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42화 (242/1,329)

제9화 2년차들 (2)

시간이 길어져 봐야 이준영 과장만 돋보이게 할 뿐이었다.

표정도 별로 좋지 않아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대로 끝났을 것이다. 금경태 과장의 심기를 건드려 봐야 좋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혁민 교수가 양해를 구하며 입을 열었다.

“과장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질문하겠습니다. 김지훈 선생, 이번 환자의 수술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했나?”

금경태 과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교수, 케이스 발표 때 그런 질문까지 해야 하나? 2년차 수준에 맞는 질문을 해야지.”

“예. 그렇긴 합니다만, 김지훈이 수술 중에 가장 먼저 바이패스를 언급했습니다.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궁금해서요. 이참에 목적이 뚜렷해야 정확한 수술 방법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도 알려 줄 겸 해서 말입니다.”

‘제법 뛰어나다고 말을 하는 것은 들었지만, 그 정도로 뛰어나? 설마 아니겠지. 우연한 일이었을 거야.’

금경태 과장으로서는 신현수보다 뛰어난 2년차가 있다는 사실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가장 신경을 쓰며 트레이닝을 시키는 전공의가 가장 뛰어나야 마땅한 일이었다. 더구나 신현수는 신동석의 아들이었다. 애써 무시를 하며 김지훈의 대답을 기다렸다. 들어는 볼 일이었다.

김지훈이 살짝 어깨에 힘을 주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예. 우리 과의 수술 목적은 당연히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 기본 전제기 때문에 이 부분은 배제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개복 당시 대장의 괴사 위험이 상당히 컸고, 환자가 고령이라 큰 수술을 견디기 어려운 상태로 판단했습니다.”

다소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발표를 하며 정리되기 시작했다.

“또한 소장을 이용한 인공 항문 형성술은 향후 환자의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대장 전 절제술을 피하고 대장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이패스 말고는 다른 수술은 생각하지 않았나?”

“대장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제가 알고 있는 다른 수술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공의들을 둘러보았다.

“맞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선택을 해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 선택이 올바르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 따라서 수술 전이든, 수술 중이든 목적을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 그래야 수술 방법을 아주 구체적이고도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다. 그게 결국 실수를 최대한 줄일 수 있게 해 주지. 다들 이 점을 명심해라. 안 그렇습니까? 과장님.”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이혁민 교수가 하자 인상을 쓰던 금경태 과장이 급히 표정을 바꿨다.

‘이혁민, 지금 날 농락하는 거야? 네 뜻대로 이준영까지 왔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날 무시한 대가는 꼭 치르게 될 거야. 기대해도 좋아.’

금경태 과장이 애써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음! 이 교수가 아주 좋은 말을 했어. 하지만 이게 생각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지. 끊임없이 노력하고 항상 잊지 말아야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는 생각이야. 김지훈, 우연히 한 일에 자만하지 말고 계속 노력해.”

의도야 어찌 됐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숙이며 크게 대답을 했다.

“예, 과장님. 명심하겠습니다.”

금경태 과장이 살짝 콧등을 찡그렸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지만 이혁민 교수부터 확실하게 밟아야 할 교수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여기에 김지훈까지 신경을 긁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놈이었단 말이지. 어쨌든 다음 텀으로 내 밑에 두길 잘했어. 확실하게 죽일 건지, 아니면 내 발판으로 삼을지는 좀 더 고민을 해야겠군. 잘만 이용하면 최소한 신현수가 내게 더 의존할 수 있게 만들 수는 있겠어.’

“그럼 이만 끝내지. 이 교수, 일과가 끝난 후 각 과 과장들하고 진료에 대한 미팅 있는 거 잊지 마.”

금경태 과장의 뒤를 따라 하나둘 회의실을 나섰다. 이준영 과장이 남아 있는 교수들과 환담을 나누었다. 그들이 누군지는 빤했다.

가장 집도 경험이 많은 삼사 년차들이 눈가를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수술 중 가장 어려운 때가 바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사소해 보이는 판단 착오가 때론 큰 문제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지도 교수들이 직접 수술에 참여하거나 확실하게 믿을 만하다고 해도 최소한 참관을 했다.

두 경우의 차이는 엄청났다. 교수들이 참관만 한 경우에는 환자가 퇴원할 때까지 조금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기에 이번 수술에서 보인 김지훈의 모습은 삼사 년차들에게도 상당한 자극이었다.

손일석이 회의실을 나와 중환자실로 향하는 김지훈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지훈아, 너 정말 대단한데. 니가 만날 고민하던 문제의 답이 그거였어? 야! 난 생각도 못했네. 그렇지. 우리도 언젠가는 교수님들 없이 집도를 해야 하는데, 그 전에 그런 자세를 딱 몸에 익혀 놔야 할 거 아냐. 얼라? 그런데 이 자식이 내 말을 콧구멍으로 들었나. 뭐야? 인마.”

“뭐가?”

“너 답을 찾으면 바로 나한테 얘기하라고 했지. 근데 그걸 너만 알고 있었던 거야? 이건 이인자의 자세가 아니잖아. 배신이야, 배신.”

“어휴! 이혁민 선생님 말씀은 이 환자의 경우고, 내가 탄 이유는 나도 정확히 몰라. 2년차가 됐다는 게 그런 의미인지 답을 주셔야 너한테 말을 해 주지. 그리고 솔직히 그 말이 우리한테 해당이나 되냐? 삼사 년차면 모르겠다.”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 말을 들으니까 그건 또 그러네. 갑자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주구장창 수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2년차의 자세는 도대체 뭐야?”

김지훈도 아직은 답답한지 한숨을 쉬며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환자 상태를 살피고는 의자를 끌어와 앉아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손일석이 환자를 보며 쓴 입맛을 다셨다. 대장 전 절제술을 받을 수도 있었던 환자였다. 김지훈 덕에 가장 최상의 결과를 얻었다. 친구이자 동기를 떠나 외과의로서 더 뛰어나고 싶었다.

‘옆에 있다 싶으면 어느새 한발 앞에 있단 말이야. 하지만 지훈아, 나도 만만치 않은 놈이다. 기다려. 그나저나 신기동 선생님 수술은 정말 예술이었어. 지나가면서 본 거하고 실제로 어시스트를 서 보니까 완전히 느낌이 다르네.’

혈관 수술을 전문으로 택하는 일반 외과 의사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손일석의 머릿속에서 신기동 교수가 정맥을 떼어 내고 바이패스를 하는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그동안 많은 수술을 보고 어시스트를 섰지만 혈관 수술만큼 가슴을 설레게 하는 수술은 없었다. 환자를 잃은 아픔을 잊을 정도였다.

“지훈아, 너 정 힘들 때 내가 신기동 선생님 수술 가끔 들어가 줄까? 정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옆에서 보는 내가 참 안타깝다. 니가 얼마나 힘이 들지 생각하면 마음이 다 아파. 지훈아, 어떻게 생각해?”

김지훈이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일석이 슬쩍 째려보며 헛기침을 했다.

“니가 수술 욕심이 많은 건 알아, 인마. 하지만 너도 사람이야. 그렇게 일하다 쓰러진다. 사실 밤이 더 힘들긴 하지. 그런데 이준영 선생님이 허락하시겠냐? 솔직히 난 겁나서 수술 못 들어간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신기동 선생님 수술을 대신 들어가 주는 거야. 그러니까 니가 잘 좀 말해 봐. 지금 니 꼬라지를 보면 허락하실 것 같은데, 어때?”

그래도 답이 없었다. 손일석이 주먹을 쥐며 김지훈을 노려보았다.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해, 인마. 이 정도 얘기를 했으면 반응이 있어야 할 거 아냐. 어? 야, 김지훈! 너 지금 자고 있는 거야?”

코 고는 소리만 나직하게 들렸다.

손일석이 입맛만 다셨다.

“이 자식이, 학교 다닐 때 수업 열심히 듣는 줄 알았더니 맨 앞에 앉아서 허구한 날 졸았구나. 아주 완벽하게 내 눈을 속이고 자빠져 자고 앉아 있네. 제길!”

도저히 깨울 분위기가 아니었다. 시계를 본 손일석이 한 시간 후에 깨워 주라는 말을 하고 중환자실을 나왔다.

그나마 두세 시간 눈을 붙였지만 갑자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간신히 의국에 도착한 손일석이 의자에 앉자마자 일어서야 했다. 오상익 교수의 회진이 시작된 것이다.

그 시간, 김지훈도 이준영 과장과 함께 시뻘게진 눈으로 회진을 돌고 있었다.

“김지훈, 오늘 저녁에 회식이다. 일곱 시까지 응급실 앞으로 와.”

“선생님, 오늘 회식하신다구요?”

“왜? 싫어?”

“아닙니다, 선생님. 저야 당연히 좋죠.”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울고 있었다.

연인은 스승보다 더 강했다. 체력이 조금이라도 남았다면 모를까, 지금은 잠부터 자고 싶었다. 내일 고경아와 데이트를 하려면 단 10분이라도 더 자야 했다. 전번처럼 데이트 내내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큰일 났네. 오늘 회식하면 내일 못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경아 씨에겐 뭐라고 하나. 다음에 회식을 하자고 하면 이 자리에서 바로 죽이시겠지?’

먹고 마시는 일이라면 사족을 못 썼던 김지훈이 울상을 짓고 말았다.

2년차들, 특히 김지훈에겐 수난 아닌 수난의 시간이었다.

남은 회진을 간신히 돈 김지훈이 중환자실 안에 있는 당직실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오늘은 회진 도는 것도 정말 힘드네.’

“인턴 선생, 한 시간 있다가 나 좀 깨워 줘.”

누군가 몇 번 흔든 것 같았다. 큰 소리까지 들린 것 같았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한참을 자다 김지훈이 뭔가 놀란 것처럼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3시간이나 잤다. 인턴을 노려보니 난 죄 없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부랴부랴 환자 상태를 확인하고 의국으로 뛰어올라 갔다. 최철한이 막 오더를 내고 있었다. 2년차가 오더 내는 시간에 늦다니 죽어 마땅한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김지훈, 넌 이준영 선생님하고 신기동 선생님 환자들 오더 내고 오후 회진 끝나는 대로 오프 가. 나하고 석재가 주말 당직이니까 중환자실 환자 걱정도 하지 말고. 알았어?”

“아닙니다, 선생님. 전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그리고 너 편하라고 오프 가라는 거 아니다. 내 마음이 편해지고 싶어. 널 보면 쓰러질까 봐 정말 조마조마해. 좋은 말 할 때 가서 자. 오더니까 오늘내일은 푹 자. 제발 부탁이다.”

4년차가 2년차에게 자라고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유석재의 웃음 속에도 걱정이 서려 있었다.

김지훈이 머뭇거리자 유석재가 눈에 콱 힘을 주며 빨리 일 끝내고 자라는 눈짓을 했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이런 선배들은 없었다. 가슴이 먹먹해진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의 차트를 모았다. 의국 한구석에 앉아 오더를 내고 이준영 과장과 신기동 교수의 회진을 돌았다. 마음이 찜찜했지만 오프 간다는 인사를 하고 중환자실로 향했다.

어차피 7시 전에 일어나야 했다. 이왕이면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라도 중환자실에서 자는 것이 편할 것 같았다. 잠깐 눈을 붙이고 중간중간 환자를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띠디디! 띠디디!

알람이 울렸다. 간신히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6시 반이었다. 혹시나 몰라 알람을 맞춰 놓지 않았다면 내처 잘 뻔했다. 피곤이 안 풀려 정신이 몽롱했지만, 스승인 이준영 과장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대충 씻고 옷을 차려입은 후, 환자 상태를 확인했다. 의외일 정도로 빠른 회복을 보여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간호사에게 급한 일이 생기면 삐삐를 쳐 달라는 말을 하고는 응급실 앞으로 나갔다.

김지훈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쁘게 차려입은 고경아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경아 씨, 여기 웬일이에요. 안 피곤해요?”

“전 괜찮아요. 약속이 있어서 나왔는데, 지훈 씨는 나한테 연락도 안 하고 어디를 가세요? 내일 아침까지 푹 잔다면서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준영 선생님께서 갑자기 회식을 하자고 하시잖아요. 그래도 내가 스승님으로 모시는 분인데 어떻게 안 나갈 수가 있겠어요?”

“스승님이요?”

고경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김지훈이 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전에 내가 이준영 선생님이 내 스승님이라고 말 안 했어요? 어떻게 그런 걸 기억 못하지?”

“어머! 이제 처음 들었는데 그런 말을 언제 했어요? 다른 여자한테 말하고 착각하는 거 아니에요?”

김지훈이 눈만 멀뚱멀뚱 뜬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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