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김지훈도 사람이다 (1)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깜빡깜빡 흔들렸다.
어디론가 달아날세라 고경아를 꼭 안은 채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이 텅 비며 온몸의 신경은 오직 한곳으로만 몰렸다.
고경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려는 순간 드르륵 창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야?”
화들짝 놀란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경희구나. 아직 안 잤어?”
“오빠? 둘이 뭐 했어요? 목소리가 왜 떨리는데.”
“하긴 뭘 해. 그냥 얘기하고 있었지.”
“정말? 언니, 정말이지.”
고경아가 손을 흔들며 대문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기집애. 창문 닫아. 모기 들어와.”
4월 달에 무슨 모기가 있을까? 고경희가 수상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반갑게 웃으며 돌아선 김지훈이 입맛만 다셨다.
‘경희야, 넌 눈치도 없냐. 결정적인 순간에 이게 뭐야.’
“경아 씨, 내일 연락할게요. 경희야, 잘 자.”
꿈결처럼 행복했던 시간이 창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날아갔다. 아쉬움에 몇 번이나 뒤돌아보던 김지훈이 밤하늘을 보며 그리운 이들을 찾았다.
그때 누군가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경아였다.
“경아 씨.”
고경아가 숨을 할딱거리며 김지훈의 어깨를 잡았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김지훈을 보며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귓가에서 고경아의 숨결이 느껴졌다.
“지훈 씨, 난 지훈 씨가 더 이상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나오려고 해요. 내가 힘들지 않게 해 줄게요. 나 오늘 정말 행복해요. 지훈 씨, 나도 지훈 씨 사랑해요.”
덥수룩한 수염으로 까끌까끌해진 뺨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너무 피곤한 탓일까?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좋았다. 편안했다. 행복했다.
‘경아 씨, 나도 사랑해요.’
스르르 숨결이 사라졌다.
고경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김지훈이 우두커니 바라만 보았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포장마차에서 2차전이 벌어졌다.
“지훈아, 언제부터 만났어?”
“아직 일 년은 안 됐어.”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이 자식이, 별걸 다 물어보네.”
손일석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니 주변머리에 손이나 잡았으면 많이 나간 거겠지. 그러다 제수씨 도망가, 인마. 조심해. 어디서 나 같은 사람이 딱 나타나 봐라. 넌 그냥 낙동강 오리 알 되는 거야.”
김지훈이 발끈했다.
“이 자식이! 그래도 인마, 입은…….”
술이 잔뜩 오른 것 같았던 손일석의 눈이 매서워졌다.
“어쭈! 키스는 했구나. 대견한 놈. 아니지. 너 키스야, 뽀뽀야? 그 차이는 굳이 말 안 해 줘도 알지?”
김지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 말고 냅다 손일석의 뒤통수를 갈겼다.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만지던 손일석이 씨익 웃었다.
“반응이 과격한 거 보니까 뽀뽀구나. 불쌍한 놈. 어리바리한 놈. 일 년이나 됐는데 이제 거기냐. 지훈아, 내 말 잘 들어. 다음 오프 때 토요일에 무조건 양수리 가자고 그래. 거긴 가긴 쉬워도 오긴 힘들어요. 길이 어마어마하게 밀리거든.”
김지훈의 눈이 번쩍였다.
“야, 그건 너무 눈에 보이지 않냐?”
“아이! 자식이! 너 클래식이 왜 클래식이겠니.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 때문 아니냐. 연애도 똑같아요. 고전적인 수법을 탁 던졌을 때 여자가 물잖아? 그럼 게임 끝난 거야. 좀 빼는 것 같은 건 그냥 무시해. 그건 예의에 불과해요. 일단 가면 최소한 뽀뽀 이상은 한다.”
뽀뽀 이상이라면 키스? 혹은?
김지훈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양수리? 분위기 좋냐?”
“이건 너만 알고 있어. 능내역 근처에 가면 봉쥬르라는 카페가 있어요. 마당에서는 장작불이 불타오르지. 앞에는 반짝이는 강물을 따라 철길이 있어요. 그냥 그림이 딱 떠오르잖아. 분위기에 한 번 취하면 버스 시간이고 뭐고 다 잊게 돼. 잊으면? 그다음은? 거기 쉴 데 많다. 자연스럽게 잠시 쉬었다 가자고 해. 그 전에 술 한잔하는 것도 좋고.”
손일석이 손가락을 튕기며 음흉하게 웃었다.
“에휴! 좋은 거 가르친다. 지훈아, 넌 저런 거 배우지 마.”
주인아주머니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김지훈이 무언가를 상상하며 눈빛을 굳혔다. 더할 수 없이 소중하고도 귀중한 정보였다. 술을 안 마실 수가 없었다. 연애의 달인인 손일석의 끊임없는 가르침 아래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일석아, 입단속 알지? 난 괜찮은데 경아 씨가 입장 곤란해질까 봐 그러니까 입조심해라.”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쪽팔려서 그런 얘기는 못한다. 이 자식아! 커플? 으이구! 내 신세야.”
“하여튼.”
‘생각보다 너무 많이 먹었는데.’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김지훈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술이 코끝까지 차오른 주인아주머니와 손일석이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었다. 쿵! 소리가 나고서야 입이 멈췄다.
김지훈이 머리를 박고 있었다.
“쩝! 에휴! 내 팔자야. 솔로인 놈이 커플인 놈 코치나 해 주고, 이젠 잠자리 시중까지 들어야겠네. 이모, 갈게요. 술값은 내가 냅니다.”
“일석아, 니가 웬일이야?”
“이모, 솔로에서 벗어나려면 쩐이 필요한데 요샌 쓸 시간이 없네. 그러니 내 속이 오죽하겠어요. 아주 시커멓게 타들어 갑니다.”
낑낑대며 김지훈을 부축한 손일석이 비틀비틀 병원으로 향했다. 어디선가 신현수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응급실의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숙소로 올라갔다.
김지훈을 침대 눕히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손일석이 히죽 웃었다.
“오늘 지훈이 니 덕분에 눈도장 확실하게 찍었다. 내가 좀 손해지만 정보 사용료는 그걸로 대체해 주마.”
혼자 중얼거리며 웃던 손일석도 어느새 조용해졌다.
***
다음 날, 점심때가 다 돼서야 손일석이 눈을 떴다. 기지개를 펴며 간만에 취한 숙면의 나른함을 즐기던 손일석이 김지훈을 깨웠다. 다른 때 같았으면 금방 눈을 떴을 김지훈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마를 만지던 손일석이 깜짝 놀랐다. 열이 장난이 아니었다.
“지훈아, 너 괜찮아? 왜 이래?”
“일석아, 나 아무래도 몸살이 온 것 같아. 온몸이 아프고 춥다. 목도 심하게 칼칼하고.”
“에이 씨! 너무 무리하는 것 같더니. 내 이럴 줄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부리나케 병동으로 향한 손일석이 수액과 필요한 주사제를 들고 간호사와 함께 돌아왔다. 정맥에 바늘을 꽂는 간호사를 보던 손일석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열이 너무 많이 나는데, 채혈까지 해서 혈액 검사도 내보내요. 그동안 감기 한번 걸리는 걸 못 봤는데 걱정이네.”
“손일석 선생님, 몸이 무쇠라고 해도 이렇게 일하면 못 버틸 거예요. 난 김지훈 선생님이 지금까지 버틴 게 희한해요. 선생님도 쉬어 가면서 일하세요. 다들 2년차 선생님들 쓰러질까 봐 걱정할 정도예요.”
“에이! 설마 우리까지.”
“선생님이 김지훈 선생님보다 체력이 더 강해요? 그리고 쏟아지는 잠 앞에선 장사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손일석이 입맛만 다셨다.
수액에 섞인 해열제 덕에 열이 떨어진 김지훈이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잠이 들었다. 밤새 끙끙 앓았을 텐데 깨지도 못한 게 미안했던 손일석이 곁을 지켰다.
‘체력하면 지훈인데, 이 정도가 될 때까지 열심히 했단 말이지. 제길! 어제 술을 마시는 게 아닌데. 몸이 안 좋으면 말을 해야지.’
한참 동안 김지훈의 얼굴을 보던 손일석이 의국으로 내려갔다. 마침 주말 당직인 최철한과 유석재에게 김지훈의 상태를 보고했다. 둘 다 깜짝 놀라 2년차 숙소로 향했다.
“지훈아, 괜찮아?”
최철한의 목소리에도 김지훈이 눈을 뜨지 못했다. 다시 열이 오르는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하고 손발이 차가워진 것으로 보아 상당한 고열이었다.
유석재가 직접 약을 챙기고,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소리에 최철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근데 이 자식들은 번갈아 가면서 쓰러지네. 죽어라고 일을 하니 말은 못하겠고, 정말 답답하다.”
최철한의 말에 유석재가 눈가를 찌푸렸다.
“그게 지훈이 잘못인가요? 응급실까지 세 파트를 맡는 것 자체가 무리잖아요. 이만큼 버틴 게 용한 거죠.”
“그러게 말이다. 이삼 일은 무조건 쉬게 해야 할 것 같은데,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하냐. 신기동 선생님 수술이야 화요일에 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지만, 응급실은? 우리가 맡아?”
“일단 상황 지켜보시고, 내일 아침에 모두 모이면 그때 상의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우리가 결정한다고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총치프 선생님 의견도 들어야 하잖아요.”
“그래, 그렇게 하자. 에휴! 금경태 과장님도 참 대단한 분이다. 꼴새를 보니까 이준영 선생님하고 신기동 선생님을 완전히 밀어내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엉뚱하게 지훈이가 쓰러지고 앉았네. 확실히 무리야, 무리.”
옆에 서서 김지훈을 보던 손일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예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난 것이다. 더구나 김지훈을 보는 금경태 과장의 눈빛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선생님, 혹시 그 말은 들으셨어요? 저도 우연히 지나가면서 들은 얘긴데, 과장님이 지훈이를 찍었다는 소리가 있던데요.”
최철한이 인상을 썼다.
“나도 대충은 들었는데 거기서 딱 끝내. 쓸데없는 소리 하고 다니지 말고. 알았어?”
유석재가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그런 소리가 괜히 나왔겠어요? 솔직히 지훈이나 일석이 정도면 벌써 자기 밑에 두려는 모습을 보이고도 남을 때잖아요. 근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지훈이를 보는 눈빛까지 좋지 않은데, 말이 안 나오는 게 이상한 일이죠.”
“석재야, 뭐 좋은 소리라고 그런 말을 해. 그리고 인마, 과장님이 지훈이한테 그러는 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혁민 선생님도 다 생각이 있으시더라.”
“이혁민 선생님이요?”
“몰라. 나도 이혁민 선생님이 되게 취하셨을 때 들은 말이야. 하여튼 내가 알기로는 이준영 선생님이 오신 이상 그런 문제로 지훈이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훨씬 운이 좋은 놈이야. 내려가자. 지훈이 듣겠다.”
조용히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마에 식은땀이 잔뜩 맺힌 김지훈이 끙끙 소리를 내면서도 눈을 떴다. 몸이 아프면 정신도 흐려지는 법이었다. 실제로 들은 말인지조차 헷갈렸지만 최철한의 말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과장님이 날 찍으셨다고? 그래서 그동안 날 보는 눈빛이 그랬던 거야? 그런데 왜?’
몸도 아픈데 스트레스까지 받은 탓일까?
갑자기 몰려온 오한과 전신을 엄습하는 통증에 김지훈이 몸을 잔뜩 웅크렸다.
고경아가 보고 싶었다. 옆에 앉아 손만 잡아 주어도 벌떡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배도 고프지 않았다. 아프다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할 정도로 심한 통증과 오한에 시달렸다.
창밖이 깜깜해질 무렵, 손일석이 수액 하나와 작은 종이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지훈아, 아직도 힘들어?”
“죽겠다. 몸살로도 이렇게 아픈데, 환자들은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걸까?”
“이 와중에도 환자 생각을 하냐? 니 몸부터 챙겨, 자식아.”
눈을 부라리며 핀잔을 준 손일석이 수액을 새로 달고는 억지로 김지훈을 일으켰다.
“왜 그래. 나 그냥 누워 있고 싶어.”
“목소리가 다 죽어 가네. 그래도 일어나서 죽 좀 먹어.”
“죽? 너밖에 없다, 일석아.”
“내가 아니라 제수씨가 사다 준 거야. 연락이 없어서 걱정된다고 나한테 전화를 다 했어. 너 아프다고 그러니까 거의 우는 것 같더라. 널 좋아하긴 꽤 좋아하는 모양이야. 나도 남들 몰래 받느라고 고생했어. 그러니까 성의를 생각해서 입맛 없어도 먹어.”
‘경아 씨가?’
김지훈이 가까스로 앉아 죽을 한 숟갈 떴다. 몸이 안 좋은 탓에 꽤나 까끌까끌했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다.
이상하게 눈시울이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