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49화 (249/1,329)

제1화 가끔은 아파도 좋을까? (2)

아무래도 이상한 모양이었다.

“김지훈 안 내려왔어요?”

“네. 안 그래도 손일석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지금 많이 아프시데요. 그리고 오상익 선생님 회진 때문에 못 내려와서 죄송하다고 말씀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이준영 과장의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일을 못할 정도로 아프다고?”

“저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몸살감기가 되게 심하게 온 것 같다고 들었어요. 오늘 하루 종일 안 보이시던데요.”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거야.’

은근히 걱정이 된 이준영 과장이 병동으로 올라가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김지훈 대신 신현수가 달려왔다.

“김지훈은?”

“예, 선생님. 지훈이가 몸이 많이 안 좋아 숙소에서 쉬고 있습니다. 회복될 때까지 제가 대신 선생님 파트를 돌게 됐습니다.”

“니가? 알았다. 회진 돌자.”

회진을 도는 내내 이준영 과장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얼굴이 아예 험상궂게 보일 정도였다.

신현수가 바짝 긴장을 했다. 중환자실 환자를 볼 때는 예리하면서도 날카로운 물음에 땀을 흘려야 했다. 정규 일과 때문에 환자 파악이 확실히 안 된 탓이었다.

이준영 과장의 얼굴이 굳었다.

“신현수, 듣던 거하고 다르다.”

“예, 선생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응급실에 환자 오면 내 결정이 나기 전에는 스케줄도 작성하지 마.”

신현수가 흠칫 놀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준영 과장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회진을 끝냈다. 응급실로 향하는 뒷모습에서 찬바람이 휭휭 불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그때 문득 김지훈이 지나가는 것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실수하거나 잘못하면 완전히 재가 될 때까지 타. 특히 환자 파악이 안 됐잖아? 그럼 죽었다고 생각하면 돼.’

“환자 파악!”

핑계고 뭐고 필요 없었다. 하루를 돌든, 단 한 시간을 맡든 환자 파악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신현수가 부리나케 중환자실로 달려가 차트부터 집었다.

응급실로 돌아온 이준영 과장이 당직실로 향하다 말고 다시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당직 간호사들이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간호사, 수술 방에 고경아 간호사라고 있어요. 미안하지만, 전주에 수술한 환자 때문에 물어볼 게 있으니까 수술 방에 연락해서 고경아 간호사하고 연결 좀 해 줘요.”

“네, 과장님.”

간호사들이 급히 전화를 걸어 연락처를 알아냈다.

잠시 후, 당직실 전화벨이 울렸다.

“고 간호사?”

(네,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고경아의 목소리가 영 좋지 못했다.

“지훈이 아프다는 말 들었지?”

(네. 정말 많이 아픈가 봐요. 어떻게 하죠?)

“젊은 놈인데 무슨 걱정이야? 오늘 별일 없으면 죽하고 콩나물국 얼큰하게 끓여서 아홉 시까지 응급실 앞으로 와. 고춧가루 많이 넣고. 그게 몸살에는 즉효야.”

(선생님께서 전해 주시게요?)

이준영 과장이 입맛을 다셨다.

자신이 김지훈을 찾아가는 것은 일을 핑계로 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경아가 전공의 숙소에 올라가는 것은 상당히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일단 늦지 않게 준비해서 와.”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이준영 과장이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음성에서 그렇게 일을 하고도 버틴 놈이 일어나지도 못해? 확실히 무리야. 이 교수가 해결을 했을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잠시 후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들어왔다. 금경태 과장과 회의를 한 결과를 전해 들은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금경태가 일을 그렇게 처리하다니 초조한 모양이군.”

“지금이라도 과장님답게 처신하시면 더 좋은 결과를 얻으실 텐데 안타깝습니다.”

“나는 물론 이 교수와 신 교수까지 모두 걸림돌이라고 생각할 텐데 그게 될까? 우리는 욕심내지 말자고. 주어진 일 열심히 하고, 제자들 잘 키우면 그것으로 족하잖아.”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신현수가 오프일 때 일주일에 하루는 김지훈 대신 당직을 서기로 했습니다. 잘 가르쳐 주십시오.”

“이 교수가 지훈이 못지않다고 인정을 한 놈인데 확실하게 가르쳐야지. 신 교수, 일석이하고 수술하면 괜찮을 것 같네. 재밌는 놈이던데.”

“어휴! 선생님, 왜 자꾸 저를 손일석하고 엮으려고 하십니까. 저 아직 김지훈 포기 안 했습니다.”

“다 제자들인데 차별하는 거 아냐.”

신기동 교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선생님, 지금 저한테 하신 말씀이십니까? 그러면 지훈이도…….”

“신 교수, 어디든 예외는 있는 법이잖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퇴근들 해. 나 피곤하다.”

이준영 과장이 아예 눈길을 돌렸다. 김지훈을 언급하자마자 단박에 말이 잘린 신기동 교수가 ‘끙’ 소리를 내며 입맛만 다셨다. 이혁민 교수도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내는 말도 못 꺼내네.’

“신 교수, 피곤하시다는데 가자구. 참! 지훈이 그놈 안 보실 겁니까? 얼굴이 말이 아닙니다.”

“젊은 놈인데 내일이면 일어나겠지. 우린 그보다 더 힘들게 일했어도 까딱없었는데, 요새 애들은 체력이 약해서 문제야.”

진담인지, 지나가는 말인지 모를 일이었다.

당직실을 나가던 신기동 교수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미국 연수를 다녀오기 전에는 금경태 과장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동안의 변화라면 자신과 이준영 과장뿐이었다.

“선생님, 혹시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과장님과 예전에 우리가 모르는 일이 있으셨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전과는 다르게 과장님이 상당히 과민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해서라도 오늘처럼 일을 처리할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난 그런 일 없어.”

사실 송재덕 과장까지 5명의 교수들이 선후배로 트레이닝을 받는 동안 큰 소리나 싸움 한번 난 적이 없었다. 이혁민 교수도 가끔은 같은 생각을 했지만 이준영 과장의 말처럼 그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었다.

잠시 이준영 과장을 보던 이혁민 교수가 신기동 교수에게 눈짓을 하며 퇴근을 했다.

이준영 과장이 문득 피곤을 느꼈는지 눈가를 비볐다.

‘신 교수 말이 맞을 수도 있어. 내가 금경태에게 잘못한 일이라도 있었을까? 하지만 사람 좋기로 유명했던 송재덕 선생님하고는 정말 아무 일이 없었을 텐데.’

잠시 고민에 잠겼던 이준영 과장이 툭하면 시계를 보았다.

9시 정각을 알리는 순간 당직실을 나선 이준영 과장이 한참 환자를 보고 있는 신현수와 손일석을 보았다. 그 옆에 피골이 상접한 서도진이 서 있었다.

“신현수, 환자 있어?”

“예. 아뻬가 의심되는 환자가 있습니다, 선생님.”

“삼십 분 후에 올 테니까 검사 결과 다 챙겨 놔. 스케줄은 준비하지 마.”

무뚝뚝한 말을 던지고 응급실을 나가는 이준영 과장을 보며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뻬 환잔데 스케줄을 준비하지 말라니, 무슨 소리야? 설마 우리를 1년차로 착각하시나?”

신현수의 표정이 묘했다.

실망하는 것 같으면서도 기대하는 눈빛이랄까?

“중환자실 환자 파악 제대로 못했다고 찍혔다.”

“중환자실 환자? 너 회진 오늘 저녁에 돈 게 처음이잖아.”

“맞는 말씀이야. 내가 잘못한 거야. 너도 나처럼 깨지지 말고 신기동 선생님 수술 준비 잘해라.”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중환자실 환자를 다시 파악하며, 그동안 스스로 이 정도면 됐다고 한 일들에 수많은 허점과 구멍이 있다고 느꼈다.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던 일들이었다. 신현수가 눈빛을 굳히며 아뻬 환자는 제대로 파악했는지 다시 확인했다.

손일석이 의아한 눈으로 서도진을 보았다.

“도진아, 지금 현수가 내 걱정한 거 맞지?”

“예? 뭐라고 하셨는데요?”

“에이! 이 자식이 그새 또 졸았네. 너 이래 가지고 제대로 일하겠어. 난 백 일 당직 때 끝나는 날까지 펄펄 날았어, 인마. 빠져 가지고. 지훈이한테 걸렸으면 넌 벌써 죽었다.”

손일석이 정말 그랬을까?

서도진이 애꿎은 핀잔을 먹었다.

이준영 과장이 걱정이 가득한 고경아를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가고 싶었지만 혼자 올라가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를 떠나 늦은 밤에 총각들이 바글바글한 숙소에 처녀가 들어서는 모습이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고 간호사, 이제 이름 부르자. 간호사라고 부르려니까 불편하다. 그래도 되지?”

뜬금없는 소리에 고경아가 손을 조몰락거렸다.

나이가 어려서도 아니고, 간호사라고 해서 하는 말도 아닌 특별한 친근감이었다. 비록 김지훈 때문이긴 했지만, 그 마음이 고맙고 행복한지 입가에 조그만 미소가 피었다.

“네, 선생님.”

“그리고 나 혼자 올라갈게. 김지훈이 네 마음은 알 거야.”

고경아가 조용히 몇 가지 말을 전하며 국과 죽이 든 가방을 건넸다.

‘지훈 씨, 많이 아파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투정만 부렸네요. 미안해요. 빨리 힘내서 일어나요. 계속 아프면 나 울지도 몰라요.’

걱정이 가득한 고경아를 보던 이준영 과장이 가방을 들고 본관 맨 위층에 있는 2년차들 숙소로 향했다. 조그만 휴게실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던 다른 과 전공의들이 이준영 과장을 보자 벌떡벌떡 일어났다.

“일반 외과 2년차 숙소가 어디야?”

“예. 저쪽 끝 방입니다.”

설마 김지훈이 아프다고 보러 온 것일까?

이미 무뚝뚝하다는 소문이 쫙 돌았다. 여기저기서 의아해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힐끗 이준영 과장이 뒤돌아보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준영 과장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김지훈이 눈도 뜨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하얀 형광등 불빛에 창백한 얼굴이 하얗게 탈색돼 보였다. 바짝 마른 입술이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이준영 과장이 조용히 서서 김지훈을 바라보다 혀를 찼다. 그 소리에 눈을 뜬 김지훈이 형광등 불빛에 얼굴을 찡그렸다.

“김지훈, 밥 먹고 자자.”

아주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아직도 통증을 호소하는 몸과 멍한 머리에 멍청하게 이준영 과장을 보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고경아가 만든 거다. 이거 먹고 빨리 일어나.”

이준영 과장이 고경아의 이름을 불렀지만 정신이 없는지 김지훈이 눈만 껌뻑거렸다.

이준영 과장이 보온 도시락을 열었다. 하얀 죽과 시뻘건 콩나물국이 뜨거운 김을 쏟아 냈다.

“몸살엔 이게 즉효다.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다 먹어.”

“고맙습니다.”

김지훈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준영 과장이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젊은 놈이 이게 뭐야? 어서 먹어.”

“예, 선생님. 감사합니다.”

하얀 죽 한 숟갈에 콧물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매운 콩나물국을 먹었다. 고경아의 마음과 정성이 배어 있었다.

이준영 과장은 들어온 자세 그대로 서 있었지만, 그 마음을 모를 수는 없었다.

눈물이 났다. 괜히 가슴이 시려 와 어깨를 들썩이고 말았다. 콩나물국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다시 삼켰다.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겼던 그리움과 아련함이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올까?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울음을 꾹꾹 집어삼키며 매운 콩나물국을 모두 비웠다.

이준영 과장이 콧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환자 걱정은 말고 이틀 정도 더 쉬어.”

김지훈이 일어나려 하자 이준영 과장이 혀를 찼다.

“일어나지 마. 그리고 고경아가 형부하고 언니, 또 누구라더라. 하여간 그 사람들이 안부 전해 달란다고 하더라.”

이준영 과장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무뚝뚝하면서도 굵은 목소리만이 남았다.

“이번 한 번만 봐준다. 다신 아프지 마.”

‘감사합니다, 선생님.’

김지훈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주책없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런데 행복했다. 그리운 이들이 떠난 후 항상 혼자라는 느낌이 들곤 했었다. 그런데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사랑해요, 경아 씨.’

그중에서도 고경아가 가장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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