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47화 (247/1,329)

제11화 김지훈도 사람이다 (2)

김지훈이 코를 훌쩍이자 손일석이 휴지를 건넸다.

“코감기까지 왔나 보네. 지훈아, 나 내려가 볼게. 필요한 것 있으면 의국으로 전화해. 그리고 최철한 선생님이 너 내일 아침에 병동에서 보이면 죽인대. 그러니까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쉬어.”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야야! 너 확실하게 쉬지 못하게 하면 우리까지 다 죽을 줄 알라고 하셨어. 나도 살고 싶다.”

죽을 몇 숟갈 뜨던 김지훈이 손일석을 보았다.

“일석아, 만일 내일 저녁까지 내가 이 모양이면 응급실 간호사에게 말 좀 전해 줘.”

“무슨 말?”

“이준영 선생님 출근하실 때 혹시 찾으시면 일이 있어서 못 내려왔다고. 아니면 너라도 인사를 하든지. 아니다. 아침에 중환자실 환자 때문에 오실지도 모르니까 치프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회진 좀 대신 돌아 줘.”

“에휴! 니 걱정이나 해, 자식아. 참! 현수가 몸조리 잘하란다. 응급실이 많이 바쁜지 나도 올라오기 전에야 봤어. 자식! 이제 사람 될 모양이야.”

손일석이 몇 번이고 내일도 푹 쉬라는 말을 강조하고는 병동으로 내려갔다. 죽도 다 비우지 못한 김지훈이 쓰러지다시피 침대에 누웠다.

‘현수가?’

다들 바쁜 와중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몸을 혹사시킨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밤새 앓았다. 자는 건지, 깨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시달렸다. 눈을 뜰 때마다 고경아가 보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이준영 과장의 무뚝뚝한 얼굴까지 떠올랐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눈을 뜰 힘도 없었다. 창밖이 밝아 올 무렵에도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숙소 문이 조용히 열렸다. 누군가 이마를 만졌다. 흐릿하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유석재가 보였다. 그 옆에 최철한이 서 있었다.

잠깐 눈을 떴던 김지훈이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석재야, 어때?”

“열은 좀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이삼 일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뭐라도 좀 먹어야 기운을 차릴 텐데 걱정이네요.”

“밥이 입에 들어가겠냐. 자게 놔둬.”

유석재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과장님이 3년차들이 맡게 하지는 않겠죠?”

“3년차? 사이가 좋아도 고 년차들은 손에 꽉 쥐시려고 하는데, 이준영 선생님이나 신기동 선생님한테 너희들을 보낼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현수는 말할 것도 없고. 내 생각에는 일석이가 해야 할 것 같아. 어쩌면 지훈이가 꾀병 부린다고 난리를 치실지도 몰라.”

“그러시면 안 되죠. 에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 놈도 없는데 왜 그러시나 몰라요. 이 자식을 찍을 데가 어디 있다고. 일석이 일도 꽤 많은데 걱정이네요.”

문 닫히는 소리가 나며 유석재의 목소리가 멀리 사라졌다.

김지훈이 조용히 눈을 떴다.

가슴이 시려 오며 서러움이 몰려왔다. 남들보다 더 신경을 써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일반 외과 전공의 중 한 명으로 자신을 대해 주길 바랐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고 최선을 다했건만, 금경태 과장이 자신을 찍은 것이다.

‘한 번 찍히면 끝이라고 했나? 내가 뭘 잘못했는데?’

깨질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얼마 후, 이혁민 교수까지 다녀갔다. 표정이 몹시도 좋지 못했다. 병원에서 전공의들만큼 힘든 사람은 없다고 해도 앓아눕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아마도 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감탄이 나올 정도로 체력이 강했던 김지훈이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김지훈의 잘못이라고는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었다.

월요일 아침, 김지훈이 아파 근무를 못한다는 말을 들은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찌푸렸다. 지난 주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이준영 때문에 신경이 쓰여 잠도 못 잤는데, 김지훈 이 자식은 또 뭐야?’

“이번 2년차들은 왜 이 모양이야. 저번에는 교통사고가 나서 눕더니 이제는 몸살이야? 어떻게 신현수 빼고는 제대로 된 놈이 없어.”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지훈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고려하고 있었다면 할 말이 아니었다. 과장 파트 전공의들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신현수가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한 걸까? 이왕 이렇게 된 거 푹 쉬어라. 과장님도 저렇게 말씀하시는 건 아닌데. 어쨌든 오늘은 쉴 시간도 없겠구나. 논문은 또 언제 쓰지?’

걱정도 잠시였다. 김지훈의 공백은 의외로 컸다. 월요일 오전부터 일이 년차들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유석재 역시 논문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오후 일과가 끝나도록 김지훈이 일어나질 못했다. 오후 회진을 끝낸 일이 년차들이 얼굴을 찡그렸다. 특히 주말 당직을 선 신현수가 피로감을 이기지 못했다. 잠시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신현수가 턱을 매만지다 말고 눈을 반짝였다.

‘오늘 응급실은 누가 커버하지? 이것도 기회라면 기회네.’

잠시 후, 회진을 끝낸 이혁민 교수가 금경태 과장에게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며 다른 교수들과 함께 의국으로 들어갔다.

“이 교수, 무슨 일이야?”

“과장님, 김지훈 문제 때문에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일이 너무 과중합니다.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대책이라니?”

“3년차 중의 한 명이 신기동 교수 파트를 맡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금경태 과장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김지훈이 며칠 일을 못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 그동안만 대신 일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단, 김지훈이 계속 버틸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했지만 금경태 과장은 이를 본능적으로 무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준영 과장과 함께 트레이닝을 하는 동안 늘 두 번째였다. 별의별 노력을 다 해도 앞설 수가 없었다. 의료 사고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이준영 과장의 그림자에 가려 평범한 의사에 불과했을지도 몰랐다. 10년 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 숨은 두려움은 여전했다.

대장 동맥 수술 때문에 신기동 교수에 대해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준영 과장과 손을 맞춘 것도 불안했지만, 후배가 치고 올라오는 것은 더욱더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난 세월 자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던 이혁민 교수까지 반기를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준영, 네가 활개 치는 꼴은 못 본다. 거기에 신기동까지 날뛴다면 내 입지가 완전히 좁아질 수도 있어.’

조그만 구멍이 거대한 댐을 무너트린다고 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전문의 시험 보려면 논문도 써야 하고, 지금부터 집도도 더 많이 해야 하는데 퍼스트나 서라고? 더구나 세계 학회도 있잖아. 삼사 년차들은 안 돼.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움직일 만해지면 김지훈이 빨리 복귀시켜.”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밉보였다고 해도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아픈 전공의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며칠 못 가 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김지훈 혼자서는 무립니다. 일이 많은 일이 년차들을 배정할 수도 없고, 이 상태로 가면 누구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 일단 신 교수 수술은 급하지 않으니까 잠시 미루고, 응급실은 손일석이 커버하면 되지 않겠어? 전공의라는 놈이 한 달도 안 돼 이게 뭐야? 그것도 2년차가 말이야. 안 힘든 놈이 어디 있다고.”

손일석을 언급하자 오상익 교수가 얼굴을 굳혔다. 업무량으로 볼 때는 신현수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일부터 바로잡고자 이혁민 교수와 함께 일반 외과 개편안을 제출했다. 한마디 해야 할 때였다.

그때 신기동 교수가 발끈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신장 이식 때부터 환자보다 개인적인 일에 더 주안점을 두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김지훈이 왜 미움을 받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장례식장이라는 말이 혀끝까지 뛰쳐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과장님, 신장 환자들이 급하지 않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리어 암 환자들보다 더 급한 환자들입니다.”

“그래야 하루 아닌가?”

“과장님은 그러면 이런 이유로 환자들 수술을 미루실 수 있습니까? 당장 투석을 한 번이라도 거르면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그보다 급한 환자는 없습니다. 그걸 모르십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교수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자리였다. 감히 자신에게 비난조로 항의를 하다니, 얼마 전만 해도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당장 목소리라도 높여야 했지만 과장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트릴 수 없는 일이었다.

“신 교수, 말이 과한 거 아닌가?”

“제 말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3년차들에게 맡기면 아랫년차들 힘들지 않게 하면서 어련히 알아서 하겠습니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를 두고 사실상 두 파트를 맡고 있는 손일석에게 대신하라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신현수가 가장 일이 적습니다.”

‘신기동, 네가 감히.’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은근히 달아올랐다. 자신의 말을 따르면 그만인 일이었다. 절대 3년차들이 일을 나눠 하게 할 수는 없었다. 수술에 눈이 트인 3년차가 이준영 과장과 신기동 교수의 수술에 들어간다면 삽시간에 수술 실력이 알려질 것이다. 가뜩이나 단 한 번의 수술로 이준영 과장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판국이었다.

불안감이자 두려움이었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일반 외과 의사를 용납하지 못하는 삐뚤어진 자존심이었다.

더구나 일반 외과 내의 역학 관계도 점점 불리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준영, 이혁민, 신기동, 오상익. 너희 넷이 아무리 힘을 합쳐도 과장은 엄연히 나야. 아직은 너희들이 함부로 기어오를 수 있는 내가 아니야.’

신기동 교수를 노려보던 금경태 과장이 최대한 속마음을 숨긴 채 탁자를 툭툭 치며 일어났다. 은연중에 자신의 분노를 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쨌든 안 돼. 하지만 내가 조금 양보하지. 김지훈이 2년차니까 2년차 내에서 해결해. 단, 김지훈이 복귀할 때까지야.”

금경태 과장의 나직한 목소리에 신기동 교수가 이를 악물었다. 누구보다도 전공의를 아껴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교수들이었다. 더 이상은 금경태 과장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참을 수 없었다.

가슴속에서 치고 나오는 화를 참지 못한 신기동 교수가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 이혁민 교수가 손을 들며 막았다.

‘그렇게 이준영 선생님과 신 교수가 두려우십니까? 김지훈이 그렇게 보기 싫으십니까? 이제는 스스로 자신의 말이 무리라는 사실을 생각도 못하시는군요. 나도 더 이상은 못 보겠습니다. 그리고 과연 신현수가 과장님의 손안에만 있을까요? 그놈이 그렇게 어리석은 놈이 아닙니다.’

혈관 수술을 두고 손을 번쩍 들었던 신현수와 손일석을 믿었다. 이준영 과장과 신기동 교수가 어떤 의사인지도 이제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혁민 교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2년차들에게 의향을 묻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제 생각에 정히 힘들다고 하면 일단 신 교수의 수술을 미루고, 응급실만이라도 커버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교수, 그게 무슨 말이야? 이런 건 우리가 정해야지.”

금경태 과장의 목소리가 은근히 높아졌다. 신기동 교수 역시 이건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순간, 살짝 신기동 교수에게 묘한 눈빛을 보낸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문제를 피할 수 있지만, 말씀드린 대로 김지훈 혼자 세 파트를 계속 맡을 수는 없을 겁니다. 2년차들에게 일을 나눠 할 의향이 있는지도 묻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힘들다고 하면 지금처럼 갈 수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이 교수, 김지훈 파트 문제는 이미 결정된 거야. 전공의들이 자신의 스케줄을 정하게 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금경태 과장이 인상까지 썼지만 이혁민 교수가 물러서질 않았다. 도리어 작정을 한 듯 치명적인 약점을 건드렸다.

“정갑수 문제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똑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김지훈이 버티지 못하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정갑수라는 말에 교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금경태 과장에게 쏠렸다. 일주일 동안 무단이탈을 했을 때 원칙대로 처리했다면 일반 외과의 자부심이 무너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혁민, 네가 감히 정갑수까지 거론하며 날 압박해?’

금경태 과장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정갑수의 일은 핑계조차 댈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말과 지난 일을 절묘하게 이용하는 이혁민 교수를 보며 눈빛만 굳혔다. 임동완 교수와 구영선 교수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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