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2년차들 (1)
중환자실로 향하던 중 이혁민 교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상황에서 우회 수술을 생각해 내다니, 김지훈이 때문에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저도 당황해서 전혀 생각을 못했는데 말입니다.”
“나도 속으로 놀라긴 했어. 그동안 신 교수와 이 교수가 잘 가르친 덕분이겠지. 신 교수, 어때?”
혈관 수술에 대한 김지훈의 경험은 오직 신기동 교수와의 수술뿐이었다. 혹시 그동안 이번 경우에 도움이 될 만한 수술을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기동 교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지금까지 가르친 것은 기술에 불과합니다. 판단에 관한 문제는 선생님이나 이 교수 덕분일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본 중에 가장 뛰어나고, 배우는 속도도 굉장히 빠른 놈입니다. 여기에 노력까지 하고 있으니,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욕심나?”
이준영 과장의 엉뚱한 물음에 신기동 교수가 웃었다.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죠. 근데 그게 제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혈관 수술에 열정적인 놈은 정말 보기 힘듭니다. 김지훈도 열심히는 하지만 다른 수술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더군요.”
“다행이군.”
뭐가 다행일까?
의아해하는 신기동 교수를 보며 이혁민 교수가 웃었다. 이준영 과장이 마치 별 의미 없다는 것처럼 성큼성큼 걸음만 옮겼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환자를 보는 김지훈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바이탈은 안정적이었고, 소변도 잘 나왔다. 환자의 의식이 조금은 흐렸지만, 고령에 수술 직후라는 것을 감안하면 통상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이준영 과장을 비롯해 교수들이 모두 모여 환자를 지켜보며 나직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김지훈과 공정식은 오더 때문에 머리를 싸맸다. 서도진이 선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도진아, 지금 졸 때가 아니다. 이런 오더는 나도 처음 내 봐. 우리 확실하게 하자.”
깜짝 놀란 서도진이 찬물에 세수를 하고 왔지만 눈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김지훈이 서도진의 어깨에 척 팔을 두르고는 공정식과 오더를 상의하기 시작했다.
수술 후 필요한 일반적인 처치 및 검사는 다른 환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문제는 바이패스 수술을 했기 때문에 항응고제를 투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훈아, 혈관 수술을 한 신장 파트 환자들처럼 항응고제를 쓰면 안 되겠지?”
“그 환자들이야 팔에 수술을 하니까 압박만 잘해 주면 별문제가 안 되지만, 이 환자는 다르지. 바이패스한 혈관에 혈전도 문제지만 자칫 수술한 부위에서 출혈을 할 수도 있잖아. 일단 최소량부터 시작하고, 혈액 응고 검사가 정상 범위를 유지하도록 용량을 조절하면 어떨까?”
“오케이! 그리고 흉부 외과에도 의뢰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도 혈관에 관련된 수술은 제일 많이 하잖아.”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이미 아침 일찍 바로 봐달라고 했다.”
“그럼 이제 마지막 관문만 남은 건가? 양승철 선생님도 오더 잘못 내면 무지하게 태우시거든.”
공정식이 은근히 긴장된 눈으로 슬며시 교수들을 보았다. 환자에 대한 상의를 마친 교수들이 스테이션으로 왔다. 이준영 과장이 오더를 확인하자 교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환자에게 필요한 처치와 검사를 빠짐없이 챙긴 오더에 교수들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누구보다도 신경을 쓰고 있을 양승철 교수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김지훈, 오늘 아침 주말 집담회 때 이 환자 케이스 발표해.”
“예? 오늘 아침에요?”
“그래. 회진은 집담회가 끝나고 돌자.”
짧게 대답을 한 이준영 과장이 중환자실을 나가자 모두들 뒤를 따랐다. 이혁민 교수가 힐끗 김지훈을 보며 웃었다.
“나하고 신 교수 아침 회진은 신경 쓰지 말고 케이스 리포트 작성해라. 환자 잘 보고.”
“예, 선생님.”
양승철 교수만이 남아 환자 곁을 지켰다. 조용한 복도를 따라 무언가 상의하는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김지훈이 암담한 눈으로 시계를 보았다. 새벽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케이스 리포트를 작성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 후, 복사까지 마치려면 시간이 정말 빠듯했다.
‘꼭 오늘 해야 하나? 네 시간 안에 작성하려면 너무 빡빡한데. 어후! 그나저나 오늘도 날밤을 새우네. 설마 난 잠을 안 자도 된다고 생각하시나? 이러다 쓰러지겠다.’
김지훈이 공정식에게 잠시 환자를 봐달라는 말을 하고는 서도진과 함께 부리나케 의국으로 뛰어올라 갔다. 필요한 책들을 챙기고 다시 중환자실로 와 구석에서 리포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서도진도 이제야 밀린 일을 시작했다.
30분마다 바이탈과 배 속에 연결된 심지를 확인하며 출혈 여부를 체크했다. 항응고제를 사용하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아직도 환자 곁을 지키고 있던 양승철 교수가 김지훈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김지훈, 고맙다.”
“아닙니다, 선생님.”
양승철 교수의 미소 때문일까? 아니면 스승의 오더이기 때문일까?
김지훈이 필사적으로 환자와 리포트에 집중했다. 눈이 감길 때마다 찬물에 머리를 감아 가며 사투를 벌였다. 간신히 환자에 대한 기본 병력과 수술 전후의 진단 및 수술 방법을 정리했다. 어느새 시계가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환자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중환자실 인턴을 불렀다.
“인턴 선생, 이 환자 잘 봐. 의국에 있을 거니까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다 싶으면 바로 연락해. 아홉 시까지 부탁한다.”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인턴이 고개만 끄덕였다. 마음으로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게 중환자실 인턴의 일이었다. 2년차가 날밤을 새워 가며 킵(keep)을 한 마당에 불만을 갖기도 어려웠다.
김지훈이 컴퓨터 앞에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자판은 아직도 눈에 익지 않았다. 1년차 때 집담회 발표를 빼고는 모든 차팅을 다 수기로 해야 했던 탓이었다. 근 한 시간에 걸쳐 독수리 타법으로 간신히 리포트를 작성했다.
‘이제 복사만 하면 되는데.’
인턴 고유의 일이었지만 아침 회진을 전후한 시간에는 절대 인턴에게 일을 시킬 수 없었다. 감히 교수와 4년차의 회진을 안내해야 하는 인턴의 시간을 빼앗았다가는 맞아 죽을 것이다.
김지훈이 복사를 하며 꾸벅꾸벅 졸았다. 다리가 휙 풀리면서 휘청거린 김지훈이 복사기를 잡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리포트가 뿌옇게 보였다.
‘졸려 죽을 것 같다.’
간신히 복사를 다 하고 슬쩍 시계를 본 김지훈이 급히 샤워를 했다.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쓰자 그나마 잠시 잠이 달아났다. 완성된 케이스 리포트를 읽으며 예상되는 질문에 대비를 했다. 중얼중얼 리포트를 읽던 김지훈이 이마를 주무르며 생각에 잠겼다.
‘이 환자를 수술한 목적이 무엇일까? 일단 살려야 한다는 것이겠지? 가만, 살려야 한다?’
일반 외과 수술에서 목숨과 직결되지 않는 수술은 거의 없었다.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탈장이나 유방 종물 정도였다. 신기동 교수의 혈관 수술도 결국 신장 환자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수술이었다.
환자의 목숨을 구한다는 것은 기본이자 원칙이었기에 목적이라기보단 대전제였다. 또한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만이 수술의 목적이었다면 이준영 과장에게 1년차 때처럼 혹독할 정도로 타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굳이 이혁민 교수가 조언을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분명 보다 구체적인 목적이 있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리포트를 찬찬히 읽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동안의 고민들이 조금씩 해결되는 것 같았다. 문득 스승인 이준영 과장에게 더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다음 주에 써도 되는 케이스 리포트를 수술이 끝나자마자 쓰라고 하신 이유가 이거였을까? 수술했을 때 들었던 생각을 정리하고 잊지 말라는 것일지도 몰라.’
불필요하거나 이유 없는 가르침은 없었다. 그동안 이준영 과장이나 이혁민 교수는 물론 신기동 교수도 단순히 수술을 잘하라는 의미로 태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사는 기술만이 뛰어나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소양과 품성을 갖춘다고 해서 끝은 아닐 것이다. 학문이라고 할 때는 그 속에 철학이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회의실로 향하던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눈앞을 가렸던 안개가 조금은 걷히는 것 같았다.
토요 집담회가 시작됐다. 짧은 시간 안에 끝나는 주중 집담회와는 달리 발표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시간이었다. 수술이 없어 시간이 넉넉한 탓에 다른 어떤 시간보다 교수들의 질문은 날카롭고 예리했다. 심한 경우 삼사 년차들도 진땀을 빼기 일쑤였다.
총치프인 금경태 과장 파트 4년차가 일주일 동안 있었던 수술 건수와 특징적인 수술들을 간략하게 발표했다. 수술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금경태 과장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인상을 구겼다.
‘혈전으로 막힌 대장 동맥에 바이패스를 했다고?’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1년차들의 발표가 전혀 들리지 않는지 입을 다문 채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모든 발표가 끝나고 케이스 발표만 남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금경태 과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케이스 리포트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준영, 신기동, 이혁민. 이 세 명을 어떻게 한다. 게다가 김지훈, 이놈은 또 뭐야?’
어떻게든 견제를 해야 할 교수들이 이젠 수술에서도 손을 맞추고 있었다. 거기에 꼴도 보기 싫은 놈의 이름까지 떡하니 쓰여 있었다.
Diagnosis : colon artery obstruction due to thrombi
(진단명 : 복수의 혈전에 의한 대장 동맥 폐쇄증)
Operation name : Bypass of colon artery
(수술명 : 대장 동맥 우회술)
Operator : prof. Junyoung Lee & prof. Kidong Shin
(집도의 : 이준영 교수 및 신기동 교수)
1st assistant : Jihun Kim. R2
(첫 번째 보조 의사 : 전공의 2년차 김지훈)
김지훈이 앞으로 나와 발표를 시작했다. 밤을 꼴딱 샌 데다 그간의 피로까지 오롯이 남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 모습조차 마뜩치 않은지 금경태 과장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케이스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내원 하루 전 발생한 급성 복통과 복부 팽만 등을 주소로 응급실을 경유해 입원한 칠십오 세 남자 환자입니다. 내원 당시 실시한 혈액 검사 및 복부 CT상…….”
발표를 듣던 금경태 과장의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
응급 수술을 해야 할지 결정하기도 쉽지 않은 환자였다. 게다가 이번 수술은 자신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운 수술이었다. 그런데 이준영 과장은 과감하게 개복을 결정하고, 수술을 완벽하게 성공시켜 자신의 실력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그동안 이준영 과장이 한 수술은 일반 외과 의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술뿐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항상 불안이 남아 있었고, 마침내 그 불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한때 인생 최고의 라이벌이었지만 나락에 빠졌던 이준영 과장이 화려한 부활을 알리고 있었다. 신장과 혈관 수술에서 탁월한 실력을 보이며 턱밑까지 쫓아온 신기동 교수까지 가세했다. 어떻게든 말이 퍼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대장 전 절제술 시행 후 환자를 잃은 오상익 교수가 감탄까지 터트리며 큰 관심을 보였다.
“간만에 케이스 리포트를 꼭 해야 할 환자와 수술이 떴네. 이준영 과장, 응급 상황에서는 우회 수술을 생각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을 텐데 역시 실력이 녹슬지 않았어. 대단해.”
이준영 과장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우회 수술을 제안한 건 제가 아니라 김지훈이었습니다.”
“김지훈?”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김지훈을 보았다.
자주 접했던 수술을 생각해 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응급 상황에서 대장 수술에 혈관 수술을 접목시키는 것은 누구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2년차 수준에서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오상익 교수도 놀랍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김지훈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잠깐 반짝인 기지에 불과한 일일 수도 있었다.
“음! 그랬군. 하여간 굉장히 어려운 수술인데 잘해 냈네. 수술 중에 특별히 힘들었거나 유의할 점은 없었나?”
“신 교수가 함께했고, 어시스트들도 제 역할을 잘해 줘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다.”
“지금 환자 상태는 괜찮고?”
이준영 과장의 눈길에 김지훈이 재빨리 답을 했다.
“현재 바이탈 안정적이며, 특별한 문제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항응고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출혈의 징후도 보이지 않는 상탭니다.”
“다행이군. 김지훈, 자네가 무척 힘들게 일한다는 건 알지만 환자에게 신경을 많이 써 주게.”
“예, 선생님.”
다들 궁금한 것이 많은 눈치였다. 하지만 금경태 과장이 시계를 보며 4년차에게 빨리 끝내라는 고갯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