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의사의 한계 (1)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가자. 근데 지훈아, 너도 만나는 사람 있지?”
마치 비밀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리 조심했어도 누군가는 봤을 수도 있었다. 일부러 소문낼 일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숨길 일도 아니었다.
“응. 사실은 나도 있어.”
“언뜻 들은 말이 사실이었네. 그런 건 빨리빨리 말을 했어야지, 하마터면 나만 손해 볼 뻔했잖아. 하여간 넌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돼.”
“미안하다, 서연아. 만난다는 사람과 잘됐으면 좋겠다.”
“고마워. 너도 잘되기를 바랄게.”
의외로 수월하게 일이 풀렸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먼저 나와 계산을 하려던 김지훈이 입을 쫙 벌렸다. 정말 놀랄 일이 많은 식당이었다.
“얼마요?”
“예. 텍스까지 삼십오만 원 나왔습니다.”
‘텍스면 세금이란 소린가? 아니, 세금은 왜 받는 거고, 삼십오만 원은 또 뭐야. 이거 반달 치 월급이네. 우와! 두 번 먹으면 월급 날아가는 거잖아.’
비쌀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엄청나게 비싼 집이었다. 지갑을 열던 김지훈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현금 20만 원이 다였다. 그것도 윤서연의 씀씀이를 대충 알고 있기에 나름 많이 가져온다고 온 돈이었다.
난감한 얼굴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윤서연이 다가오며 웃었다. 아무 말 없이 지갑을 열며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익숙하게 카드 결제를 한 윤서연이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지훈아, 카드 발급해 달라고 하면 바로 나와. 의사 됐으면 카드 한 장 정도는 가지고 다녀. 이런 일이 또 벌어지면 그땐 어떻게 할래?”
“그러네. 저기, 내가 내일 바로 갚을게. 미안하다.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네. 알다시피 내가 이런 데는 처음이라서 말이야.”
윤서연이 콧등을 찡그렸다. 솔직한 게 좋았다.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이젠 한때의 기억으로 남겨야 했다.
“됐어. 우리 집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부자야. 걱정 말고 가. 미안한데, 난 일이 있어서 병원에 못 데려다줄 것 같아. 혼자 가도 되지?”
“그럼. 나이가 몇인데.”
주차장으로 가 윤서연이 차를 탈 때까지 지켜보았다. 김지훈을 보며 손을 흔든 윤서연이 창문을 올렸다.
‘잘 가, 지훈이. 넌 내 욕심대로 안 되겠지? 아마 넌 이렇게는 며칠도 못 살 거야. 나도 네 방식대로는 절대 못 살아. 이게 서로를 위한 길이 맞길 바라. 지금 만나는 사람과도 행복하기를 바랄게.’
윤서연의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부르릉!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하얀 차를 보며 김지훈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섭섭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아쉬움이나 미련이 아니라 왠지 윤서연의 태도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정말 만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서연아. 난 친구로 남을게. 그게 어렵다면 동기로 남는 건 괜찮지 않을까?’
거리를 환하게 밝힌 간판과 네온사인 사이를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온갖 차들이 강남 대로를 꽉 메운 채 움직이지 못했다.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다 보니 어느새 한강이 보였다.
문득 고경아와 승희가 떠오른 김지훈이 공중전화를 찾았다.
“훈철이 형, 시간 되시면 술 한잔하실래요?”
(야! 김지훈, 니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이 자식! 오래간만에 집에 일찍 들어왔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미처 그 생각을 못했다.
“예? 아후! 아니에요, 형님. 저 그냥 들어갈게요.”
(어딜 들어가, 인마. 어디야? 바로 나갈게. 나도 마침 할 얘기도 있고, 술 생각까지 난 참이었어.)
“형수님하고 승희가 있잖아요.”
(승희, 외갓집 갔다. 우리 자유야, 인마. 그리고 요새 병원에서 안 좋은 일 있었다며. 처제한테 다 들었어. 겸사겸사 얘기도 할 겸 와이프랑 같이 나갈게.)
같이 먹자는 한수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이 약속 장소를 정했다. 막상 만나기로 하니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사랑을 해야 할지.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지, 잘못한 일은 없는지.
누군가 고민을 들어 주고, 상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고맙고 행복했다.
그날 밤, 술이 오른 정훈철이 흥분을 이기지 못했다. 정갑수의 일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분노를 일으키고 있었다.
“지훈아, 이게 방송을 타기에는 좀 약하지만 혹시라도 다른 일까지 겹치면 꼭 말해. 내가 아주 그냥 패가망신을 시켜 줄게. 의사하고 공무원이 말이야. 그게 뭔 짓이야.”
한수임은 고경아와 이명희에 대한 말이 나오자 눈물까지 흘렸다. 김지훈이 분위기와는 달리 이상스러울 정도로 행복한 느낌에 젖어들었다.
행복하고 홀가분한 느낌은 딱 거기까지였다.
오전 오후 회진을 돌고 나면 등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마다 이준영 과장과 신기동 교수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에 눈물로 소매를 적셨다. 하얗게 재가 되는 건 덤에 불과했고, 답답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아뻬 수술에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데, 다른 수술에서는 점점 더 심하게 태우시네. 도대체 이유가 뭐야? 이유를 물어봐도 답은 안 해 주시고, 2년차라는 말씀만 하시니 정말 갑갑하다.’
가끔 이혁민 교수의 수술을 들어가면 그나마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렇다고 칭찬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살살 태운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었다.
“김지훈, 니 2년차다.”
사실 같은 말을 들었다. 이혁민 교수 특유의 부드러운 말투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밤마다 응급실에서 떡을 쳤다. 응급 수술이 아니더라도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는 최소 2시간이었다. 가끔 악어라도 보는 날에는 기분까지 우울해졌다. 어쩌면 그렇게 복장을 긁는 말을 잘하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욕까지 나왔다.
‘개새. 4년차가 왜 응급실까지 내려와서 지랄을 떨어. 정형외과 1년차 애들도 참 불쌍하다.’
하도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다 보니 콜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툭하면 김지훈을 찾는 구내방송이 나왔다. 결국 김지훈이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 놓고 잊었던 삐삐까지 꺼냈다.
작년에 전공의들과 수련의 모두 하나씩 받았던 삐삐는 애물단지였다. 최신 기기라지만 연락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익숙하지 않았다.
수술실에 있거나 응급실에서 난리를 치고 있을 때는 삐삐가 울려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차라리 방송을 하는 것이 훨씬 빨랐다.
하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허구한 날 방송에 이름이 오르내리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개 일 못하거나 땡땡이를 치는 전공의들이 방송을 많이 타는 탓도 있었다.
‘이놈의 삐삐가 필요할 줄은 생각도 못했네.’
삐삐! 삐삐!
나직한 알람 소리와 함께 구내선 번호가 찍혔다. 삐삐를 확인한 김지훈이 응급실에 전화를 걸었다. 환자가 있다는 소리에 김지훈이 기지개를 펴며 신음 소리를 냈다.
“야! 또 수술이야? 삐삐까지 써야 할 정도로 바쁘다니 부러워. 일주일에 신기동 교수님 수술만 대충 일곱 개 전후에, 이준영 선생님 수술까지 하면 퍼스트만 열 번 이상을 서겠네. 힘들고 잠을 못 자도 기분은 좋겠다. 부러워.”
손일석은 삐삐까지도 부러운 모양이었다. 숙소를 다녀온 손일석의 허리띠에 떡하니 삐삐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도 부러워하던 손일석이 일주일 만에 고개를 흔들었다.
신기동 교수가 태우는 것까지는 손일석도 별일 아닌 것처럼 지나쳤다. 하지만 우연히 이준영 과장과 수술하는 모습을 본 직후 완전히 달라졌다.
“후우! 다음 텀으로 이혁민 교수님 파트 도는 거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사람을 아주 죽이네. 음성에서 어떻게 버텼어? 와! 소름이 다 돋더라. 그나저나 이놈의 삐삐는 울리지도 않는 걸 왜 차고 다녔을까?”
손일석이 입맛을 다시며 삐삐를 홱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아무리 좋은 기기라도 써야 보배지, 쓸모가 없으면 폐품에 불과했다. 김지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석아, 1년차와 2년차의 차이가 뭘까?”
“넌 며칠 전부터 왜 그 얘기만 하냐? 많잖아, 인마. 드레싱 안 하지, 양방 뜨면 수술 들어가서 퍼스트 서지, 논문도 쓰잖아. 그리고 수술도 더 많이 받겠지. 얼마나 많아? 아! 너 그런데 논문은 쓰고 있어?”
김지훈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시간이 모자라는 정도가 아니었다. 틈틈이 참고 논문을 찾고, 환자 케이스를 모으고 있지만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솔직히 초조할 지경이었다.
“논문도 문제네. 이러다 이혁민 선생님한테까지 된통 혼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어후! 뭐가 문제지.”
옆에서 참고 논문을 읽으며 말이 없던 신현수가 고개를 들었다. 피곤에 찌든 김지훈의 눈이 벌겠다. 1년차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1년차라면 모를까, 2년차가 돼서도 저렇게 일을 하면 배우는 게 있긴 있을까?’
“김지훈, 배우는 건 있어?”
손일석이 휙 신현수를 째려보았다.
“현수야, 친구를 부를 때는 이름만 부르는 거야. 너 왜 지훈이 부를 때는 꼭 성을 붙이냐. 견제하는 거야?”
“손일석, 갑자기 왜 그래?”
“어쭈? 이젠 나까지 그렇게 불러? 이 자식이! 이거 정신을 못 차리네. 너 그렇게 계속 딱딱하게 굴면 우린 그냥 동기로밖에 안 남는다. 생각 잘해라. 술 한잔하고 싶어도 이럴 땐 정이 뚝 떨어져요.”
예전 같았으면 하지도 못할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손일석이 대놓고 핀잔을 주어도 신현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면역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그만큼 친해졌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손일석을 툭툭 쳤다.
“뭔 개소리야. 다 친구지. 현수야, 배우는 게 있냐고? 한번 타 봐. 그러면 엄청나게 많은 걸 배울 거다. 문제는 뭘 가르쳐 주시는지 모른다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두 선생님 다 수술 들어갈 때마다 퍼스트를 이따위로 서냐며, 아직도 1년차냐고 하셔. 도대체 차이가 뭘까? 우리 중 제일 똑똑한 신현수의 답 좀 들어 보자.”
“계속 그러셔?”
“그럼, 인마. 이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다.”
신현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볼펜을 돌렸다.
분명 송재덕 과장은 물론 이혁민 교수도 김지훈이 수술을 잘한다고 인정을 하고 있었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준영 과장과 신기동 교수가 끊임없이 같은 말을 한다면 이유가 있다는 의미였다.
‘과장님도 내겐 칭찬만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는데 뭘까? 갑자기 실력이 떨어졌을 리도 없잖아. 뭔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 하는 말이 분명해. 그게 무엇인지 나도 반드시 알아야 해. 그러려면 수술을 들어가 봐야 한다는 말인데 답답하네.’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긴 신현수를 본 손일석이 손을 흔들며 난리를 쳤다.
“야야! 신현수! 고민하지 마, 인마. 너 답을 알아도 말 안 할 거지? 그러니까 아예 생각을 하지 마. 지훈아, 빨리 답을 찾아서 나한테만 살짝 알려 줘. 어차피 내가 일인자고, 니가 이인자잖아.”
“알았어. 근데 뭘 알아야 말을 해 주지.”
2년차들의 생각을 모으면 답이 나올지도 몰랐다.
고민도 잠시였다. 이내 응급실에서 콜이 왔다. 복막염이 의심된다는 인턴의 말에 김지훈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죽었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천광호와 함께 응급실로 내려갔다. 천광호가 먼저 환자를 보고, 이후 신현수가 다시 확인을 했다. 마지막으로 김지훈이 필요한 사항을 챙기고 이준영 과장에게 노티를 했다. 그리고 결과는 똑같았다.
“김지훈, 정신 안 차릴래? 넌 2년차야.”
그 말이 왜 이렇게 가슴에 박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세컨을 선 서도진마저 하얗게 변했다.
한숨을 푹푹 쉬며 의국에 올라왔을 때, 2년차는 아무도 없었다. 멍청히 시계를 보던 김지훈이 필사적으로 졸음을 쫓으며 참고 논문 하나를 읽었다.
채 몇 장 읽지도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수술 기록을 작성하던 서도진이 깨우지도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낮에 잠깐 시간이 더 많다는 걸 빼면 우리랑 다를 것도 없네. 나도 2년차 때 저렇게 되는 거 아냐?’
순간 소름이 돋은 서도진이 몸을 떨며 팔을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