 1년간 기본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니,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설마 내가 너한테 그 정도로 뒤졌다는 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과장님은 아무 말도 안 하시잖아.’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거친 숨을 내쉬던 신현수가 벌떡 일어나 숙소를 나갔다. 자존심에 큰 상처가 났다. 당장이라도 이준영 과장에게 무엇이 부족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송재덕 과장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신현수가 주저앉고 말았다.
‘이준영 선생님, 선생님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해 보죠. 내가 정말 그 수준일 수도 있지만, 선생님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악문 신현수가 병동으로 향했다. 전화벨이 울리기만 기다리는 듯 전화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콜이 왔다. 단순 아뻬였다.
최선을 다해 환자를 보고, 어떻게 퍼스트를 서야 할지 고민했다. 수술 중에는 이준영 과장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수술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한시도 마음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헛배웠어. 아무리 잘 가르치면 뭐해?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는데. 그동안 교수들이 뭘 가르치려 했는지 다시 생각하고, 고민해.”
그동안 칭찬만 받아 왔다. 송재덕 과장이 김지훈과 자신에게 동시에 수술을 주었을 때도 큰 자극이 되긴 했지만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자존심이 무참히 뭉개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표정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직은 잘 모르기에 타격이 더 컸다.
수술실을 나가는 이준영 과장을 보며 신현수가 눈빛을 굳혔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문득 새카맣게 타고도 힘차게 외치던 김지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준영 과장에게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더 강했다.
신현수가 최대한 목소리를 높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 교수 말대로 신현수도 가르칠 만한 놈이군.’
이준영 과장이 수술 방을 나서며 피식 웃었다.
***
서울 병원에 근무하는 3명의 2년차가 모두 고민에 빠졌다. 신현수와 손일석은 왜 타는지, 어떻게 타는 걸 면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지만 김지훈은 달랐다.
몸은 점점 좋아져 내일이면 근무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차라리 몸이 아픈 것이 나았다.
‘과장님이 날 찍은 이유가 뭐지?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 일석이 말대로 음성을 가게 된 이유가 단지 찍힌 것 때문이라면 인턴 때 일이란 말인데.’
기억나는 한 인턴 때의 기억을 모두 되살려 봤다.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금경태 과장에게 혼난 적도 없었고, 일반 외과를 돌 때 자주 본 것도 아니었다. 뛰어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래야 수많은 인턴 중 한 명이었을 뿐이었다.
근무를 하며 특별한 일도 없었다. 굳이 찾는다면 장례식장 문제가 예외적이긴 했다.
‘과장님과 장례식장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가끔은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람이 그냥 싫을 수도 있었다. 특징적인 말투나 행동이 유달리 싫어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지훈에게 그런 면은 없었다. 더구나 과장과 인턴, 혹은 전공의의 관계일 뿐이었다. 아끼고 기대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이유 없이 미워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승님이나 이혁민 선생님께 물어볼까? 아니지. 그분들도 모른다면 공연히 신경만 쓰이게 할 텐데.’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최철한이나 유석재가 조금은 더 아는 것 같았지만 그래야 전공의였다. 자신이 자는 줄 알고 했던 말들이 다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확한 이유를 알고 있는지도 불확실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고민에 잠겼던 김지훈이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앉아 있은 지 고작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무척 피곤했다. 잠을 청하려 애를 썼지만 좀처럼 혼란이 가라앉지 않았다. 간만에 샤워를 했지만 머릿속은 개운해지지 않았다.
밤새 뒤척였다.
창문이 밝아 올 무렵, 새 옷을 입고 깨끗한 가운을 꺼내 입었다. 잠시 창밖을 내다보던 김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활기찬 새벽이었다. 저마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김지훈이 중얼거렸다.
“후우! 일단 일부터 하자. 찍혔다고 전문의가 못 되는 것도 아니고, 꿈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일부러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 중환자실 환자부터 살핀 후 병동으로 가자 간호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김지훈 선생님, 괜찮아요? 더 쉬지 않아도 돼요?”
“아유! 정말 많이 아팠나 봐요. 얼굴이 반쪽이 됐네. 이젠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이준영 선생님 아직 안 올라오셨죠?”
“네. 아직 일곱 시도 안 됐어요.”
간호사들의 모습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김지훈이 차트를 모았다. 빨간 볼펜을 척 빼 들고는 빙빙 돌렸다. 드레싱을 마치고 온 서도진이 반가워하다 말고 멈칫거렸다.
“도진아, 차팅 잘했지?”
“예, 선생님. 몸은 괜찮으세요?”
“괜찮아. 차트는 이따 저녁에 찬찬히 보자.”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차트를 한쪽으로 밀고 이준영 과장의 환자 차트만 모았다. 신현수가 환자 상태에 대한 기록을 할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부지런히 간호사 기록과 바이탈 기록지 등을 본 후 회진을 돌았다. 불과 사흘 만인데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환자들이 웃으며 반겨 준 덕에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그동안 별일 없으셨죠?”
“그럼요. 많이 아프셨다면서 괜찮으세요?”
“환자분이 절 걱정하시니까 이상하네요. 감사합니다.”
스테이션으로 돌아와 환자 상태를 기록하던 김지훈이 엘리베이터 열리는 소리에 매무새를 살폈다.
이준영 과장이 뚜벅뚜벅 걸어와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선생님.”
별다른 말 없이 차트를 펼친 이준영 과장이 잠시 고민을 했다. 지난 이틀 동안의 환자 기록이 없었다. 그나마 김지훈이 방금 전에 적은 기록뿐이었다.
‘신현수 그놈도 확실히 아까운 놈인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수술만 잘한다고 훌륭한 외과 의사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 주어야 하나?’
“회진 돌자.”
인턴이 급히 달려와 안내를 했다. 함께 회진을 돌며 환자 상태를 보고하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운지 김지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물론 이준영 과장은 지금도 표정이 없었다.
회진 중간에 신현수와 마주쳤다. 이준영 과장이 인턴에게 차트 하나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신현수에게 텅 빈 기록지를 펼쳐 보였다.
“신현수, 기본이 뭔지 몰라?”
딱 한마디 던지고는 다시 회진을 돌았다.
중환자실 환자를 살피던 이준영 과장이 많은 질문을 했다.
무엇을 알아야 하고, 해야 할지 익히 아는 김지훈이 막힘없이 대답을 했다. 이준영 과장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서렸다 사라졌다.
‘어젯밤까지 아팠던 놈이 그새 환자 파악을 마쳤어? 김지훈, 넌 확실히 누가 봐도 욕심을 낼 놈이야.’
응급실까지 쫓아온 김지훈이 힘차게 외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이준영 과장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직실로 들어가 퇴근 준비를 했다.
응급실 간호사들이 우 몰려나와 김지훈에게 몸은 어떤지 물었다. 고맙기만 했다. 병동으로 올라가며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해야 했다.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의 회진까지 모두 마쳤다.
모두들 등을 두드리며 웃어 주었다. 최철한과 유석재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안도하는 눈빛을 보였다. 일할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이 아니라, 김지훈이 별문제 없이 회복됐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사이 금경태 과장을 보았지만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눈빛은 여전히 냉랭하기만 했다. 잠깐 정신이 쏠렸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잡념을 내쫓았다.
신현수와 손일석이 많이 도와주었지만 밀린 일이 많았다.
하루 종일 뛰어다니며 모든 일을 마쳤다. 아직은 체력이 달리는 데다 일에 집중한 덕인지 그동안은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오후가 지나 한가해지자 또다시 심란해졌다.
‘경아 씨랑 있으면 나아질까?’
오늘은 주중 하루뿐인 오프 날이었다. 잠시 틈을 내 고경아와 저녁 약속을 했다.
김지훈이 오프를 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병원을 나왔다. 고경아를 만난 후 바로 택시를 타고 종로로 향했다. 먹자골목에 도착해 지난 사흘간 못 먹은 것을 모두 보충이라도 할 것처럼 엄청나게 먹어 댔다.
술 한 잔이 고팠지만 고경아가 쌍심지를 켰다.
“지훈 씨, 어제까지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무슨 술이에요.”
맞는 말이었다. 금경태 과장과의 문제로 심난하지 않았다면 술 생각은 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 고경아가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김지훈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지만 머릿속에서는 자꾸 금경태 과장이 맴돌았다. 집중이 되질 않았다. 마침내 안색까지 점점 어두워지자 고경아가 걱정을 하며 병원으로 돌아가 쉬라고 했다.
“미안해요, 경아 씨.”
“미안하긴요. 이제 막 일어난 지훈 씨하고 종로까지 온 제가 잘못한 거죠. 빨리 들어가 쉬세요.”
내심 무척이나 미안했지만 또 다른 걱정거리를 줄 수는 없었다. 다음번에는 웃는 얼굴로 만나기 위해서라도 빨리 정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숙소에 들어선 김지훈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결국 맥주 두 캔을 마시고 나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그 정도에 취하다니 몸이 아팠긴 아팠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