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48화 (248/1,329)

제1화 가끔은 아파도 좋을까? (1)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병원 내 정치에는 무관심했던 이혁민 교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도 무서운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 앞에서는 다들 입에 담기 꺼려하는 정갑수 문제를 거론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하고도 남았다.

‘우리의 권위가 추락하는 만큼 당신의 권위도 추락할 겁니다. 새판을 짜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 속에 야망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금경태 과장에게는 최악의 일이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스스로 이익을 향해 달려가지만, 욕심이 없는 사람은 어떤 방법을 써도 손안에 쥘 수 없기 때문이다.

금경태 과장이 끓어오르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최철한과 유석재는 예외적인 경우였지만, 그동안 실력이 있는 전공의는 절대 다른 파트를 돌지 못하게 했다. 과장이 된 이래 지금까지 철저하게 단속을 해 온 일이었다.

이는 암묵적인 규칙이었고, 외과 의사라면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또한 병원에 남고자 한다면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원칙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눈 밖에 나면 아무리 용을 써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혁민, 설마 신현수가 다른 파트를 돌 거란 생각을 하는 거야? 신현수는 누구보다도 날 잘 아는 놈이야. 욕심이 많은 만큼 내 뜻을 어기는 일은 생각도 못할 거란 말이지. 웃기는군.’

그동안 들인 공과 신현수의 성향을 생각한다면 감히 자신의 의중에 반하는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손일석이 하게 될 일이었다. 정갑수까지 거론된 마당에 마냥 반대를 할 수도 없었다.

금경태 과장이 입가를 말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피한 일이지만, 이 교수 말대로 하지. 그리고 병원 일이라는 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야. 언젠가는 자네도 과장을 해야 할 텐데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마.”

금경태 과장의 목소리가 도리어 나직하면서도 침착해졌다.

신기동 교수가 얼굴만 찡그린 채 입을 열지 못했다.

‘이 교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직은 빨라. 정갑수 일을 함부로 꺼내다간 역으로 자네가 당할 수 있어. 그리고 신현수와 손일석이 우리 뜻을 따른다는 보장도 없잖아.’

잠시 후, 연락을 받은 신현수와 손일석이 들어왔다.

이혁민 교수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짐짓 김지훈의 상태를 모르는 것처럼 물었다.

“최철한에게 들으니까 김지훈이 이삼 일 정도 일을 못한다고? 그 정도로 많이 아프나?”

“예, 선생님.”

“그래. 그놈이 꾀병을 부릴 놈이 아니지. 그런데 말이야. 그동안 대신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 2년차 일에 문제가 생겼으니까 너희들이 대신해야 되겠어. 경우에 따라서는 앞으로도 쭉 일을 나눠서 할 수도 있고. 할 수 있겠나?”

오상익 교수 파트의 일도 많았지만 손일석에게는 바라 마지않던 기회였다. 게다가 금경태 과장과 오상익 교수까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결정된다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김지훈에게도 정말 유리한 일이었다.

손일석이 숨도 쉬지 않고 대답을 했다.

“예, 할 수 있습니다. 저희 셋이 일을 나눈다면 큰 무리가 따를 것 같지도 않습니다.”

손일석의 말에 이혁민 교수가 슬쩍 오상익 교수를 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눈치였다.

오상익 교수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맙다. 신현수 너는 어떻게 생각해?”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금경태 과장이 전공의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인턴을 돌 때 이미 들었다.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장은 이사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보호를 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냥 지나갈 사람이 아니었다. 단 한 번이라도 수술을 할 기회가 줄어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른 파트로는 절대 안 보내는 분인데 어떻게 해야 하지? 아버지가 이사장이라고 해도 당분간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이번은 정말 좋은 기회야.’

잠시 주저하던 신현수가 손일석을 보았다.

‘현수야, 신기동 선생님 수술은 내 거다.’

김지훈 대신 일을 하겠다는 열정이 보였다. 김지훈과 친해서만은 아니었다.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손일석의 내심을 확실히 모르는 신현수에겐 중대한 기로였다.

만약 손일석이 응급실 근무를 먼저 자청하면 이준영 과장에게 배울 기회가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자칫 다음 텀에서도 손일석이 이혁민 교수 파트를 돌 수 있었다.

금경태 과장의 품에서 안주할지, 아니면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 이준영 과장에게 배울 기회를 하루라도 빨리 잡을지 결정해야 했다.

김지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가면 진다. 이혁민 선생님이나 신기동 선생님은 내 아버님이 누구인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분들이야. 지금 미루면 다음에는 아예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신현수가 입술을 꽉 깨물며 결정을 내렸다. 지난번처럼 손일석에게 선수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제가 응급실 파트를 돌겠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신현수의 입이 열리자 깜짝 놀라던 손일석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걸렸다.

“그럼 제가 신기동 선생님 수술을 들어가겠습니다.”

“흐음! 그렇게 할래. 과장님, 2년차들이 알아서 잘 선택한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김지훈이 회복될 때까지는 이렇게 돌리겠습니다. 2년차들이 이렇게 흔쾌히 일을 나누겠다고 하는데,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까요?”

‘신현수, 네가 이준영 파트를 돌겠다고?’

금경태 과장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간 알게 모르게 이준영 과장을 상당히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여러 번 표현했다. 눈치가 있다면 신기동 교수를 택했어야 했다. 최소한 누가 더 자신의 앞날에 중요한지를 생각했어야 했다. 어쩌면 이삼 일이라는 짧은 시간이 신현수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하게 했을지도 몰랐다.

“신현수, 김지훈이 회복되고 난 후에도 추가 근무를 하겠다는 거야? 파트 일은 어쩌고?”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신현수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금경태 과장의 표정이 너무 좋지 못했다.

이혁민 교수가 눈빛을 굳혔다.

한꺼번에 너무 밀어붙이면 금경태 과장은 도리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뒤집어엎을 수도 있었다.

“과장님, 그러면 어차피 주말 오프는 똑같이 가니까 김지훈에게 주중 오프만 한 번 더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쉴 시간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중 오프를? 신현수가 응급실을 돈다고 자청을 했지만 당직일 때 일을 해야 할 텐데, 병동이나 중환자실은 어떻게 하고?”

신현수가 눈빛을 굳혔다. 김지훈이 쓰러질 정도로 일을 한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절대로 질 수 없었다. 필요하다면 당연히 자신도 쓰러질 각오를 하고 배워야 했다.

“제가 오프 때 응급실 근무를 서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에 절대 지장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오프까지 반납하겠다는 말에 금경태 과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꼴이었다. 슬슬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눌렀다.

교수들과 2년차들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공의 배치 문제도 자신이 만든 그간의 관례였을 뿐 막을 명분이 없었다.

‘오프를 안 가겠다? 말 잘했어. 안 보내면 되겠군. 이준영에게 절대 널 보낼 수는 없지. 그놈에게는 더 이상 어떤 기회도 주어서는 안 돼.’

오프를 가라 말라 할 수도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자칫 김지훈을 못마땅해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날 상황이었다. 아니면 이준영 과장에 대한 자신의 속마음이 드러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좋아, 신현수. 네가 그 정도까지 각오를 했다면 달리 반대할 이유가 없지. 열심히 해 봐.”

금경태 과장이 뜻밖에도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다소 의외였지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과정상 모양새는 나빴어도 어쨌든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상익 교수가 일어나며 손일석을 보았다.

“우리 파트 일 소홀히 하면 안 돼.”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신 교수, 우리 파트 수술이 먼저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가르쳐 주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교수들이 모두 의국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금경태 과장이 으스러지게 주먹을 쥐며 이를 갈았다. 분노로 가득 찬 두 눈이 이글거렸다.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일반 외과 전체로 볼 때 김지훈이 일을 못하는 것은 극히 사소한 일이었다. 원칙을 따질 것도 없었다. 가장 한가한 3년차에게 오더만 내리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랬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금경태 과장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준영 과장과 신기동 교수에 대한 두려움과 견제.

신현수에 대한 그릇된 욕심.

과장이라는 직함이 갖는 권위에 대한 잘못된 확신.

그 모든 것이 원인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 때문에 자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있던 껍질이 한 꺼풀 벗겨졌다.

금경태 과장이 스스로 벼랑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과도하고 그릇된 욕심만 버린다면 언제든 뒤돌아설 기회는 남아 있었다.

이준영 과장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바라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금경태 과장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자신의 아킬레스건인 정갑수를 거론한 일조차 용서할 수 없었다.

‘이혁민, 신기동, 이젠 내 앞에서 대놓고 등을 돌린단 말이지. 네놈들이 신동석의 알량한 조치를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실수하지 마. 그땐 절대 용서치 않아. 이준영, 이번 수술로 기고만장하겠지? 너는 여기까지야. 더 이상은 용납 못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다시 무너트려 주지.’

외래로 내려가던 신기동 교수가 이혁민 교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교수, 살짝 무서워지려고 하네. 설마 변한 건 아니지?”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내가 한 일이 뭐가 있어? 2년차들 덕분이지.”

“과장님도 예전에는 안 그랬었던 것 같은데, 왜 저렇게 변했을까?”

신기동 교수의 나직한 한탄이 조용한 복도를 울렸다.

함께 선후배로 만나 트레이닝을 했지만 누구도 금경태 과장을 몰랐다. 이준영 과장으로 인해 금경태 과장이 받은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무리 기를 써도 이길 수 없었던 상대에 대한 두려움과 열등감이 까닭 없는 증오로까지 발전해 있었다. 농담처럼 주고받은 말속에서도, 이준영 과장을 칭찬하는 교수들이 말에서도 수없이 자존심을 다쳤던 것이다.

그 시간, 이준영 과장이 평소와 다름없이 정각 7시에 출근을 했다. 간호사들이 발딱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항상 보이던 김지훈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출근할 때 인사하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지만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김지훈이었다.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도 일부러 그 시간에는 회진을 돌지 않았다.

‘이 시간에는 회진도 안 돌 텐데, 이 자식이 뭘 하고 있는 거야? 설마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 놈이 수술을 들어간 거야? 쯧! 무리하지 말라고 했건만.’

인상이 더욱 굳어진 이준영 과장이 회진을 위해 병동으로 향하려다 말고 간호사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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