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50화 (250/1,329)

제1화 가끔은 아파도 좋을까? (3)

응급실로 돌아온 이준영 과장이 신현수를 뒤에 세우고 환자를 보았다. 세세한 질문과 함께 신중하게 진찰을 한 후, 수술을 결정했다.

수술 스케줄을 작성하는 서도진을 보던 신현수의 얼굴이 벌게졌다. 김지훈이 환자에게 지나칠 정도로 시간을 쏟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준영 과장도 똑같았다.

‘저렇게 노련한 선생님도 나보다 더 환자를 자세히 보고 진찰을 하다니, 자만이었어. 김지훈이 옳았던 거야.’

지난 세월이 아까울 정도로 후회가 몰려왔다. 스스로도 이유를 알지 못할 정도로 급격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신현수가 수술을 준비하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그렇게 많이 보았고, 퍼스트나 수술을 한 횟수도 세기 힘든 아뻬였다. 그런데 이준영 과장이 메스를 드는 순간 긴장이 극에 달해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두려움과 기대가 교차했다.

‘뭐라고 하실까? 그동안 제대로 해 온 걸까? 자신을 갖자. 나만큼 뛰어난 전공의는 없어.’

배가 열리고 아뻬를 찾던 이준영 과장의 눈빛이 번쩍였다.

“신현수, 너 1년차 때 뭐 배웠어?

“예,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인지.”

“지금 니가 수술해?”

당황한 신현수가 꼼짝도 못했다.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해 왔고, 무엇을 지적하는지조차 몰랐다.

“멍청하게 서서 뭐 해? 수술은 진행해야 할 거 아냐? 퍼스트도 제대로 못 서는 놈이 무슨 2년차야.”

아뻬가 제거되고 마무리에 들어갔지만 이준영 과장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교수가 널 과대평가한 것 같다. 그동안 뭐 배웠어? 아뻬는 해 봤을 거 아냐?”

“예, 해 봤습니다.”

“쯧쯧! 기본도 못 갖춘 놈이 집도를 했어?”

가슴을 후벼 파다 못해 갈기갈기 찢었다.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던 신현수였기에 충격이 더 컸다.

급기야 이를 악물고 이준영 과장의 손에 보조를 맞추던 신현수의 다리까지 풀렸다. 수술을 끝내고 나가던 이준영 과장이 던진 말 때문이었다.

“너 아버지가 이사장님이시지?”

“예, 그렇습니다.”

“일반 외과 의사가 만만해 보여? 그 덕을 봤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해. 최소한 아버지 얼굴에 먹칠은 하지 마라.”

얼굴이 시뻘게진 신현수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

“선생님, 제가 잘못한 게 뭡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기본이라고 했잖아. 니 마음대로 하지 말고 똑바로 해.”

이준영 과장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는 듯 그대로 나갔다. 얼음처럼 굳은 신현수를 보며 수술을 들어왔던 안호석이 눈치만 보았다. 한참 만에야 말없이 함께 환자를 옮기던 신현수가 입을 열었다.

“호석아, 그동안 지훈이도 이렇게 탔어?”

“예, 선생님.”

“누가 더 심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아?”

안호석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비슷하신 것 같은데요.”

신현수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허탈하면서 화까지 났지만, 이상하게도 김지훈 역시 똑같이 탔다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욕을 먹었는데 왜 속이 후련하지? 내가 놓친 기본이 무엇일까? 선생님, 저 아버지 믿고 일반 외과 의사 하려는 거 아닙니다. 두고 보십시오.’

오더를 확인하던 신현수가 아뻬 오더 하나 못 낸다고 안호석을 호되게 태웠다. 쩔쩔매는 안호석을 보던 신현수가 문득 송재덕 과장의 말들을 떠올렸다.

‘수술은 함께하는 거라고 하셨나?’

마치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뭔가 가물가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이준영 과장에게 다시 한 번 탄다면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급 수술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준영 과장에게 탈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이준영 과장의 수술하는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타고 태우며, 가르치고 배우고.

그것이 트레이닝 속에 숨겨진 속살일지도 몰랐다.

다음 날, 최철한과 유석재가 아침 일찌감치 김지훈을 찾았다. 혈색은 나아졌지만 일을 하기에는 여전히 무리였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손일석이 내심 만세를 불렀다.

‘지훈아, 니가 아픈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알지? 서운해하지 마라. 니가 나한테 너그럽게 신기동 선생님 수술을 볼 기회를 준 거야. 고맙다, 지훈아.’

하루 종일 일에 지치면서도 손일석이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내 수술 방으로 내려갔을 때는 기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우연히 마주친 김진호와 윤서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일석아, 너 오늘 좋은 일 있냐? 얼굴이 완전히 붕 떴다.”

“예, 김진호 선생님. 그럴 일이 있습니다. 서연아, 좋은 날이야.”

“너 정말 오늘 이상하다. 근데 지훈이는 많이 아파?”

“그 자식, 완전히 뻗었어. 오프도 없이 그렇게 힘들게 일을 했으니 버티겠냐. 그래서 이 몸이 오늘 신기동 선생님 수술을 대신 들어가기 위해 온 거 아니겠어.”

윤서연이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하면서도 입을 삐죽였다.

“넌 제일 친한 친군데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럴 리가! 지훈이가 얼마나 아픈지 생각을 할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려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은 웃고 있었다. 수술을 할 환자가 내려오자 아예 콧노래를 불렀다. 윤서연이 손일석을 힐끗 째려보며 뭐라고 하자 김진호가 웃었다.

“저 자식도 천상 써전이네. 그동안 수술 방에 들어올 때마다 신기동 선생님 수술하는 모습을 기웃거린 이유가 있었어. 혈관 수술에 꽂힌 모양이다. 그나저나 지훈이가 빨리 일어나야 할 텐데. 대성이도 걱정을 많이 하고 말이야. 자식! 가만히 보면 인덕이 꽤 있어.”

역시 지난 4년 동안 외과 의사들을 봐 온 김진호의 눈은 예리하고도 매서웠다.

수술실에 들어선 손일석이 어깨를 젖히며 몸을 풀었다. 혈관 수술 담당은 아직도 고경아였다. 손일석이 마치 김지훈이 아파 마지못해 들어온 것처럼 표정 관리를 하며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고경아가 아는 한 성심껏 대답을 하자, 손일석이 귀중한 정보를 얻었다는 듯 돌아서며 슬며시 웃었다.

곧 신기동 교수가 들어왔다. 손일석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수술이 시작됐다. 피부를 절개하고 동맥과 정맥을 확인하기도 전이었다. 신기동 교수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손일석, 해부학 책은 봤어?”

“예? 해부학 책이라니요?”

“이 자식 봐라. 너 지금 수술 날로 먹으려는 거야? 아니면 오늘만 들어오면 되니까 대충 해도 된다는 생각이야? 준비를 해야 할 거 아냐. 손만 따라오는 게 니 역할이야? 대가리 속에 들은 게 없는데 수술을 어떻게 해?”

속사포처럼 터지는 신기동 교수의 질책에 손일석의 얼굴이 시커메졌다. 회식 때 보았던 신기동 교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상당히 탈 것이란 각오는 했지만, 보는 것과 직접 당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공부하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환자 죽은 다음에 잘못했다고 할래? 배울 생각이 있는 놈이 이따위로 해. 김지훈이 말도 못할 정도로 아파? 최소한 알아야 할 것은 물어보고 와야 할 거 아냐.”

하얗게 재가 되도록 탄 손일석의 몸이 푸스스 무너졌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넉살 좋기로 유명한 손일석이었다. 그만큼 정신력이 강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불끈 주먹을 쥐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수술이 끝나고 다음 환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손일석이 부리나케 해부학 책을 가져왔다. 열심히 손목을 통과하는 동맥과 정맥의 구조와 주행 경로를 찾았다.

다음 수술이 이어졌다.

나름 신기동 교수의 지적을 예상하며 퍼스트를 서던 손일석이 다시 무너졌다. 동맥과 정맥에 관한 것은 물어보지도 않고, 손목을 지나가는 신경에 대해 물어볼 줄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솔직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거기까지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신기동 교수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술이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손일석에게는 초조하고 불안한 시간이었다. 환자가 수술실에서 나가고 나서야 신기동 교수가 입을 열었다.

“휴우! 국소마취는 이래서 나빠. 환자가 멀쩡히 듣고 있는데 연달아 혼을 낼 수도 없고 말이야. 손일석, 니가 아주 혈관 수술을 같잖게 생각했구나. 이 환자 들어오는 데까지 십 분이 넘게 걸렸어. 그동안 놀았지?”

“아닙니다, 선생님. 나름 준비를 했습니다.”

“그게 이 모양이냐? 어이구! 내가 차라리 돌하고 수술을 하지. 다음 수술에 또 들어올 거야?”

“예. 기회만 주십시오.”

손일석의 진지한 태도에 신기동 교수가 눈에 힘을 주었다.

“혈관 수술을 배우고 싶다고 한 놈은 너야. 난 가르쳐 준다고 한 적이 없어. 이따위로 하면 앞으로는 기대도 안 한다. 최소한 노력한 흔적은 보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생님.”

“기본을 잊지 마. 똑바로 해라.”

같은 트레이닝을 받아서 그럴까?

이준영 과장과 신기동 교수가 똑같은 말을 강조했다.

이를 명심하고 말고는 순전히 배우는 사람의 자세와 정신 상태에 달린 일이었다.

신기동 교수가 나가자 손일석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고경아를 보았다.

“제… 아니, 고 간호사, 지훈이는 좀 낫죠?”

고경아가 고개를 저었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만날 혼나요.”

“어이쿠! 그럼 이게 몇 번으로 끝날 일이 아니네요. 죽었다고 생각해야겠네.”

고경아가 슬쩍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김지훈 선생님은 지금 어떠세요?”

손일석이 피식 웃었다.

“미안하네요. 우리 생활이 근무 끝날 때까지는 숙소 올라가기도 힘든 거 알잖아요. 지훈이가 없으니까 시간이 더 없어요. 그래도 소식이 없는 거 보니까 죽진 않았을 겁니다. 어이쿠! 올라가야겠다.”

시계를 본 손일석이 깜짝 놀라며 부랴부랴 수술실을 나갔다. 고경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직한 한숨만 내쉬었다. 보온 도시락이라지만 죽과 콩나물국이 다 식었을 것이다.

‘지훈 씨가 먹을 만하고 영양가 있는 게 뭐가 있지?’

고경아가 이준영 과장이 전화해 주기만을 바랐다.

그날 밤, 일과를 마친 손일석이 숙소로 올라갔다. 오프였지만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논문도 뒤로 미루고 김지훈에게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물어볼 참이었다. 그런데 당직인 신현수도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현수야, 너 오늘 당직이잖아.”

“너하고 지훈이한테 할 말이 있어서.”

“나한테? 뭔데?”

“오늘 응급실 당직 내가 서자. 혹시 과장님이 물어보면 오프 바꿨다고 해 줘. 넌 어차피 혈관 수술 배우고 싶다고 했잖아.”

“그게 과장님에게 통할까? 나까지 날아가는 거 아니냐?”

손일석이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일을 대비한 거야. 넌 그냥 오프 바꿨다고만 해. 어차피 지훈이 일어날 때까지는 내가 응급실 맡기로 했잖아. 다음이 문제지.”

“그럼 뭐, 나야 큰 상관 없는데… 너 심하게 탔지?”

“뭐? 타긴 뭘 타.”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인마. 난 신기동 산생님한테 타고, 넌 이준영 선생님한테 타고. 그래서 우리 둘이 어떻게든 이유를 알려 지훈이를 찾아가는 거고. 어때? 내 말이 딱 맞지.”

신현수가 입술을 모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곧 숙소에 들어선 손일석과 신현수가 흠칫 놀라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이준영 과장이 나오고 있었다.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한 이준영 과장이 사라지자 부리나케 숙소로 들어갔다. 신현수의 눈에 초조한 기색이 스쳤다.

‘김지훈이 걱정되셔서 올라오신 거겠지?’

김지훈이 야채 죽과 뜨거운 콩나물국을 먹고 있었다. 그릇들이 거의 바닥을 보였다. 시뻘게진 얼굴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식은땀이 아니었다. 식욕을 되찾고 땀을 흘린다는 것은 몸이 회복되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