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무조건 살리는 것이 목적이다? (1)
그날 밤, 응급 수술은 뜨지 않았다. 대신 소소한 환자들이 밤새 괴롭혔다. 이런 날이 더 힘들었다. 6시간에 걸친 수술이 준 피로가 더해지면서 김지훈이 처절하게 무너졌다. 누가 1년차인지 구분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현수야, 논문 쓰는 거 힘드냐?”
“힘들어. 세계 학횐데 심사나 통과할지 모르겠다.”
그렇게도 깔끔했던 신현수도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대충 빗은 머리에 넥타이도 반쯤은 풀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감길 것 같은 눈에는 피곤이 가득했다. 2년차가 해야 할 일에 김지훈 파트 일까지 돕는 데다 논문 때문에 거의 잠을 자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현수야, 너도 참 독한 놈이다. 이러다 이론에서는 완전히 뒤처지는 거 아냐? 씨펄! 이렇게 된 거 수술만큼은 확실하게 배워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네.’
‘넌 이준영 과장님과 신기동 선생님께 수술을 배우고 있는데 논문이라도 확실하게 써야지. 일단 이것부터 확실히 제치고, 그다음에 수술에 신경을 쓰는 수밖에 없어.’
한껏 각오를 다지던 김지훈과 신현수가 숙소로 올라가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손일석이 보이지 않았다.
“이 자식은 오프라고 나갔나?”
그 시간, 손일석이 의국에서 머리를 싸매고 논문을 쓰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막 올라온 서도진이 흠칫 놀랐다. 일이 없든 있든 툭하면 날밤을 새다시피 하다니,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2년차들이었다.
금요일 오후, 김지훈이 졸려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무려 3주가 다 되도록 받은 오프라고는 달랑 평일 오프 두 번이었다. 오늘 밤만 지나면 드디어 주말 오프가 가시권 내에 들어오는 것이다.
마침 고경아도 오늘을 마지막으로 야간 당직이 끝이었다. 일주일간 고단하게 일을 했으니 토요일은 쉬어야 할 것이다.
‘좋았어. 딱딱 맞네. 일단 내일은 일과가 끝나자마자 잠부터 자자. 내리자면 최소한 열다섯 시간인데, 기록 한번 세워 볼까? 일요일에 뭐 하지? 어디서 만날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던 김지훈이 수술 방에 걸려온 콜을 받았다. 이혁민 교수가 유방 수술에 들어오라고 한 것이다. 유석재를 놔두고 왜 자신을 불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술 방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안색을 확 굳혔다.
‘논문! 어후! 제길! 거의 한 달이 다 지났는데 손도 못 댔으니 이 일을 어쩐다. 혹시 수술 중에 어디까지 썼냐고 물어보시면 이번에는 뭐라고 하지?’
그동안 가끔 이혁민 교수가 논문 진행에 대해 물었다. 그때마다 어물쩍 넘어갔고, 별다른 말을 듣지는 않았다. 하지만 툭하면 생각이 날 정도로 상당한 부담이었고, 이혁민 교수의 웃음이 예사롭지만은 않았다.
수술 방에 내려가 수술할 환자의 병명을 확인한 김지훈의 안색이 시커메졌다. 미세 석회와를 동반한 유방 종물이었다. 질환만 유방암이었으면 딱 논문 제목이었다.
논문 때문에 부른 것이 확실했다. 김지훈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수술실에 들어갔다.
이혁민 교수와 단둘만의 수술이 시작됐다.
유방 종물은 대개 국소 마취로 수술을 했다. 그러나 이 환자의 경우 깊은 곳에 위치한 데다 병변이 확실하게 잡히는 경우가 아니라 전신 마취를 해야 했다. 유두와 유방의 경계선을 2센티미터 정도 연 이혁민 교수가 종물을 찾으며 말했다.
“논문 준비는 어디까지 했나.”
“선생님, 그게…….”
이혁민 교수가 열심히 손을 놀리며 웃었다.
“니 이러다 논문 제출도 못하는 거 아니가?”
“최선을 다해 쓰겠습니다, 선생님.”
“신 교수 하나면 모르지만, 이준영 선생님한테까지 타는데 정신이 없어서 그게 쉽겠나. 논문은 시간도 시간이지만 머리가 돌아야 한다.”
김지훈의 상황이 어떤지 모를 리가 없었다. 더구나 의도적인지는 모르지만 오후 회진 때 이준영 과장과 비슷한 시간에 회진을 돌며 서로 얼굴을 보았다. 가끔은 응급실에서도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의 웃음소리가 들리곤 했다. 마치 오래된 친구들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지금도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이준영 선생님이나 신 교수나 네게 좀 과도한 걸 요구하거든.”
김지훈의 눈이 커졌다.
“예? 과도한 거라니요?”
“뭐, 그런 게 있다. 나도 확실히 왜 태우는지는 모르지만, 이거 하나는 명심해라. 수술을 하는 건 그냥 병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목적이 있어. 그래야 수술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지 않겠나.”
이혁민 교수가 대장 전 절제술을 한 환자를 보며 막연하게 느꼈던 점을 말하고 있었다. 불현듯 찾아온 한 줄기 빛이었다.
“선생님, 그러면 궤양 천공에 의한 복막염 수술에서도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 겁니까?”
“그런 경우 수술법이 어떻게 되지?”
“단순 봉합을 하거나 궤양 부분을 포함해 일부를 절제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위를 삼분의 일 정도 절제하는 경우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알고 있네. 그럼 어떻게 그중 하나를 택할 건데. 그냥 감이야? 아니면 경험이야? 단순 봉합과 위를 잘라 내는 수술은 차이가 나도 너무 나잖아.”
대답이 궁했다.
그동안 수술 과정은 술술 읊었지만 수술 방법의 선택은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김지훈의 눈이 반짝였다.
“선생님, 그럼 비장 절제술의 경우 빠르게 제거하고 출혈을 잡아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입니까?”
“수술 안 하면 당장 죽을 환자를 수술하는데 다른 목적이 뭐가 있겠나. 비장을 반만 자를 수는 없잖아. 아뻬도 마찬가지야. 완전히 제거해야만 환자가 살아. 수술의 크기와 상관없이 둘 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수술이다.”
김지훈이 하마터면 소독된 장갑을 낀 채로 이마를 칠 뻔했다. 수술의 목적을 정확히 잡아야만 적절한 수술 방법을 택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 생각을 갖고 퍼스트를 설 때 진정으로 집도의와 호흡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 명료한 목적과 한 가지 수술 방법밖에 없는 경우에는 단 한마디도 듣지 않았다. 반면 다양한 수술법이 존재하는 수술에서는 재가 되도록 탔다. 결국 손이 아니라 생각과 판단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 그동안 무작정 따라만 간 거야. 스스로 목적을 갖고 정확한 수술법을 생각한다면 단순이 퍼스트를 서는 게 아니라 직접 수술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잖아. 스승님과 신기동 선생님이 가르치시려는 게 이걸까?’
지금 당장 응급 수술이 떴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소 상기된 것 같은 김지훈을 보며 이혁민 교수가 웃었다.
“이런 말 했다는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니 선배나 동기들이 화낸다. 그리고 이젠 내 수술에 집중해야지. 나도 화나면 무섭데이.”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혁민 교수가 말한 선배는 이준영 과장과 신기동 교수가 틀림없었다. 힘차게 외친 김지훈이 수술에 집중했다.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수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수술이 끝난 후, 이혁민 교수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지금처럼 해 봐라. 잘했다.”
이혁민 교수의 부드러운 가르침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중환자실에서 난리가 났다. 전화를 받은 손일석이 사색이 돼 총알처럼 달려 나갔다. 대장 전 절제술을 한 환자의 심장이 갑자기 멈춘 것이다. 오상익 교수까지 나와 환자를 살폈다. 파트 전체가 최선을 다했지만 심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심정지의 원인이 고령 때문인지, 다른 요인이 있는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분명 대장 전 절제술을 받은 것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렇게 큰 수술을 견디기에는 환자의 육신이 너무 약했을지도 몰랐다.
수술 환자가 사망했다는 말에 의국 전체가 침울해졌다. 평소 오더를 낼 때는 떠들썩했던 의국이 조용하기만 했다.
한참 만에야 올라온 손일석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삼사 년차들이 숙소로 올라간 후에야 김지훈도 입을 열었다.
“일석아, 어떻게 하냐. 이런 경우 불가항력이잖아.”
“아냐. 내가 계속 킵을 해야 했어. 환자가 순조롭게 회복된다고 방심했던 거야. 그놈의 논문이 뭐라고.”
손일석이 얼굴을 감싼 채 한숨만 쉬었다.
누구에게나 환자의 죽음은 큰 영향을 미치지만, 손일석에게 이번 경우는 충격이 더 컸다. 수술한 지 이틀도 되지 않은 데다 참고 논문을 찾는다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이 벌어진 탓이었다. 침묵만이 흘렀다.
신현수가 손일석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일석아, 네 잘못 아니야.”
“어레스트가 났을 때 나라도 옆에 있었으면 살았을지도 몰라. 제길! 호석이는 이제 1년찬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네.”
손일석이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안호석도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런 충격을 벗어나는 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다.
김지훈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환자의 고통과 죽음에 무감각한 것이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도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평생 잊지 말아야 할 마음이라는 생각이 겹쳤다.
무거운 정적을 뚫고 삐삐가 울렸다.
응급실이었다.
‘일석아, 오늘은 나 혼자 볼게. 마음 다잡아라.’
김지훈이 아무 말 없이 일어서자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일석이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훈아, 응급실이야?”
“응, 응급실이네. 일단 내가 먼저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아니야. 오늘 응급실 당직 나잖아. 힘들 텐데 쉬고 있어.”
아무리 힘들어도 의사는 자신의 일을 미룰 수는 없었다. 한 사람의 죽음에 매몰되면 또 한 사람의 목숨을 놓칠 수 있었다. 김지훈이 말없이 응급실로 향하는 손일석과 서도훈의 뒤를 따랐다.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내과 2년차인 공정식이 반색을 하며 김지훈과 손일석에게 손짓을 했다.
“지훈아, 일석아, 잘됐다. 우리 과 스태프 선생님 아버님이신데 배가 심상치가 않아.”
“그래? 환자는?”
75세 남자 환자였다. 하루 전에 발생한 갑작스러운 복통과 복부 팽만 및 오한을 주소로 내원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환자를 먼저 진찰한 후 뷰박스 앞에 섰다. 손일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훈아, 빤뻬리 같은데 사진상에 별게 안 보이네.”
“그러게. 프리에어도 없고, 병력도 안 맞네. 그렇다고 외상을 입은 적도 없고 말이야.”
김지훈이 다시 한 번 환자를 진찰하며 복막염을 유발시켰을 만한 요인이 있는지 물었다. 갑작스러운 복통 이외에는 특별한 소견이 없었다. 검사 결과와 복부 사진 및 CT까지 몇 번이고 확인하면서 얼굴만 찡그렸다.
가장 정확한 검사인 복부 CT상 대장 전체가 다소 확장돼 있었고, 부분적으로나마 복수가 관찰됐다. 하지만 그 외에는 외과적으로는 어떤 의미 있는 소견도 보이지 않았다.
“정식아, 복막염이 의심되는데 정확한 원인을 모르겠네. 간혹 장염이 너무 심한 경우에도 이런 증상을 보이는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배 속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나도 그런 의심이 들긴 해. 아무리 봐도 우리 과 배는 아니거든. 조금 있으면 우리 과 스태프 선생님이 이혁민 선생님과 함께 오신다니까 잠깐만 기다려 줄래?”
“이혁민 선생님도 오신다고?”
“응. 두 분이 잘 아시나 봐.”
김지훈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단 이혁민 선생님을 기다려? 그래도 응급실 과장님이고 복막염이 의심되는데, 스승님께 먼저 노티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일석아, 복막염이 강하게 의심되지?”
손일석이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응. 그렇긴 한데, 원인으로 짐작되는 게 없으니까 찜찜하네. 일단 이혁민 선생님을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
응급실 체계가 바뀌기 전에는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금경태 과장이 온다고 해도 환자에 대한 수술 여부는 이준영 과장이 먼저 판단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