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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244화 (244/1,329)

제10화 행복하고 눈물 나는 회식 (2)

신기동 교수가 웃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지훈, 너 술 잘 먹는다고 들었는데 힘들어?”

“아닙니다, 선생님. 괜찮습니다.”

“그래야지. 그런데 말이야, 이번 주 목요일에 수술한 환자 있잖아. 그 환자 수술하면서 뭐 느낀 거 없어?”

가장 많이 하는 수술인 동정맥루를 만들어 준 환자였다. 특별한 사항도 없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신기동 교수가 혀를 찼다.

“아직도 잘 모르는구나. 혈관 수술은 말이야. 다양하지 않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른 수술보다 훨씬 더 다양해. 환자마다 다 다르거든. 그래서 알고 보면 상당히 매력적이지. 그리고 특히 손이 중요해. 어중간한 놈은 근처에도 못 와. 근데 넌 가능성이 보여.”

“감사합니다, 선생님.”

“지금은 케이스가 없지만 신장 이식도 마찬가지야. 보람이 정말 큰 수술이다. 만성 신부전으로 고생을 하는 환자들을 생각해 봐. 목숨이 걸린 일이야.”

난데없이 회식 자리에서 혈관 수술과 신장 이식에 대한 신기동 교수의 예찬이 시작됐다. 나직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가물거리는 눈을 간신히 뜨고 있던 김지훈이 신기동 교수의 말에 정신이 확 깼다.

“그래서 말인데, 다음에 한 번 더 돌아. 육 개월 만에 해 보기에는 너무 빠르긴 하지만, 너 정도면 혈관 수술을 할 수도 있어.”

‘지금 혈관 수술을 주신다고 하신 거야?’

그 순간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지훈, 고 간호사하고 같이 가서 담배 좀 사 와.”

“예? 선생님, 담배 안 피우시지…….”

담배 근처에도 안 가는 이준영 과장이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찌릿한 눈빛 하나에 말을 얼버무렸다.

“선생님, 어떤 담배로 사 올까요?”

“아무거나.”

고개를 갸웃거린 김지훈이 고경아와 담배를 사러 나가자 이준영 과장이 신기동 교수를 노려보았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신 교수.”

딱 한마디를 하고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선생님, 그래도 김지훈이 선택을…….”

신기동 교수가 이에 굴하지 않고 입을 열자 이준영 과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미 끝난 일이야. 생각도 하지 마.”

“왜 이러십니까, 선생님. 괜찮은 놈을 보면 욕심을 내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신 교수, 우리 등 돌릴까? 다른 생각 하지 말고 혈관 수술만 잘 가르쳐. 송재덕 선생님만으로도 벅차.”

김지훈에게 욕심 좀 냈다고 등까지 돌리자니, 헉 소리가 절로 나올 판이었다. 신기동 교수가 깜짝 놀라자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흔들며 툭툭 팔을 쳤다. 말도 꺼내지 말라는 것 같았다. 나직한 한숨만 터졌다.

김지훈이 들어왔다. 이준영 과장이 손에 든 담배는 쳐다보지도 않고 술잔을 들었다. 신기동 교수의 표정이 묘했다.

“김지훈, 고 간호사, 이쪽으로 와. 술 한잔하자.”

“예, 선생님.”

이번에는 이준영 과장이 연거푸 술을 주었다. 스승이 주는 술이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셔야 했다. 피곤한 와중에도 이 술만은 달게 느껴졌다. 대가는 빤했다. 술기운이 확 오르며 급격하게 알딸딸해지기 시작했다.

이준영 과장이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김지훈, 넌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열심히만 해.”

“예, 선생님.”

대답을 하긴 했는데 뭔가 의미가 묘했다. 신기동 교수가 더 이상 말은 못하고 구시렁거리며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이혁민 교수가 슬며시 끼어들며 의미 모를 말을 했다.

“선생님, 저도 안 되는 겁니까?”

“이 교수까지 왜 이래? 저놈을 기초부터 가르친 사람은 나야. 아직도 가르칠 게 많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지훈의 입이 쫙 찢어졌다. 술기운이 점점 심하게 올라왔지만 무슨 말인지 모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이준영 과장은 자신이 스승이고, 김지훈이 제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 것이다.

가슴 벅차고 환호성이라도 질러야 할 일인데 이상하게 눈가가 뜨거워졌다. 너무도 많은 것을 배웠고, 무뚝뚝함 속에 더할 수 없이 과분한 사랑이 있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이혁민 교수가 피식 웃었다.

‘이거 좋은 일인데 왜 이리 서운하지? 그래. 의지할 사람도 없을 텐데 힘들 때는 이준영 선생님께 의지해라. 내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김지훈, 니 하품했나? 눈에 눈물 맺혔다. 회식도 힘들 정도로 피곤하구나.”

김지훈이 급히 눈가를 닦으며 자세를 고쳤다.

“아닙니다, 선생님.”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선생님, 이러다 김지훈이 잡겠습니다. 먹을 만큼 먹은 것 같은데 이제 보내죠. 데이트할 시간 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헉! 데이트? 이혁민 선생님도 이미 다 알고 계셨나?’

김지훈은 물론 맥주 한 잔에 빨갰던 고경아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마치 며느리를 보는 것처럼 고경아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이준영 과장의 표정이 김지훈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싹 돌변했다.

“김지훈.”

목소리까지 더욱 나직하면서도 무뚝뚝해졌다. 중요한 말을 한다는 의미였다.

김지훈이 무릎을 꿇은 채 바짝 긴장했다.

“예, 선생님.”

“내년부터는 네 책임하에 집도를 할 수도 있어. 정신 바짝 차리고 준비해.”

간결한 말속에 엄청난 의미가 숨어 있었다.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경아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선생님, 준비라니요?”

“삼사 년차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무엇을 하는지 안 보여?”

육체적인 부담은 적어질지 모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어깨는 무거워지는 법이었다. 의국원들을 관리하고, 파트 환자 전체를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수술의 차원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확고한 신뢰를 얻는다면 교수들이 지금처럼 함께 수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참관만 할 수도 있었다. 그에 따른 책임과 부담은 교수들 못지않게 엄청날 것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제 수술에서는 잘했다. 그게 우연인지, 아니면 네가 무언가를 확실히 느꼈는지는 앞으로 보면 알겠지. 이 교수, 신 교수, 해 줄 말 없어?”

‘지금 분명 잘했다고 하신 거 맞나?’

그동안 들었던 말 중 가장 길었다. 잘했다는 말뿐이었지만 칭찬도 처음이었다. 무뚝뚝한 목소리에도 기분이 붕 떠 날개라도 있었으면 날아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의 말에 웃다가 울다가 웃고 있었다.

이준영 과장의 말에 이혁민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김지훈, 더 바짝 긴장하고 각오해야 할 거야. 나도 네가 무엇을 배웠는지 알고 싶거든. 그리고 체력 관리 잘해라. 그것도 의사가 꼭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니가 아프면 환자는 누가 보겠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선생님.”

신기동 교수가 묘한 눈빛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앞으로 두 달 남았네. 그 안에 내가 웃을 날이 올까? 기대는 하고 있는데 어때? 잘하면…….”

“신 교수.”

이준영 과장의 목소리에 또 말이 잘렸다.

김지훈이 입술을 꽉 물었다. 실수를 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으면 태우지 않을 이준영 과장이 아니었다. 여기에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까지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만큼 많은 기대를 한다는 말이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준영 과장이 마지막 잔을 따랐다.

“이 잔만 마시고 가. 오늘내일은 푹 쉬고. 고 간호사, 서운하더라도 오늘은 이놈 좀 빨리 보내. 괜찮겠지? 다음에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무뚝뚝한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부드러워졌다. 이젠 대놓고 김지훈과 고경아가 서로 연인 관계라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김지훈은 이준영 과장에게 감사하는 마음뿐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조심스럽게 잔을 비운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에게 한 잔을 따르고 일어섰다. 고경아도 주춤거리며 일어서려는 찰나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지훈아, 어? 선생님들도 계셨네요.”

손일석이 무척 놀란 표정을 지으며 쓰윽 다가와 앉았다. 이준영 과장이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손일석이 헛기침을 하며 무릎을 꿇고는 대뜸 잔을 잡았다.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선생님들께서 계신 것을 보고 들어왔습니다. 한 잔 올리겠습니다, 선생님.”

전공의가 주는 술을 마다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기대를 걸고 있는 손일석이었다. 잔을 비운 이준영 과장이 술을 따라 주자 단숨에 홀짝 비운 손일석이 교수들에게 차례로 잔을 따랐다. 그러고는 슬며시 눌러앉았다.

이혁민 교수가 웃으며 물었다.

“니 오프야?”

“예, 선생님. 할 일이 없어서 밥이나 먹을까 하고 나왔는데 선생님들이 딱 여기에 계셨네요. 저 술 한 잔 주십시오, 선생님. 혹시 요기 남은 고기 제가 먹어도 될까요?”

신기동 교수도 웃고 말았다.

“그래. 너도 고생하는데 많이 먹어. 우리 애들 중에 넉살이 제일 좋은 놈이 손일석이라고 들었는데, 딱 맞는 말이었네.”

“그런 소문이 왜 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선생님! 잔 비셨네요. 한 잔 올리겠습니다.”

분위기나 서열상 이준영 과장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처럼 작동한 손일석이 넙죽넙죽 잔을 따랐다. 자연스럽게 넉살이 이어지며, 곧 교수들의 얼굴까지 벌게졌다. 신기동 교수까지 못 먹는 술을 두 잔이나 마셨다. 정말 놀라운 넉살과 언변이었다.

‘어째 이 자식이 그냥 우연히 온 것 같지가 않네.’

8년을 함께한 친구였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감을 잡을 사이였다. 손일석을 의심쩍은 눈으로 보던 김지훈이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손일석에게 손짓을 했다.

“너 왜 왔어? 솔직히 말해.”

손일석이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 입을 열었다.

“지훈아, 너 혹시 혈관 수술에 관심 있어? 나중에 전문 분야로 택할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냐고.”

김지훈도 어쩌다 한 번쯤은 생각해 본 일이었다. 관심은 있지만 혈관 수술을 전문으로 하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솔직히 지금 택하라면 이준영 과장과 이혁민 교수 밑에서 응급 수술과 위장관 분야를 배우고 싶었다.

“그걸 지금 어떻게 알아? 하지만 배우고 싶은 분야가 따로 있긴 해. 난 아무래도 루뻬보다는 칼바람이 좋거든.”

“잘됐다. 어젯밤에 신기동 선생님 수술하시는 모습 보고 하루 종일 혈관 수술이 눈에 아른거려서 죽겠다. 나 좀 도와줘.”

“어제 한 번 봤는데?”

“평소에도 마음은 있었지. 그리고 몇 번 보고 못 보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 지금 가슴이 막 설레고 떨린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어. 이제야 내가 가야 할 길을 본 것 같아.”

손일석이 전에 없이 진지했다.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지훈이 이내 손일석의 마음을 이해했다.

김지훈 역시 이준영 과장의 수술을 볼 때마다 가슴이 떨리곤 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혈관 전문의가 된다면 상당히 멋지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니 마음은 알겠는데,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줘?”

“지훈아, 다른 거 없다. 그냥 한 삼십 분 정도 자리만 유지해 줘.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단, 이준영 선생님은 니가 커버해야 한다. 어떻게, 그 눈빛엔 적응이 안 돼요.”

“너 신기동 선생님도 조심해야 한다. 나도 농담하시는 거 오늘 처음 들었어. 그 정도는 알지?”

“각오하고 있어, 인마. 하지만 내가 누구냐. 어떻게든 오늘 확실하게 눈도장 찍는다. 다음 텀에 기필코 신기동 선생님 파트 돌고 말 거야.”

눈빛을 굳힌 손일석이 주먹을 쥐며 소리 없는 파이팅을 외쳤다.

다시 자리에 앉은 손일석이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조용히 잔을 비우며 김지훈에게 고갯짓을 했다.

‘분위기 완전히 식기 전에 빨리 데워.’

‘알았어, 인마.’

슬슬 끝나 가던 자리였다. 김지훈이라고 뾰족한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고경아가 손일석 때문에 말은 못하고 빨리 나가자는 눈짓만 했다. 분위기가 슬슬 식어 갔다.

다들 금방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김지훈을 째려본 손일석이 신기동 교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는 법이었다.

“선생님, 그런데 미국 병원은 어떤가요? 많이 다르다고 하던데요.”

신기동 교수가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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