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36화 (236/1,329)

제7화 의사로서의 능력과 한계를 통해 배운다 (1)

토요일 새벽.

10명이 넘는 교통사고 환자들이 단체로 들어왔다. 사고가 꽤 컸는지 부상 정도가 심해 응급실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연락을 받은 김지훈과 신현수가 서도진과 함께 내려왔다. 일반 외과는 100일 당직 기간 동안 응급실은 항상 2년차가 함께 내려오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1년차가 먼저 보고 2년차에게 노티를 하는 다른 과였다. 불과 열흘이었지만 이미 외과 계열 1년차들의 피로는 한계에 근접하고 있었다. 더구나 새벽이었다.

일반 외과 전공의 3명과 응급실 인턴들이 숨 가쁘게 움직였다. 복합적인 손상이 많아 손이 달렸다. 그렇다고 함부로 다른 과 오더를 낼 수도 없었다.

“간호사, 수액 달고 바로 복부 촬영합시다. 그리고 저 환자는 복부 CT 찍어요.”

“간호사, 여기 드레싱부터 합시다.”

“이 환자는 수처 준비 미리 해 놔요.”

일반 외과 문제가 의심되는 환자들의 처리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간호사들 역시 잠시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지 못했다. 하지만 노티를 받은 1년차들이 내려오질 않았다.

“정형외과, 흉부외과 1년차들 연락 됐어요?”

“연락은 됐어요.”

“신경외과하고 성형외과는?”

“금방 내려온다고 했는데…….”

당연히 환자 치료가 지연되기 시작했다. 다른 환자들까지 내원하는 통에 더욱 손이 부족했다. 불과 30분 정도 지났을 뿐이지만 어느 환자도 치료와 진단을 완료하지 못했다.

‘이제 열흘밖에 안 지났는데 이 자식들이 뭐 하는 거야? 깨지든 말든 그냥 내가 다 오더를 낼까?’

도떼기시장처럼 변한 응급실을 보며 김지훈이 인상을 팍팍 썼다. 결국 다른 과 1년차들에 직접 연락하기 위해 전화기를 잡았다.

그때 당직실 문이 열렸다. 이준영 과장이 뚜벅뚜벅 걸어와 스테이션 앞에 섰다. 환자를 제때 처리하지 못해 스승님까지 나왔다는 생각에 김지훈이 당황하고 말았다. 힐끗 김지훈을 본 이준영 과장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간호사, 다시 전화해요.”

“네, 과장님.”

간호사가 바짝 긴장한 채 열심히 다이얼을 돌렸다.

“선생님, 응급실인데요. 이준영 과장님께서 빨리 내려오시래요.”

(이준영 과장님이요?)

무척이나 놀라는 목소리였다. 전화를 받은 1년차들이 채 5분도 되지 않아 우르르 응급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준영 과장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목을 움츠리며 바로 환자를 향해 달려갔다.

‘어라? 그간 스승님이 다른 과 환자들을 가끔 봐주셨나? 그동안 몇 번 본 것처럼 애들이 겁을 확 집어먹었네.’

“김지훈, 넌 뭐 해?”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환자를 보았다.

눈이 시뻘건 1년차들이 졸음도 잊고 빠르게 환자를 처리했다. 이준영 과장은 단지 서서 지켜볼 뿐이었다. 그동안 한 말이라고는 고작 전화하라는 말과 넌 뭐 하냐는 말 딱 두 마디뿐이었다.

응급실이 순식간에 평정됐다. 자신의 환자들 치료를 마친 1년차들이 꾸벅 인사를 했다.

“수고했다.”

기분 좋은 말을 듣고도 도망치듯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차례차례 나오는 복부 CT를 보던 김지훈과 신현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환자 상태에 대해 상의했다. 김지훈이 안호석에게 오더를 내리고는 이준영 과장에게 노티를 했다.

“선생님, 비장 파열이 의심되는 혈복강 환자가 있습니다.”

“CT 보자.”

뷰박스(view box)에 걸린 CT를 본 이준영 과장이 바로 오더를 내렸다.

“수술하자.”

이미 검사 결과는 다 나왔고, 수술 준비도 마친 상태였다. 신현수와 바이탈을 유지시키고 있던 서도진이 수술 스케줄을 들고 마취과로 올라갔다.

김지훈이 긴장된 기색으로 복부 CT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른 부분 손상은 없으니까 열자마자 바로 비장부터 절제를 하면 되겠네. 드레인은 두 개만 넣어도 충분하겠지? 에휴! 또 새까맣게 탈 텐데, 수술 계획만 세우면 뭐하나.’

입맛을 쩝쩝 다시던 김지훈이 흠칫거렸다.

고경아!

이번 금요일부터 일주일간 야간 당직이었다. 그동안 신기동 교수에게 신 나게 타는 모습만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준영 과장에게 타는 모습까지 보여야 할 판이었다.

이중고였다.

연락을 받고 수술 방으로 올라가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수술에 필요한 기구들을 정리하고 있는 고경아를 보는 순간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거렸다.

‘제길! 내가 경아 씨 앞에서 한두 번 탔나. 일단 수술에만 집중하자. 비장 절제가 일차 목표다.’

수술실에 들어온 이준영 과장이 슬쩍 고경아를 보고는 자리에 들어섰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수술이 시작됐다.

마취를 하면 혈압이 더욱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비장 절제술은 속도가 생명이었다. 빠르게 배를 열었다. 수술용 탭과 석션기를 이용해 배 속에 찬 피를 제거했다. 목적이 분명했기에 김지훈의 손이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따뜻한 물로 배 속을 닦고, 파열된 비장이 드러나자마자 바로 제거에 들어갔다. 이준영 과장의 트라우마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준영 과장과 김지훈이 한마디 말도 없이 오직 수술에만 집중했다.

어느 틈엔가 무슨 이유인지 신현수가 덧 가운을 입고 수술실에 들어와 있었다. 세컨과 써드를 서는 안호석과 인턴만이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신현수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자칫하면 어시스트를 서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준영 과장의 수술은 빠르고 간결하면서도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김지훈의 손은 마치 한 쌍의 톱니바퀴인 것처럼 어우러지고 있었다.

뇌리를 강타하는 충격이었다.

‘이준영 선생님의 수술이 이런 거였나? 대단하다. 김지훈, 네 실력이 정말 이 정도였어?’

신현수의 기척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고도의 집중력이었다.

배를 연 지 불과 30분 만에 비장이 제거되고 주변 손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송재덕 과장만큼 빠른 수술이었다.

따뜻한 물로 배 속에 남은 피를 제거할 때가 돼서야 이준영 과장이 신현수를 보았다. 김지훈도 그제야 살짝 눈인사를 하고는 다시 수술에 집중했다.

“뭐야?”

“예. 2년차 신현숩니다. 이 환자와 같이 사고를 당했는데 뒤늦게 들어왔습니다. 복막염이 의심돼서 노티 드리려고 왔습니다.”

‘신현수? 이 교수가 김지훈만큼 뛰어난 놈이라고 한 그놈? 3년차 뺨친다고 했으니까 믿을 수 있겠군.’

“이 교수에게 니 말 들었다. 그래서?”

신현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준영 과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수술해, 말아.”

신현수에게 이런 경험은 없었다. 삼사 년차에게 노티를 하거나, 아니면 금경태 과장이 직접 보고 수술 결정을 내렸었다. 더구나 복막염 환자였다.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신현수가 김지훈의 재촉하는 눈빛에 입을 열었다.

“해야 합니다.”

“준비해서 올려.”

“예, 알겠습니다.”

‘날 처음 보셨는데 환자도 안 보시고 내게 결정을 하라고 하신 거야? 뭐지? 내 판단을 그냥 믿으시는 건가?’

응급실로 내려가는 내내 신현수의 얼굴이 펴지질 않았다. 갑자기 이혁민 교수에게 자신에 대해 들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신뢰일 것이다.

불현듯 어깨가 무거워진 신현수가 다시 한 번 꼼꼼하게 환자를 진찰했다. 복구 CT를 뚫어져라 보고, 또 보았다. 복막염이 확실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숨이 나왔다. 김지훈은 항상 반드시 자신이 책임지고 결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환자를 보아 온 것이다.

‘김지훈이 뛰어난 이유가 이런 일들 때문일까?’

이준영 과장은 또 어떤가!

불과 열흘 만에 응급실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말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수술을 하는 모습을 보며 이준영 과장이라는 소리에 김지훈이 왜 손을 번쩍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카리스마가 대단하시다.’

신현수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김지훈의 수술 실력이 왜 뛰어난지 알 것 같았다. 병원을 경영하기 위해서 반드시 갖춰야 할 모습을 보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신현수의 눈이 번쩍번쩍 빛을 내기 시작했다.

수술실을 깨끗이 청소하는 동안 회복실에서 안호석과 함께 오더를 내던 김지훈이 눈가를 좁힌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왜 한마디도 안 하셨지?’

타면 속상하고, 안 타면 불안했다. 뭘 잘했는지, 잘못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고경아 앞에서 안 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 경아 씨 얼굴을 아시잖아. 설마 그래서?’

김지훈의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 시간, 이준영 과장이 수술실을 정리하고 있는 고경아를 보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눈이 예쁜 간호사. 이름이 고경아가 맞죠?”

“네, 선생님.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네요?”

“의료봉사까지 함께했는데 어떻게 잊겠어요.”

“어머! 선생님, 말씀 놓으세요.”

이준영 과장의 입이 슬며시 찢어졌다. 그러더니 대뜸 말을 놓았다. 역시 이준영 과장이었다.

“그럴까? 고 간호사, 그때 만나던 놈은 아직도 만나나?”

“네. 만나고 있는데 얼굴 볼 시간이 없네요.”

고경아의 눈이 살짝 찢어졌다. 잠깐이지만 감히 이준영 과장에게 눈을 흘기다니 고경아도 만만치 않았다. 이준영 과장이 씨익 웃으며 딴청을 부렸다.

“그놈이 원래 데이트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던데, 고 간호사가 잘 리드해야지. 그리고 이제 2년찬데 시간이 많이 날 수도 없고.”

“어머! 선생님, 다른 2년차 선생님들은 이틀에 한 번 꼴로 오프예요. 그놈만 일주일에 하루구요.”

어쭈! 갑자기 죽이 척척 맞는다.

“어쩌겠어. 그래도 이 주에 한 번은 주말 오프잖아.”

“그럼 뭐해요. 이번 주는 제가 당직인데요.”

이준영 과장이 입을 내밀며 생각에 잠겼다.

“흐음! 그거 곤란하게 됐네. 그럼 이번 주 당직 세우고 다음 주에 오프를 보낼까? 대신 저녁 한 끼는 회식 겸해서 나하고 그놈까지 해서 셋이 같이 먹는 거야.”

“정말요? 저는 좋죠.”

“오케이! 그럼 다음 주 토요일에 우리 예쁜 고 간호사하고 그놈하고 회식하자.”

“알겠습니다, 선생님.”

고경아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졌다. 이준영 과장이 웃으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부모가 없다고 했지. 그래도 날 스승이라고 여기는 놈인데, 따뜻한 밥 한 끼는 사 줘야지.’

드르륵! 드르륵!

간이침대 바퀴 소리가 들렸다. 복막염 환자가 수술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준영 과장이 헛기침을 하며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고경아 역시 뭔가 눈치를 챘는지 입을 싹 닫았다.

‘흥! 만날 탄다더니, 타긴 뭘 타? 그러면 내가 더 위해 줄 줄 알았나 보네.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이나 하고. 이렇게 좋으신 선생님이 그럴 리가 없지. 그럼 이제 신기동 선생님만 변하시면 되겠네.’

아무것도 모른 채 수술실로 들어온 김지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긴 한데 딱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곧 복막염 환자의 수술 준비가 시작돼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신현수가 수술실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마취를 하는 동안 습관처럼 수술 과정과 계획을 말했다.

눈을 감고 김지훈의 말을 듣던 이준영 과장이 메스를 들었다. 혈복강 환자와는 달리 좀 더 느린 속도로 수술을 진행했다. 신현수가 슬금슬금 들어와 수술을 지켜보았다.

‘이 자식은 신경 쓰이게 또 왜 이래. 설마?’

이준영 과장의 수술을 보고 반하지 않을 전공의는 없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신현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장의 패를 들킨 것처럼 알 수 없는 초조함을 느끼던 김지훈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배가 열리고 파열된 소장을 찾는 순간 이준영 과장의 표정이 이상해진 것이다. 급히 손을 맞추던 김지훈이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김지훈, 너 자꾸 이럴래. 비장 수술할 때의 김지훈은 어디 갔어? 어떻게 그 몇 분 사이에 원래 모습대로 돌아갈 수 있지? 한심한 놈.”

시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인 고경아와 인생 최대의 라이벌인 신현수까지 있는 마당이었다. 손상 부위를 모두 확인하고 봉합에 들어가자 아예 융단 폭격이 시작됐다.

“내가 실망시키지 말라고 했지.”

“너 지금 뭐 해야 하는지 몰라? 도대체 어디서 헤매고 있는 거야? 처음 해도 이것보다는 잘하겠다.”

“어쭈! 이젠 아예 1년차구나.”

한 줌 재가 되어 가는 김지훈이 식은땀을 흘렸다.

고경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신현수는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다는 표정만 지었다. 수술은 순조롭기만 했다. 들리는 말과는 달리 이준영 과장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할 줄도 몰랐다.

드레인(심지)까지 넣은 후에야 폭격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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