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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245화 (245/1,329)

제10화 행복하고 눈물 나는 회식 (3)

“왜, 궁금해? 미국 놈들, 아주 나쁜 놈들이야. 물론 우리나라에 비하면 의사들에겐 천국이지.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이거든. 함부로 연장 근무하면 노동법 위반이라고 벌금까지 때려.”

“벌금을요?”

“그래. 꽤 많이 나오는 것 같더라. 그건 그거고 말이야. 그 먼 곳까지 배우러 갔는데, 이 자식들이 수술을 안 줘요. 내가 각오는 했지만 육 개월 동안 구경만 하고, 그다음에는 퍼스트만 간신히 섰다.”

“어? 감히 선생님을 무시한 건가요?”

“걔들이 우리나라 면허를 인정하질 않으니까 이해는 한다만, 어떻게 한 건을 안 주는지 몰라. 솔직히 혈관 수술이고 뭐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야.”

어라? 신기동 교수가 신이 났다. 이혁민 교수는 물론 이준영 과장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관심을 보였다. 손일석이 과장된 몸짓까지 해 가며 신기동 교수의 말을 거들었다.

“어후! 돈도 많이 드셨을 텐데 정말 화나셨겠습니다. 그놈들 아주 나쁜 놈들이네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서럽다. 그런데 말이야. 한 번 퍼스트를 주더니, 그다음부터는 그냥 내리 주는 거야. 거기다 혈관 수술 케이스도 많아서 그다음부터는 행복 그 자체였다.”

고개를 바짝 내밀고 듣던 이혁민 교수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가. 걔들도 눈이 있는데 신 교수 손이 어떤지 봤으면 완전히 인정하고도 남지 않았겠어? 퍼스트 선다고 다 퍼스트가.”

‘역시 퍼스트가 할 일은 단순한 보조 역할만이 아니었어.’

술자리에서 나온 말이지만 노련한 외과 의사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말이었다.

“에이! 내가 뭘.”

신기동 교수가 은근히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호기심에 귀를 기울이던 김지훈이 고경아의 속삭이는 것처럼 나직한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안 나가요?”

“지금 분위기가 조금 묘하잖아요. 조금만 있다가 나가죠.”

일어날 기회를 엿보던 김지훈이 한숨을 쉬고 말았다. 이준영 과장까지 대화에 가세했다. 급기야 미국 얘기가 시들해지자 손일석이 엉뚱하게도 야구 얘기를 꺼냈다.

“선생님, 올해는 엘지 트윈스가 잘하겠죠?”

“너 엘지 팬이야?”

“그럼요, 선생님. 아! 올해는 두산을 확실히 깨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케이! 손일석 너 마음에 든다.”

야구 얘기로 넘어가자 더 신들이 났다. 신기동 교수가 잔까지 권했다. 급기야 엘지가 어떻고 두산이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금년 프로 야구 예상 순위까지 나왔다.

이준영 과장이 간간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혁민 교수는 야구는 역시 거인과 최동원이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술이 오가고 바닥에 붙은 엉덩이는 떨어질 줄 몰랐다.

완전히 들뜬 신기동 교수가 입에 거품을 물고 갑자기 혈관 수술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손일석이 마구 감탄을 터트리자 무슨 생각인지 이준영 과장까지 맞장구를 쳤다. 가끔 신기동 교수가 김지훈을 보면 한마디는 꼭 날렸다.

“신 교수.”

의아함을 떠나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한 달 내내 수술하며 탔다. 이준영 과장에게는 1년 전부터 지금까지 탔다. 그런데 손일석은 불과 한 시간도 안 돼 교수들의 마음을 확 사로잡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있나! 미국과 야구를 저렇게들 좋아하셨나? 일석아, 니 정보력에 내가 졌다.’

김지훈이 물만 마셨다. 웃고 떠드는 소리가 커질수록 가슴만 쓰렸다. 손일석이 오고서도 근 한 시간이 넘어서야 자리가 끝났다.

“일석아, 다음에 기회 되면 술 한잔하자.”

“예, 선생님.”

급기야 술도 못 마시는 신기동 교수가 술자리까지 하자고 했다. 경악스러운 말에 김지훈이 한숨만 쉬었다. 물만 먹어서인지 술까지 다 깼다. 어째 잠시겠지만 잠도 달아난 것 같았다. 김지훈만 빼고는 다들 기분 좋은 얼굴로 마포 갈비집을 나왔다.

이준영 과장이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김지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 모양이었다.

“김지훈, 손일석에게 이런 건 배워. 일 년 내내 스트레스 받으면 의사 짓 못한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커피 좀 뽑아 와.”

김지훈이 부리나케 달리며 자판기를 찾았다.

이준영 과장이 커피 한 모금을 넘기며 피식 웃었다.

‘오늘도 맛있네.’

교수 3명이 밤거리를 따라 점점 멀어졌다.

“선생님, 이건 아니죠. 저도 그렇고 김지훈도 선택할…….”

“안 돼.”

“이 교수, 말 좀 해 봐. 이건 선배의 횡포야. 안 그래?”

“제일 먼저 찍은 내가 삼 순위다. 신 교수 니는 마지막 순위야. 어쩌겠나.”

“이 교수, 이런 일에 순위가 어디 있어?”

“신 교수, 손일석이 괜찮다.”

김지훈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가 들리면 영락없이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손일석이라는 이름이 자꾸 들렸다. 분명 이준영 과장의 목소리였다. 이혁민 교수의 다소 허탈한 것 같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부산하게 인사를 하고 난 손일석이 두 주먹을 흔들며 다가왔다. 완전히 붕 뜬 얼굴이었다.

“지훈아, 고맙다. 일단 사전 포석은 어느 정도 됐고, 이젠 열심히만 하면 될 것 같지 않냐?”

“축하한다, 인마. 넌 확실히 일인자야. 아니, 최강이다.”

“뜬금없이 뭔 소리야. 그나저나 우리끼리 술 한잔해야지. 너랑 술 마신 지 너무 오래됐다. 그리고 고경아 간호사 맞지? 빨리 들어가라고 해.”

김지훈이 대답 대신 눈가를 찡그리며 입술을 모았다. 단둘만의 데이트도 좋지만 이제는 누군가 알아도 좋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언젠가 애인이 생기면 가장 먼저 소개해 주고 싶었던 친구가 바로 손일석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오프를 맞출 시간이 언제 또 올지 몰랐다. 아무리 피곤해도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

“아냐. 같이 가자. 골뱅이 맛있는 집 있는데, 거기 가서 딱 한 잔만 더 합시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손일석이 의아한 눈초리로 빤히 보고 있었다. 고경아가 고개만 끄덕였다. 앞장서 가던 김지훈의 옆에 바짝 붙은 손일석이 조용히 말했다.

“야, 둘이만 가자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얼마 만에 들르는 포장마차인지 몰랐다. 김지훈과 손일석을 본 주인아주머니가 호들갑을 떨었다. 안주라고는 딱 한 가지였고, 술은 언제나 소주만 마셨다.

주인아주머니가 뜨거운 김이 솔솔 나는 골뱅이와 시원한 소주 한 병을 바로 내놓았다.

“둘 다 도대체 얼마 만이야. 얼굴 잊어먹는지 알았어.”

“우리 과가 그렇죠, 뭐.”

주인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힐끗힐끗 고경아를 보았다. 김지훈 옆에 앉아는 있는데, 분위기가 뭔가 어색한 것 같으면서도 묘했다.

“지훈아, 그런데 이 아가씨는 누구야?”

“이모, 예전에 제가 한 말 잊으셨어요?”

“무슨 말? 잠깐, 그럼 설마?”

“제가 여기에 여자를 데려오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 설마가 뭐예요? 다른 여자는 절대 안 데려온다고 했잖아요. 경아 씨, 인사해요. 우리 이모고, 이 자식은 내 친구 손일석입니다.”

잔뜩 굳었던 고경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낭만적인 고백은 아니었지만 분명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왠지 고경아의 눈가가 붉어지는 것 같았다.

주인아주머니 눈이 터질 것처럼 커졌다.

“어머머! 우리 지훈이한테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가 생긴 거야? 내가 이럴 때가 아니네. 아휴! 어쩜 이렇게 예뻐. 지훈이하고 너무 잘 어울리네. 이름이 경아?”

“네. 고경아예요.”

주인아주머니는 난리가 났지만 손일석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입만 벙긋거리다 말고 소주 한 잔을 벌컥 비웠다.

“김지훈, 너 지금 고경아 간호사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한 거야? 아니,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 거 맞아? 내가 똑똑하게 들은 거지?”

“그래, 인마. 정식으로 인사해. 수술 방에서 성질난다고 괜히 소리 지르지 말고.”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지훈이 솔로가 아니라는 사실에 충격을 먹어도 단단히 먹었다. 아니,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손일석의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냐. 어후! 머리야. 니가 지금 솔로가 아니고 커플이라 이거지.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네.”

“이 자식이 헛소리만 하고 있어. 형수한테 인사부터 해.”

김지훈이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손일석이 정신을 수습했다.

“고 간호사, 아니 죄송. 손일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제수씨라고 부르겠습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형수지, 왜 제수씨야? 인마.”

“억울하면 민증 까든지. 어린노무 자식이 형보다 먼저 애인을 만들어? 버르장머리 없는 놈. 제수씨, 이렇게는 첫 만남인데 한 잔 짠 해야죠? 지훈이, 잘 부탁드립니다.”

고경아가 생긋 웃자 손일석이 밝게 웃었다.

“다 같이 한 잔 어때요? 이모는 어서 술을 받으시고. 야! 지훈이 넌 좋겠다. 부러워.”

잔이 오고 갔다. 고경아와 주인아주머니의 수다에 손일석의 화려한 말발이 더해지자 가뜩이나 좁은 포장마차가 시끌벅적해졌다. 구김 없이 밝게 웃는 고경아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즐거워하는 주인아주머니, 그리고 진정으로 기뻐하는 손일석의 모습에 김지훈이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편하고, 좋고, 행복하고. 경아 씨, 정말 고마워요. 이모도 고맙고, 일석이 너도 고맙다.’

슬슬 기분이 들떠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 이제는 온몸이 피곤을 호소하고 있었다.

‘벌써 열한 시네. 일단 오늘은 푹 자자. 그래야 내일 데이트를 하든지 말든지 하지.’

“경아 씨, 이제 일어날까요?”

“어? 분위기 좋은데 왜 벌써 일어나? 제수씨, 이 밤을 달려 봅시다. 이렇게 보내기에는 너무 서운한데.”

“일석아, 나 지금 졸려 죽겠다. 그만 먹고 들어가자.”

김지훈의 휑한 얼굴을 본 손일석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그래? 그럼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제수씨 바래다주고 와. 이모, 나 심하게 외로운데 나랑 술 한잔할 거죠?”

“알았어. 넌 너무 여자가 많은 게 탈이야.”

“무슨 소리예요? 애인 한 명 없는데.”

“어이구! 지금까지 데려온 여자만 몇 명인데 그런 소리를 해? 일일이 세기도 힘들어요.”

“아! 이모, 누구 앞길 막을 일 있어요. 내 별명이 뭔지 알아요? 천진난만, 순진무구. 못 들어 봤어요?”

주인아주머니와 티격태격하는 손일석의 어깨를 툭 친 김지훈이 고경아의 손을 잡았다. 손일석이 혀를 차며 소주를 들이켰다.

“이모, 갈게요. 일석아, 바로 올 테니까 조금만 마셔.”

“알았어, 인마. 제수씨, 다음에 또 봅시다. 그땐 혼자 오면 안 돼요. 내 옆구리가 시리다 못해 얼음이 맺혔네요. 지훈아, 그리고 웬만하면 그 손은 놓지. 손에 땀나면 귀찮다.”

고경아가 환하게 웃으며 김지훈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네, 선생님. 다음에 또 봐요. 이모, 안녕히 계세요.”

이모라는 소리에 주인아주머니의 입이 찢어졌다. 포장마차 밖에까지 쫓아 나와 배웅을 했다.

행복에 겨운지 김지훈이 웃기만 했다.

고경아를 배웅하는 길은 언제나 아쉬웠다. 부드러운 손에서 전해지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 골목을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아쉬움에 손을 놓지 못하는 김지훈을 보던 고경아가 갑자기 새침을 떨며 말했다.

“이모네 집에 제가 처음 함께 간 사람이라는 거 정말이죠? 거짓말 아니죠?”

“그럼요.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해요.”

“그럼 그 말 한 번 더 해 봐요.”

“무슨 말이요?”

고경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 들어도 행복하고 기분 좋은 말은 딱 하나였다. 첫 감정을 기억하는 한 수만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이다.

크게 숨을 내쉰 김지훈이 천천히 고경아의 어깨를 잡았다. 맑게 빛나는 눈동자에 별이 가득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감정이 김지훈을 장님으로 만들었다.

고경아의 가쁜 숨결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촉촉한 느낌이 온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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