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정말 갑갑하다 (3)
마취과 전공의가 아직도 놀란 눈으로 물었다.
“지훈아, 내가 보기에는 수술 정말 잘 끝났는데 저 선생님 왜 저래? 뭐 잘못한 거 있어? 2년차를 왜 이렇게 태워?”
“당연히 제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그러시는 거죠.”
2년차의 여유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회복실에서 오더를 내는 안호석을 보던 김지훈이 바짝 긴장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어떤 걸 놓친 거지? 편하게만 하는 것만이 퍼스트의 역할이 아니라면 도대체 또 뭐가 있는 걸까? 아직도 과정만 생각한다는 말씀은 또 뭐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김지훈을 본 안호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오더 다 냈습니다.”
“응? 그럼 올라가서 수술 기록 작성해. 으휴! 호석아,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걸까? 아니다. 니 눈에 보일 정도면 나도 알았겠지. 내가 탄 건 기록에서 빼라.”
김지훈이 한숨을 푹푹 쉬며 농담을 던졌다. 언제나 그렇듯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안호석도 긴장을 너무 많이 했는지 어깨를 주무르며 병동으로 올라갔다.
홀로 남은 김지훈의 고민이 깊어졌다.
‘생각해 보니까 스승님만이 아니라 신기동 선생님도 2년차라는 말을 강조하셨잖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지? 분명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것이 아닐 텐데,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야.’
한참 동안 깜깜한 회복실에서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어느덧 새벽 5시였다. 회복실에 있는 동안 연락이 안 됐을 수도 있었다.
재빨리 응급실로 내려간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별다른 환자는 없었다. 숙소로 올라가 잠깐 눈을 붙이려던 김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병동으로 향했다. 어느새 창밖의 어둠이 물러나고 있었다.
‘한두 시간이라도 편하게 주무셨을까?’
아무리 편해도 병원 잠자리가 집보다 나을 수는 없었다.
잠시 응급실 쪽을 보던 김지훈이 새로운 날을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김지훈은 1년차보다는 더 잤을까?
드레싱만 안 할 뿐이지, 회진을 도느라 1년차만큼이나 바빴다. 김지훈이 오전 일과가 끝나고 잠깐 짬을 내 휴식을 취하며 혀를 내밀었다.
‘이렇게 되면 회진 돌고 타고, 회진 돌고 타고의 연속인가? 우이 씨! 각오는 했지만 2년차 생활이 왜 이러냐.’
한숨만 나왔다. 특히 아직도 수술실에서 탄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질 지경이었다.
턱을 괸 채 눈가를 문지르던 김지훈이 깜빡 졸았다. 누군가의 기척에 흠칫 놀란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눈을 비볐다. 병동 간호사인 문순옥이 앞에 서 있었다.
“선생님, 죄송한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예, 그래요. 무슨 일인데요?”
“저, 사실은 다음 주에 우리 애 아빠가 입원을 해요.”
“입원을요? 어디가 안 좋으신데요?”
문순옥 간호사의 얼굴빛이 상당히 좋지 못했다. 이마를 만지며 머뭇거리다 말고 눈가를 붉혔다.
“위암이래요. 다음 주에 이혁민 선생님께 수술을 받기로 했어요. 크기가 좀 크고 임파선에 전이까지 됐다고 하네요.”
누구나 아플 수 있지만 안면이 있는 사람이나 그 가족이면 더욱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이런 일은 2년차와 상의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문순옥을 보며 말했다.
“위암이요? 후우! 걱정이 크시겠어요. 그런데 수술 문제라면 이혁민 상생님과 직접 상의하셔야죠.”
“네. 이미 말씀은 다 들었어요. 한 가지 부탁을 드리려구요. 힘드신지 알지만, 혹시 우리 애 아빠 수술할 때 들어가 주실 수 없을까요? 선생님만큼 환자에게 신경을 써 주시는 분도 없어서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려요.”
조금이라도 믿음이 더 가는 의사가 수술에 참여했으면 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수술에 누가 들어갈지는 최철한이 결정할 일이었다.
“어떻게 하죠? 그 문제도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네요.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는 거 알잖아요. 최철한 선생님이 허락하시면 들어가겠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최철한 선생님께 말하기 전에 선생님 생각부터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고맙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은근히 우울했다. 하필이면 일반 외과 병동 간호사의 남편이라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오후 회진을 돌고 난 이혁민 교수가 의아한 눈으로 보며 입을 열었다.
“김지훈, 벌써 힘드나.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닙니다, 선생님.”
“그래? 하여튼 너 논문 정했다. 이걸로 잘 써 봐.”
이혁민 교수가 메모 한 장을 건넸다.
미세 석회화를 동반한 유방 종물의 암 발생에 관한 고찰.
간암에서의 구역 절제술에 따른 생존률의 변화.
간으로 전이된 대장암의 적절한 수술 및 그에 따른 예후.
김지훈이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간암과 대장암에 관한 논문은 이전에도 자주 보았고, 참고 자료도 많았다. 하지만 분명 신현수와 손일석의 논문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남은 것은 유방암인데, 지금까지는 일반 외과의 주 관심사가 아니었다. 미세 석회화라는 말 자체도 생소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혁민 교수가 코를 만지며 부연 설명을 했다.
“케이스도 많지 않고, 용어 자체가 좀 생소할 거다. 그래도 상당히 의미가 있으니까 열심히 준비해 봐.”
“예, 선생님.”
‘참고 자료도 거의 없을 게 뻔하고, 환자 케이스도 별로 없으면 쓰기가 정말 힘들 텐데 갑갑하네. 이왕이면 위암 쪽으로 주시지. 뭐부터 해야 하지? 어휴! 정말 되는 일이 없네.’
최철한이 오더를 내는 사이 간간이 논문에 대해 생각을 하던 김지훈이 저녁 먹으러 가자는 말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윤서연과의 약속이 생각난 것이다.
갑갑한 일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최철한이 오더도 다 냈으니 오프를 가도 좋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뿐인 오픈데 이 정도도 사정을 봐주지 않으면 나쁜 놈일 것이다.
급히 옷을 갈아입은 김지훈이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이미 윤서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서연아. 지금 끝났어.”
“괜찮아. 외과 생활이 뻔하지, 뭐. 타.”
“어디로 갈 건데?”
“강남에 내가 잘 아는 레스토랑이 있어. 거기 코스가 참 괜찮아. 서울에서는 제일 맛있는 곳 중 하나야.”
차를 타던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하게 커피 한잔하면서 얘기를 했으면 했다. 우아한 음악과 고급스러운 음식을 앞에 두고 할 말이 아니었다.
“서연아, 우리 다른 데 가면 안 될까?”
“왜? 비쌀까 봐?”
이런 상황에서도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돈 문제가 아니고…….”
“그럼 됐어. 가자.”
윤서연이 중간에 툭 말을 끊고는 앞만 보았다. 왠지 예전과는 태도부터 말투까지 달랐다. 더 이상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어딘지도 모를 강남 중심가의 한 건물에 들어섰다. 레스토랑 입구부터 화려함에 입이 쫙 벌어졌다.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가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종업원부터 손님들까지 모두 정장을 한 모습에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청바지에 티 입은 사람은 나 하나네.’
윤서연을 따라 룸으로 들어갔다. 메뉴판을 받은 김지훈이 당황했다. 양식이라고는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만 아는데, 그런 메뉴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더구나 불어였다.
‘아니, 무슨 생각으로 이런 데 온 거야? 이거 정말 문제네. 이런 데서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하지?’
윤서연이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을 시켰다.
“지훈아, 넌 뭐 먹을래?”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어정쩡한 표정으로 메뉴를 훑어보고는 딱 한마디만 했다.
“같은 걸로 먹을게.”
종업원이 나가고 나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할 말도 좋은 내용이 아닌데 분위기까지 너무 안 어울렸다.
김지훈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한숨만 쉬었다. 윤서연이 물 한 모금을 마시며 물었다.
“이런 데 처음이야?”
“처음이지. 경양식집은 가 봤는데 여긴 음식 이름도 모르겠다. 아까 뭐 달팽이인지 뭔지 그러던데 프랑스식이야?”
“응. 먹어 봐. 비싸긴 해도 그만한 값어치를 해.”
“와인은 또 뭐야? 그거 꼭 먹어야 돼?”
“여기서는 그냥 기본이야.”
잠시 후 수프가 나왔다. 뭐가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동네 경양식집보다는 확실히 맛은 있었다.
이어, 하얀 크림을 뒤집어쓴 달팽이 10마리가 나왔다. 소스 때문인지 우렁이나 다슬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본 요리가 이어졌다. 김지훈이 힐끗힐끗 윤서연을 보며 어떻게 먹는지 살폈다. 어째 미리 다 썰어 놓고 한 번에 막 먹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역시 윤서연이 한 조각씩 잘라 입에 넣으며 가끔씩 와인을 마셨다.
달그락달그락 칼질하는 소리만 들렸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음식은 맛있었지만 기분은 정반대였다. 텁텁하면서 달짝지근한 와인도 입에 맞지 않았다.
‘어후! 그냥 등심에 소주 한잔 걸치는 게 훨씬 낫네. 이렇게 먹으면 안 체하나?’
후식으로 이름도 모를 종류의 커피가 나왔다.
“여긴 음식도 괜찮지만 내가 먹어 본 중에는 커피가 정말 최고야. 이태리에서 직수입한 원두를 쓰거든.”
“그렇구나. 뭐든 최고급이네.”
향이 좋긴 했다. 한 모금 들이켠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설탕과 프림이 안 들어간 블랙 커피였다.
‘쓰다. 그냥 믹스 커피가 훨씬 낫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갑갑했다. 음식은 물론 앞에 앉은 윤서연까지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조용히 한 모금의 커피를 음미한 윤서연이 김지훈을 보았다. 눈빛이 복잡 미묘했다.
“나한테 할 얘기 있지?”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여인의 직감은 무섭다는데 뭔가 알고 있는 걸까?
꿀꺽 침을 삼킨 김지훈이 커피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려는 순간 윤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이렇게 살고 싶어. 사실 의사가 된 것도 하고 싶은 일이었다기보다는 내게 어울리는 직업이라는 생각 때문에 한 거야. 돈은 관심도 없어. 오프도 없이 일해야 쥐꼬리만큼도 못한 월급밖에 더 타?”
조금은 엉뚱한 말이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김지훈이 말없이 커피 잔만 만졌다.
“그렇다고 환자 보는 게 싫은 건 아냐. 그냥 여유롭게 살고 싶은 것뿐이야. 전문의 따고 유학 갔다 오면 교수로 남을 수 있겠지? 그 정도면 내 커리어로는 충분하지, 뭐.”
“나하고는 생각하는 게 많이 다르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하는 거야?”
“지훈아, 이 집 어때? 솔직히 말해 줄래?”
점점 말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할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필요한 얘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은 틀림없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윤서연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큰 벽인지도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난 이런 분위기가 안 맞아.”
“그치? 생각을 해 보니까 결혼이라는 게 그냥 사랑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 널 보면 앞으로 변할 것 같지도 않고.”
“왜 안 변하겠어. 다만 이런 분위기에 정말 적응하기 어려운 것뿐이지. 난 솔직히 일 열심히 하고, 시간 나면 친구들이랑 삼겹살 굽고 소주 먹으면서 살고 싶다. 솔직히 와인은 내 체질이 아니야. 맛도 잘 모르겠고.”
나직한 한숨을 내쉰 윤서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래, 맞아. 내가 봐도 넌 그렇게 평생을 살 것 같아. 그래서 나도 마음을 바꿨어. 다른 사람한테 정을 붙여 보려고.”
김지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 만나는 사람 있어?”
“왜? 내가 다른 사람 만난다니까 아쉬워?”
“아니, 그게 아니라. 잘된 일인가? 아니, 그게 말이야.”
횡설수설하는 김지훈을 본 윤서연이 눈가를 좁혔다.
“됐어. 너랑 나는 가끔은 소주 한잔하고 싶을 때 연락할 수 있는 친구 사이가 딱 좋은 것 같아. 내 주변에는 소주 먹는 사람이 없거든.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만나는 사람도 괜찮긴 해.”
뜻밖의 말이었지만 큰 짐을 덜었다. 친구이자 동기로 남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소주 한잔 정도는 살 수 있었다. 고경아도 그 정도는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다.
‘어후! 이거 의외로 일은 잘 풀렸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 아니야. 얼굴을 봐서는 지금은 그냥 조용히 있는 게 최고인 것 같다.’
“어쨌든 잘됐다. 술 한잔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물론 내가 시간이 있어야 하지만 최대한 달려 나갈게.”
“시원하면서도 섭섭하네. 한때는 그래도 내가 좋아했던 사람인데, 누굴 만나는지 물어보지도 않아?”
“어? 그런가? 정말 누구 만나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두고 보면 알겠지. 지금부터는 서로 부담 갖지 말자는 말 하려고 나왔어. 이제 갈까?”
“그럴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지훈이 일어나자 윤서연이 콧등을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