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39화 (239/1,329)

제8화 무조건 살리는 것이 목적이다? (2)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이 결정을 내렸다.

“일석아, 이준영 선생님한테 먼저 노티를 드리는 게 맞을 것 같아. 그게 원칙이고, 시간도 아낄 수 있잖아.”

“지훈아, 수술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너한테 물어보신다며. 뭐라고 노티하려고?”

“서지칼 업도맨(surgical abdomen:외과적인 배).”

손일석이 눈가를 찡그렸다.

“막연하네. 결국 모른다는 소리잖아.”

“이준영 선생님은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시던데. 최소한 내과 환자는 아니라는 말이잖아. 뒤늦게 원인을 알아도 우리 과에 입원하고 있으면 빠르게 대처할 수 있고 말이야. 더군다나 난 저 환자 배를 바로 열어야 할 것 같아.”

“원인도 모르는데 배를 바로 연다고?”

“하루 만에 이 정도까지 진행됐다면 내일이면 훨씬 더 심해지지 않겠어? 기다릴 여유가 없을 것 같아.”

눈가를 좁힌 손일석이 중얼거렸다.

“난 항생제 쓰면서 지연시키고 원인을 찾았으면 좋겠는데, 넌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내 생각이야. 솔직히 이준영 선생님이 보시면 너하고 똑같은 판단을 내리실 것 같기도 해. 일단 노티부터 드려야겠어.”

김지훈이 당직실로 향하자 손일석이 졸래졸래 뒤를 따랐다. 책상에 앉아 뭔가를 보던 이준영 과장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손일석이 슬쩍 김지훈 뒤로 숨었다.

“수술할 환자 있어?”

“서지칼 업도맨이 의심되는 환자가 있습니다.”

“열어야 할 것 같아?”

“제 판단은 그렇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별말 없이 일어나자 손일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김지훈에게 수술 여부를 결정하게 했으면서도 정확하지 않은 진단명을 지나친 것이다.

‘외과 배라는 말은 진단명이라고도 할 수 없는데 이상하네.’

손일석과 함께 당직실을 나가던 김지훈이 책상을 쳐다보며 입술을 모았다. 외과 교과서와 수술에 관한 책들이 펼쳐져 있었다. 구석에는 논문까지 보였다.

‘지금도 공부를 하고 계시네. 후우! 정말 끝이 없구나.’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을 환자에게 안내했다.

신중하게 진찰을 하고 차트를 확인한 이준영 과장이 복부 CT를 보면서 물었다.

“김지훈, 의심되는 병명이 뭐야?”

“복막염입니다.”

“원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서지칼 업도맨(외과적 배)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야?”

“CT에서 보이는 대장 소견과 복수로 판단할 때 원인이 된 부위가 대장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만일 대장의 병변으로 인한 복막염이라면 위험도를 고려할 때 최대한 빨리 열어서 확인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병변의 크기가 작다면 CT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고려했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환자의 경우에는 삼사 년차라고 해도 바로 개복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데,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구나. 정확하게 잘 판단했다.’

복막염이 응급 수술이긴 하지만 바이탈이 흔들리지 않는 한 다소의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원인이 불확실한 경우 대개는 항생제를 쓰면서 염증 진행을 막으며, 최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린 후 수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만일 병변이 대장에 있다면 완전히 달리 대처해야 했다. 세균 덩어리인 변이 새어 나오기라도 하면 패혈증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 수술도 못하고 환자를 잃을 수도 있었다.

다시 한 번 신중하게 환자를 진찰한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보호자를 찾았다. 그때 이혁민 교수와 내과 스태프가 막 응급실로 들어왔다.

이준영 과장이 보인다는 말은 수술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내과 스태프를 소개하며 물었다.

“선생님, 수술이 필요한 상탭니까? 그리고 여기는 진료 부장을 맡고 있는 내과 양승철 교숩니다. 환자분이 아버님 되십니다.”

“안녕하십니까. 양승철입니다.”

“일반 외과 이준영입니다. 저도 정확하게 원인을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대장 쪽에 문제가 생기면서 복막염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최대한 빨리 개복을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원인도 모르는데 배를 연단 말입니까?”

“제 판단은 그렇습니다.”

양승철 교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켜볼 여유도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검사 결과를 볼 때 패혈증이 아직 오지는 않았습니다만, 아시다시피 패혈증이 발생하면 위험도가 크게 증가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측한 대로 대장 병변이 원인인데 뒤늦게 배를 연다면 수술 결과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수술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의사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예전에는 상당한 수술 실력을 자랑했다고는 하지만 10년 동안 음성에 있었다. 응급실을 맡은 지 이제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진료 부장직을 겸임하고 있기에 웬만한 사정과 상황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실력을 가졌는지도 모르는 의사의 말을 무작정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울 응급실을 맡은 이후 한 수술은 일반 외과 의사라면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하는 수술뿐이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가 환자였다.

양승철 교수가 슬쩍 이혁민 교수를 보았다.

이준영 과장도 그런 상황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자칫 자신과 양승철 교수 사이에 껴서 이혁민 교수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었다. 또한 더욱 정확한 판단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 교수의 판단도 들어 봅시다.”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든 이혁민 교수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환자를 살폈다. 모든 검사까지 세심하게 확인한 후 잠시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양 교수, 나도 이준영 선생님과 같은 의견이야. 일단 배를 열어 확인하는 게 좋겠어. 고령이셔서 수술 위험도가 크지만, 지금은 지켜보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아.”

양승철 교수가 한참을 고민했다. 일반 외과에서 가장 신뢰하는 의사가 바로 이혁민 교수였다. 그리고 아직은 확실하게 믿지는 못하지만 응급실을 맡고 있는 이준영 과장 역시 똑같은 판단을 내렸다. 일반 외과 전문의 2명의 소견이 같다면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 교수와 과장님의 판단까지 그렇다면 따라야지.”

이제야 조금은 얼굴을 핀 양승철 교수가 미리 와 있던 보호자들을 모두 불렀다. 은근히 이혁민 교수가 직접 설명해 주기를 바랐지만 이혁민 교수는 당연하다는 듯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이준영 과장이 보호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양승철 교수까지 동의를 한 이상 수술 동의에 문제는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김지훈이 서도훈에게 눈짓을 했다. 서도훈이 미리 작성해 둔 수술 스케줄을 들고 마취과로 달려갔다. 연락을 받은 서도진이 내려와 수술에 필요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마취과에서 10분 후 올리라는 연락이 왔다. 다른 때 같았으면 즉시 수술 방으로 올라갔을 김지훈이 스테이션 앞에 서서 서도진을 보았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먼저 수술 방으로 올라가려는 서도진을 불렀다.

김지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서도진, 너 환자 진찰했어?”

서도진이 흠칫 놀라며 입을 열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의국에서 차트를 정리하다 곧바로 내려와 환자를 진찰해야 한다는 생각도 못한 것이다.

“1년차 생활이 환자 진찰도 못할 정도로 힘들어?”

목소리를 높이진 않았지만 잔뜩 화가 난 목소리였다. 빨간 볼펜만 휘두를 뿐, 그간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는 김지훈이었다.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서도진의 눈에도 김지훈이나 손일석의 모습은 1년차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지금도 김지훈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이 돼 마치 눈병이라도 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환자를 위해서 하는 일이야. 일의 선후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기억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서도진을 노려본 김지훈이 수술 방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손일석이 옆에 따라붙으며 말했다.

“지훈아, 도훈이는 진찰했어?”

“그 자식도 안 했어.”

“그 와중에 어떻게 그걸 봤냐. 교수님들이 바글바글한데 그 앞에서 환자를 보는 것도 어렵긴 했겠지만, 나도 니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도훈이는 내가 교육시킬게.”

손일석이 수술 방 안까지 따라왔다.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넌 왜 들어와? 안 피곤해?”

“나도 이 환자 배 속이 어떤지 궁금해, 인마. 이준영 선생님과 니가 배를 열어야 한다고 판단한 게 솔직히 의아하기도 하고.”

외과 의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였다.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내리고 직접 확인하는 것만큼 살아 있는 지식은 없었다. 다만 다들 몸이 너무 힘들어 하지 못할 뿐이었다. 어쩌면 손일석은 지금 몸을 혹사시켜서라도 갑작스럽게 사망한 환자를 잊고 싶을지도 몰랐다.

‘일석이, 이 자식도 정말 만만히 볼 놈이 아니야.’

이런 동기가 있어 자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서도진과 서도훈 때문에 났던 화가 스르르 풀렸다.

수술실 안팎이 의사들로 바글거렸다.

이준영 과장과 김지훈, 그리고 서도진과 인턴이 수술 팀이었다. 이혁민 교수와 양승철 교수가 덧 가운을 입고 들어와 있었다. 여기에 마취과 전공의와 손일석, 그리고 서도훈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신현수까지 보였다.

‘현수는 오늘 오프잖아? 야!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야간 당직 때 해야 할 마지막 수술에 들어온 고경아에게 김지훈이 슬며시 눈길을 주었다. 주어진 일이긴 했지만 이 밤에 쉬지도 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마취가 시작되면서 두런두런 들리던 말소리가 싹 사라졌다. 모니터와 인공호흡기에서 나는 소리만이 들렸다.

수술이 시작됐다.

사아악!

은색의 예리한 메스가 정중앙의 피부를 길게 갈랐다.

지지직! 지지직!

지혈을 위해 전기 소작기를 사용할 때마다 하얀 연기와 함께 살타는 냄새가 비릿하게 퍼졌다. 오래간만에 수술실에 들어온 양승철 교수가 은근한 역겨움에 눈가를 찌푸렸다.

사각! 사각!

수술용 가위가 백색선과 복막을 잘랐다. 복막이 열리자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대장이 주루룩 배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 순간 누군가 나직한 신음을 터트렸다. 대장 전체가 옅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무영등 불빛의 포커스를 대장에 맞추자 정상적인 색깔인 분홍빛이 보이는 듯 마는 듯했다. 대장이 죽어 가고 있었다.

김지훈의 눈짓에 서도진과 인턴이 강하게 복벽을 끌었다. 이준영 과장이 가스가 정체돼 빵빵해진 대장을 제쳤다.

상행 결장부터 에스 결장까지 모조리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소장과 직장의 분홍빛 색깔과는 선명하게 대비됐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분명한 사실은 대장의 혈류가 차단됐다는 것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단 하나였다. 대장에 혈류를 공급하는 동맥 어딘가가 막혔다는 말이었다.

‘이런 경우 동맥부터 확인해야 한다.’

김지훈이 대장과 장간막을 제치며 대장 동맥이 시작되는 부위가 가장 잘 보이도록 시야를 확보했다. 이준영 과장이 힐끗 김지훈을 보고는 대장 동맥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신중하게 촉진했다.

이준영 과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대략 2~3센티미터에 걸친 혈관이 탄력을 완전히 잃은 채 돌처럼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손으로는 동맥 박동조차 감지되지 않았다.

“이 교수, 좌우측 대장 동맥의 경화증이 심한 데다 혈전으로 인해 양쪽이 거의 다 막힌 것 같아.”

이혁민 교수와 양승철 교수가 탄식 같은 신음을 터트렸다.

동맥 경화증과 혈전으로 인한 좌우측 대장 동맥 폐쇄증이었다. 실낱처럼 이어진 틈을 따라 미세한 혈류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가면 수 시간 내에 대장이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었다. 눈에 안 보이는 혈전이 떠다니다 남은 통로마저 막는다면 불과 일이십 분 내에 죽을 수도 있었다. 약물 치료는 이미 늦었고, 가능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동맥을 뚫어 줄 방법이 없다면 수술 방법은 단 하나였다.

대장 전 절제술(Total colectomy).

적막만이 흘렀다.

김지훈이 잔뜩 인상을 썼다. 수술이 성공하고 퇴원을 한다고 해도 남은 인생 동안 인공 항문에 의지해야 했다. 그것도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소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관리를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불과 하루 전에 대장을 모두 제거한 환자가 몇 시간 전에 사망했다. 원인 질환이 다르기 때문에 목숨은 건질지도 모르지만 고령이라는 점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 정도 고령이면 수술을 견뎌 내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아. 다른 방법이 없을까? 동맥을 뚫어 줄 방법이?’

잠시 동안의 정적을 깨고 양승철 교수가 입을 열었다.

“과장님, 그러면 대장을 모두 제거하는 수밖에 없습니까?”

“양 교수님, 지금으로서는…….”

이준영 과장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김지훈이 뭔가 생각이 난 듯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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