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행복하고 눈물 나는 회식 (1)
분명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꿈결에 한 모양이었다.
‘내가 요새 제정신이 아니네. 스승님께는 죄송하지만 오늘 일찍 끝내고 와서 정말 푹 자자.’
“내가 착각을 한 모양이네요. 이상하네.”
머리만 긁적이며 찜찜한 표정을 짓는 김지훈을 보며 고경아가 슬며시 웃었다.
스승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지만 왠지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이준영 과장과 김지훈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은 더 많이 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병원 정문 위에 달린 시계가 정각 7시를 가리켰다.
응급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이준영 과장과 함께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보였다.
‘헉! 이혁민 선생님하고 신기동 선생님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슬며시 고경아 앞에 섰다. 마치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힐끗 김지훈을 보고는 예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지훈, 회식 가자. 고 간호사, 갈비 좋아하지?”
“네. 저 갈비 좋아해요. 맛있는 집 아세요?”
고경아가 생긋 웃으며 이혁민 교수에게 인사를 한 후 이준영 과장 옆에 섰다. 신기동 교수도 고경아를 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김지훈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네 사람의 뒤를 따라가다 인상을 썼다. 슬쩍 고개를 돌린 고경아가 혀를 날름 내민 것이다. 다들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고경아가 가장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오늘 회식 있다는 걸 나만 몰랐던 거야? 감쪽같이 날 속였다, 이 말이지. 근데 경아 씨는 언제 선생님들과 저렇게 친해졌지? 후우! 회식 자리 엄청 어색하겠다.’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바삐 걸음을 옮기는 김지훈의 뒷모습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다.
신현수였다.
주말 당직이었고, 당직 교수도 자신에게 가장 신경을 쓰는 금경태 과장이었다. 마침 아뻬 환자까지 왔다. 최소한 퍼스트는 설 것이다. 어쩌면 수술을 줄지도 몰랐다. 그런데 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김지훈, 정말 바이패스를 네가 생각해 낸 거야?’
절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갑작스럽게 훌쩍 앞으로 달려 나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러다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왈칵 다가왔다. 이젠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었다. 반드시 그 이유를 찾아야 했다.
누군가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가르쳤단 말이었다. 머릿속에 유달리 떠오르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이준영 선생님이라면 아뻬를 하며 무슨 말씀을 하실까? 지훈이를 태우는 것처럼 내게도 똑같이 하실까? 아니야. 김지훈을 떠나 정말 이준영 선생님에게 배우고 싶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카리스마에 압도당했다. 그동안 김지훈과 수술을 하는 모습을 보며 경이롭다고 느꼈다. 그중에서도 어젯밤에 벌어진 수술은 백미였다.
혈관 수술이 전문인 신기동 교수가 아닌 이준영 과장의 당당하고 자신 있는 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누군가에게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이렇게 간절하게 들 줄은 몰랐다.
‘다음 텀에서는 반드시 내가 이혁민 선생님 파트를 돌아야 한다. 손일석, 만만하게 봤는데 결코 쉽게 볼 놈이 아니야. 논문 확실하게 쓰고, 실수 없이 확실하게 과장님 파트를 돌고야 만다. 정신 바짝 차리자.’
신현수가 각오를 다지고 있던 그 시간, 금경태 과장이 이준영 과장의 당직실에 서 있었다. 교과서들과 논문들이 꼬질꼬질할 정도로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준영, 이제 와 무엇을 하겠다는 거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은 내가 용납 못해. 손을 완전히 놓고 싶지 않으면 응급실에만 처박혀서 조용히 살아.’
오후에 있었던 진료 회의에서 하마터면 화를 참지 못해 얼굴까지 붉힐 뻔했다. 하필이면 바이패스를 한 환자가 진료 부장인 양승철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해졌다. 게다가 회의가 끝난 직후 커피를 마시던 양승철 교수가 이준영 과장까지 언급했다.
“이준영 선생님이 그 나이에 어떻게 서울 병원으로 다시 오셨나 했습니다. 솔직히 당시에는 재단의 결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이유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환자에 대한 판단과 수술하시는 모습이 내과 의사인 제 눈에도 정말 훌륭하시더군요.”
이번에 새로 병원장에 취임한 신상민 교수가 당연하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양 교수 말이 딱 맞아요. 불행한 사고만 아니었으면 정말 큰 성과를 내고도 남았을 사람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이사장님께서 인재를 알아보셨고, 우리 금 과장님이 흔쾌히 동의를 하신 덕이지요. 아! 이젠 부원장님이시죠.”
금경태 과장이 어색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혁민, 네가 신상민 병원장하고 친하지? 다들 한통속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힘을 합칠 줄은 몰랐어. 이번에는 내 뒤통수를 멋지게 쳤지만 이제 시작이야. 두고 보자. 신상민부터 시작해서 모조리 끌어내릴 테니까.’
이혁민 교수가 마치 눈치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처럼 금경태 과장 앞에서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설명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과장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이혁민 교수의 말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어려운 수술이었는지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한동안 이준영 과장과 신기동 교수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게다가 얼굴조차 보기 싫은 놈인 김지훈까지 거론됐다. 그런 전공의가 있었냐며 다들 놀라는 모습이 꼴도 보기 싫었다.
병원장인 신상민 교수가 한술 더 떴다.
“김지훈 선생은 내가 외과 면접을 볼 때 얘기를 해 봤는데, 생각까지 아주 올바르고 정말 뛰어났어요. 일반 외과 교수님들도 기대를 많이 할 것 같은데. 이 교수, 어때요?”
“말씀대로 우리 과에서도 기대를 정말 많이 하고 있고, 예상대로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만 가면 과장님들 모두 깜짝 놀랄 만한 외과 의사 한 명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거기에 신현수하고 손일석이 있습니다. 모두 2년차들인데 하나같이 뛰어납니다. 요새는 세 명이 선의의 경쟁까지 하는 것 같아 너무 좋습니다.”
“이 교수, 자랑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 자식 자랑처럼 전공의 자랑도 팔불출입니다.”
“하하하! 병원장님, 팔불출이어도 그런 놈들만 있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정갑수 사건 때문에 면목이 없었는데 이제야 좀 면이 섭니다.”
정갑수라는 소리에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이혁민, 굳이 정갑수를 거론하는 이유가 뭐야? 제길! 다들 그런 사건을 쉽게 잊지는 못하겠지. 확실하게 선을 긋지 않으면 두고두고 발목을 잡히겠어.’
양승철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교수, 나도 기대하는 놈이 있는데 중환자실에서 보니까 김지훈하고 잘 맞는 것 같아. 내과하고 외과는 서로 떨어질 수가 없는 관곈데, 제대로 한번 키워 보자구.”
“좋지. 공정식이 말하는 건가?”
“알고 있었어?”
“우리 과 하라고 리포트까지 준 놈을 내과에서 채 갔는데 어떻게 잊겠어?”
“이 교수,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과만큼 매력 있는 과가 어디 있어? 제 발로 온 거야.”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에 농담까지 하는 것을 보니 양승철 교수가 조금은 마음이 놓인 모양이었다.
전공의에 대한 욕심이 없는 의사는 없었다. 이혁민 교수와 양승철 교수의 말에 다들 자신들도 똑같은 생각을 한다며 즐겁게 웃었다.
한동안 김지훈 이름이 계속 오르내리자 금경태 과장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당시 생각이 다시 떠오르는지 눈빛을 굳힌 채 이준영 과장의 책상을 보던 금경태 과장이 이를 악물었다. 숨소리까지 거칠어졌다.
‘빌어먹을! 금방이라도 병원을 장악할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소리를 치더니, 진평호도 별수 없는 모양이군. 정한득, 네놈은 아예 얼굴도 안 비치는구나. 이렇게 되면 일단 신현수를 확실하게 내 손안에 넣어야 해. 이번 인사 조치도 결국 신현수의 미래를 염두에 둔 결과야. 신현수라!’
눈가를 좁히며 생각에 잠겼던 금경태 과장이 응급실로 나갔다. 수술 준비가 다 끝난 상태였다. 자신의 오더를 기다리는 신현수를 본 금경태 과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야망이 넘치는 신현수의 약점은 분명했다. 여느 전공의들보다 수술 욕심이 훨씬 더 많았고,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점점 조급해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그간 무시하고 신경도 쓰기 싫었던 김지훈이었다. 하지만 그동안의 상황과 오늘 진료 회의에서 나온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면 김지훈이 원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뛰어나다고 생각할수록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동기를 용납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마치 자신과 이준영 과장의 관계처럼 말이다.
이를 잘 이용하면 신현수는 결코 자신의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여겼다.
‘그래. 최고로 키워 줄 테니 넌 내 말만 잘 따르면 돼. 김지훈을 확실하게 밟을 수 있게 해 주마. 그렇다면 김지훈을 일단 내 손안에 쥐어야겠지? 그동안 눈길도 안 주길 잘했어. 등을 비빌 구석도 없는 놈이니 조금만 잘해 줘도 감지덕지하겠지. 내 파트를 돌 때 이준영에게서 떨어트리면 이거야말로 일석이조군.’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던 금경태 과장이 신현수를 불렀다.
“신현수, 이제 다시 손을 풀 때가 됐지? 그동안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보자.”
신현수가 2년차 중 처음으로 수술을 받았다. 정확하고도 규칙적인 손길 아래 아뻬가 진행됐다.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금경태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정규 수술 중 하나를 받아도 되겠다. 일단 담낭부터 제거해 보는 게 순서니까, 내가 미리 케이스를 말하면 열심히 준비해 와. 그나저나 내 앞으로는 응급 수술이 거의 없어서 문제야. 그런 수술들이 트레이닝에 얼마나 중요한데 응급 파트를 만들다니, 아쉽게도 그건 좀 성급한 결정이었어. 결국 그 피해가 너한테도 가잖아. 수술 한두 개로 의사 실력을 판단할 수도 없는 일이고.”
금경태 과장이 은연중 이준영 과장의 존재 가치를 폄하했다. 신현수가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혼내지 않았던 금경태 과장의 방식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수술을 잘해서 이러시는 걸까? 아버지가 재단 이사장이라는 사실 때문은 아닐까?’
자신에게 수술 결정을 하라는 이준영 과장의 모습과 가능한 한 많은 수술을 주고자 하는 금경태 과장의 모습이 겹쳤다. 돌연 어떤 모습이 정말 자신을 위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도 신경이 쓰였다.
문득 수술실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타는 김지훈이 떠올랐다. 그 정도로 혼나면 누구든 진저리를 쳐야 했지만 도리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었다.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김지훈을 라이벌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
즐거운 회식 자리여야 했지만 김지훈에겐 상당히 어려운 자리였다. 스승과 멘토에, 수술에 들어갈 때마다 무섭게 태우는 교수 앞에서 웃고 떠들 수는 없었다. 사실 전공의라면 교수 3명과 밥 먹고 체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나름 맛있다고 하는 마포 갈비집이었지만 입까지 소태 같아 갈비를 먹는 건지, 종이를 씹는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반면 이준영 과장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고 간호사, 많이 먹어.”
“네, 선생님.”
“이거 잘 익었다. 빨리 먹어. 맥주 한잔할까?”
잘 구워진 갈비는 모조리 고경아 차지였다. 배가 불러 못 먹는다고 젓가락을 놓을 때까지 이준영 과장이 여간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 김지훈은 먹든 말든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화도 거의 그들만의 리그였다.
술도 못 먹는 신기동 교수가 잔만 비면 가득 채워 주었다. 슬슬 이준영 과장에게서 멀어져 김지훈과 가까워졌다.
“김지훈, 한 잔 더 해.”
김지훈이 등을 꼿꼿이 세우고 무릎을 꿇은 채 잔을 받고는 고개를 돌려 잔을 비웠다. 연거푸 두 잔을 마신 김지훈의 얼굴이 화로처럼 시뻘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