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37화 (237/1,329)

제7화 의사로서의 능력과 한계를 통해 배운다 (2)

김지훈을 노려보던 이준영 과장이 장갑을 벗었다.

“마무리해. 이젠 실망할 것도 없겠다.”

마지막 한마디가 김지훈의 모든 것을 초토화시켰다. 고경아만 없었으면 눈물이 났을지도 몰랐다.

배를 닫으며 서울에 와 처음으로 마무리를 맡겼다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스승인 이준영 과장의 태움은 곧 배움이었다.

‘제가 아직도 모자라서 죄송합니다, 스승님. 반드시 무엇을 가르치려 하시는지 알아내겠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수술실을 나갔다. 김지훈이 힘차게 외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고경아와 신현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동안 이런 모습을 몇 번이나 본 안호석만이 태연했다.

옷을 갈아입던 이준영 과장이 씨익 웃고 있었다.

‘그래야지. 일반 외과 의사라면 이 정도 타는 것쯤은 웃으면서 넘길 줄 알아야지. 김지훈,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 고맙다. 이 교수, 신 교수, 자네들도 정말 고마워.’

결코 물러서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은 김지훈을 성장시킬 수 있는 소중한 밑거름이었다.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기만 하면 날개를 달고 비상할 것이다.

어느새 창밖이 환하게 밝아 오고 있었지만 피곤이 느껴지지 않는지 이준영 과장의 발걸음이 힘찼다.

***

이준영 과장의 말 한마디에 주말 당직까지 연이어 서야 했다. 감히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잠이 부족해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았다. 그나마 일요일 낮에 잠을 자 간신히 두통은 면했다.

점점 더 바빠졌다. 이준영 과장의 환자는 물론 신기동 교수의 환자까지 늘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의 안색이 점점 더 나빠졌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김지훈만이 아니었다. 2년차들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워낙 일을 열심히 하는 탓도 있었지만 논문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틈만 나면 자료실과 기록실에 처박혀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신현수가 당직 때마다 수술실을 기웃거렸다. 어느 틈엔가 손일석까지 가세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2년차들의 몰골이 가관이었다. 1년차들이 힘들다는 소리를 입에도 담지 못했다.

‘이거 완전 총체적 난국이다. 논문도 언제 쓸지 모르는데, 이젠 저 자식들이 스승님 수술까지 훔쳐보고 있네. 이러다 정말 완전히 밀리는 거 아냐?’

별별 불안한 생각이 다 들었지만 현실은 결코 김지훈을 놓아주지 않았다. 주중 내내 신 나게 타는 일이 반복됐다. 짙은 어둠 속에 숨은 것처럼 답이 보이지 않았다.

목요일 오전, 간만에 여유가 찾아와 잠시 조는 사이 어김없이 삐삐가 울렸다. 웬만해서는 호출을 하지 않는 병동에서 찾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김지훈이 전화를 걸자, 병동 간호사가 수술 방에서 오상익 교수 파트 4년차가 찾는다는 말을 전했다.

‘무슨 일이지?’

다른 파트 4년차가 찾는데 전화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곧바로 수술 방으로 달려가자 김지훈을 본 4년차가 손짓을 했다.

“지훈아, 너 굉장히 힘든지는 알지만 오상익 선생님 수술 좀 들어가야겠다.”

“예? 제가요?”

“응. 일석이도 수술 들어가서 우리 파트에서 들어갈 사람이 아무도 없네. 현수도 안 보이고, 다들 어디 갔는지. 자식들이, 빠져서 말이야. 쯧!”

4년차가 짜증을 냈다. 좋게 말해도 오더가 떨어지면 무조건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 게 2년차였다. 힐끗 시계를 보니 다행히 신기동 교수의 수술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김지훈이 급히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4년차가 인턴과 함께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인턴에게 손짓을 하며 자리에 선 김지훈이 물었다.

“선생님, 그런데 갑자기 무슨 수술이에요?”

인턴보다 더 초췌한 모습에 4년차가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였다.

“응. 희귀한 케이슨데 다발성 대장암 환자야.”

“다발성 대장암이요?”

“대장을 따라 암이 두 군데서 발생을 했어. 다음 주 수술 예정이었는데, 오늘 사진을 보니까 그중에 한 곳이 막혔네. 일단 뚫어 주든지, 아니면 그냥 계획했던 수술을 해야지. 뭐, 완전 케이스 리포트감이야.”

간이나 폐는 몰라도 소화기에는 다발성으로 암이 발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럼 무슨 수술을 하죠?”

“글쎄다. 암이 발생한 두 부분을 각각 절제를 할 것 같지만, 일단 배를 열어 봐야 확실히 결정할 수 있겠지. 보호자한테 설명하니까 잘 못 알아듣더라. 그것도 걱정이네. 그나저나 2년차 꼴들이 이게 뭐냐. 누가 보면 1년차만 일곱 명이라고 하겠다.”

곧 오상익 교수가 들어왔다. 한 번도 어시스트를 선 적이 없었다. 내심 기대를 품은 김지훈이 세컨 자리에 서면서도 눈을 반짝였다. 피곤이 잠시나마 뒤로 물러났다.

수술이 시작됐다.

오상익 교수의 손은 의외로 느렸다. 송재덕 과장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느렸다.

김지훈이 자꾸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부릅떴다. 느긋하게 배를 연 오상익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김지훈도 잠이 확 달아났는지 심각한 얼굴로 배 속을 보고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네. 다 잘라야겠다. 간호사, 보호자 한 명 들어오시라고 해요.”

배 속이 엉망이었다. 상행 결장에 발생한 암이 대장을 막고 있었다. 게다가 에스 결장에 발생한 암이 직접적으로 상행 결장을 침범해 단단히 붙어 있기까지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장 동맥의 근위부까지 암이 직접적으로 전이돼 있었다. 김지훈으로서는 어떻게 수술을 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설마 이 환자도 개복술로 끝나나?’

김지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환자의 배를 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움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곧 환자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이미 두 차례나 그런 환자를 보았기 때문에 더욱 답답했다.

환자의 아들이 들어왔다. 4년차가 나직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경우 말귀가 어두운 노인들보다는 젊은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오상익 교수가 느릿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드님, 잘 들으세요. 대장에서 발생한 암들이 서로 들러붙었고, 동맥까지 침범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상황입니다.”

“그러면 수술이 불가능합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인공 항문만 만들고 수술을 끝내는 방법이 있고, 아니면 대장 전체를 들어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제 판단으로는 대장을 모두 들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술의 위험도도 크고, 결국 인공 항문을 만들어야 하긴 하지만, 암이 침범한 동맥에서 출혈이 발생하면 바로 사망하게 됩니다.”

보호자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대장을 모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경우 절제가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환자분의 예후도 달라지고, 사시는 동안 불편하겠지만 암으로 인한 통증은 거의 없을 겁니다. 다만 수술이 크고, 환자분이 고령이기 때문에 수술 후 합병증으로 사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보호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자 오상익 교수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아드님 입장이라면 사망 위험을 감수하고 대장을 절제하는 데 동의하겠습니다. 암을 남겨 두면 얼마 못 버틸 것이고, 그동안 겪어야 할 고통은 말도 못할 겁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출혈이 발생하면 병원에 와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오상익 교수는 단순히 수술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수술 전에 확고한 계획과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망 위험이 상당히 큰 대장 전 절제술을 이렇게 확고하게 설명하진 못할 것이다.

심각한 기색으로 고민하던 보호자가 동의를 했다.

다시 한 번 수술 후 사망 가능성을 강조한 오상익 교수가 수술을 시작했다. 김지훈이 꿀꺽 침을 삼키며 환자의 배 속을 보았다.

구미에서 보았던 환자와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암이 이미 동맥까지 침범했다. 출혈을 일으키기 않았다는 점이 다행이었지만, 박경일 과장은 결국 손을 대지 못했었다.

‘오상익 선생님은 이걸 어떻게 제거하실까?’

수술실에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장은 위치와 모양에 따라 다섯 부위로 나뉜다. 소장에서 바로 이어지는 상행 결장에 이어 평행 결장과 하행 결장이 있다. 그 밑으로 에스 자 모양으로 생긴 에스 결장과 마지막으로 항문과 이어지는 부분이 직장이다.

상행 결장과 하행 결장은 절반쯤 후복막에 묻혀 있어 고정돼 있는 구조물이었고, 평행 결장과 에스 결장은 자유롭게 움직였다. 직장은 하복부 깊숙한 곳에 위치해 역시 고정돼 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오상익 교수가 상행 결장과 하행 결장이 후복막에 묻혀 있는 부위를 박리했다. 느릿느릿하지만 과감했고, 의외로 출혈도 거의 없었다. 혈관이 없는 부위를 따라 박리했기 때문이었지만, 오랜 경험과 숙련된 손이 아니면 불가능한 과정이었다.

‘야! 여기가 말로만 들었던 혈관이 없는 부위구나. 피곤해도 들어오길 정말 잘했어. 이런 수술을 언제 또 보겠어?’

어느새 상행 결장과 하행 결장이 모두 드러나며 대장 전체가 자유롭게 움직였다.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부위가 남았다. 오상익 교수가 암이 침범한 동맥에서 먼 곳부터 장간막과 제거해야 할 조직들을 하나하나 남겨야 할 부분과 분리했다.

마침내 암이 침범한 동맥 부분만 남았다. 박경일 과장이 실패했던 부분이었다. 오상익 교수의 손이 더욱 신중해졌다. 대장 총동맥이 대동맥과 연결된 부위를 찾아 박리할 때는 너무도 긴장을 해 손에 땀이 맺혔다.

오상익 교수도 긴장이 심했는지 간호사에게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달라고 할 정도였다. 그 틈을 타 김지훈이 눈을 부릅뜨고 해부학적 구조와 수술 과정을 눈에 박았다.

수술이 이어졌다. 심장이 뛸 때마다 꿈틀거리는 굵은 동맥을 대동맥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묶었다. 혈류가 차단된 대장이 진한 회색빛으로 변했다.

에스 결장과 직장 사이를 자르고 직장 부위를 봉합해 막아 버렸다. 이어, 소장과 연결된 상행 결장까지 잘랐다. 1미터가 훌쩍 넘는 대장이 완전히 분리돼 배 밖으로 나왔다. 2개의 암 덩어리가 완전히 제거된 것이다.

“치프야, 소장으로 인공 항문을 만드니까 수술 후 신경을 바짝 써야 한다. 나이가 많아서 걱정이야.”

“예, 선생님. 영양과 전해질 균형부터 피부 손상까지 확실하게 잡겠습니다.”

소장으로 인공 항문을 만들고 나면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었다. 고형 변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항상 설사 같은 변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처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과 수분까지 마구 빠져나오게 된다.

이것이 결국 피부를 심하게 상하게 하고, 영양에서 전해질 불균형까지 수많은 문제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다른 질환이 동반되면 젊은 환자에게도 사망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수술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모든 위험성을 감안한다고 해도 암을 제거하는 것이 환자에게 더 유리하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오상익 선생님은 이런 수술을 어떻게 바로 결정할 수 있었을까?’

문득 이혁민 교수의 결정이 떠올랐다. 정반대의 결정이었지만 역시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아마도 수술을 하는 목적이 명확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에 따라 수술을 어떻게, 어디까지 할지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병변이 있으니까 무조건 제거하고 본다는 생각은 분명 아닐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는 순간 김지훈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아뻬를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왜 복막염과 비장 절제술을 할 때 스승님의 말씀이 달라졌을까?’

수술 중에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인공 항문을 만드는 과정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단순히 장을 피부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만이 아니었다. 제대로 만들어 주어야만 복부 근육이 항문 괄약근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었다. 배변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환자의 삶의 질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였다.

이 과정 역시 뚜렷한 목적하에 시행되고 있었다.

모든 수술이 끝났다.

Total colectomy with ileostomy(대장 전 절제술 및 회장을 이용한 인공 항문 형성술).

무려 6시간에 걸친 수술이었다. 김지훈에겐 피곤한 시간이 아니었다. 절대적이고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오상익 교수를 보며 손이 빠르고 느림은 결코 수술 실력과는 상관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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