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정말 갑갑하다 (2)
윤서연이었다.
“윤서연 선생, 마침 잘됐다. 오후에 신기동 선생님 수술 빨리하게 방이 비는 대로 나한테 연락해.”
“네, 선생님.”
“지훈아, 시간 되면 술 한잔하자. 참! 대성이가 정형외과에 남은 거 알지? 음성 동지들끼리 한번 모여야지.”
복이 마구 굴러들어 왔다. 이준영 과장에 이어 비록 같은 과는 아니었지만 존경하는 선배가 병원에 남은 것이다.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김지훈을 본 김진호가 피식 웃으며 담당 수술실에 들어갔다.
윤서연과 단둘이 남은 김지훈이 약간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서연아, 서울 텀이었어?”
“응. 너도 육 개월 동안 서울이라며? 어제 일석이한테 들으니까 오프가 일주일에 하루라던데 정말이야?”
“그렇게 됐어.”
윤서연의 눈빛이 묘했다.
“시간 한번 내서 얘기 좀 해. 언제 시간 돼?”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윤서연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해야 했다. 말하기 거북하다고 뒤로 미루다가는 천하의 죽일 놈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너한테 꼭 할 얘기가 있었는데 잘됐다. 나 내일 오프야. 너는?”
“그래? 잘됐네. 나도 내일 오프야. 몇 시에 나갈 수 있어? 내가 맞춰서 기다릴 테니까 주차장으로 와.”
“주차장? 이 근처에서 보면 안 될까?”
“너랑 꼭 가고 싶었던 데가 있었어. 그러니까 이번은 내가 가고 싶다는 곳으로 가자. 여덟 시면 되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지만 저녁을 안 먹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이리저리 계산을 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연이 손을 흔들고는 담당 수술실로 들어갔다. 조금은 일방적인 말이었지만 답답한 마음에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날 오후 김진호가 신경을 쓴 덕인지 수술 방을 빨리 배정받았다. 수술 준비를 하는 고경아를 보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몰래 만나기는 하지만 꼭 얘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이해하죠? 일찍 해결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경아 씨.’
잠시 고경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복사물을 꺼내 들었다. 신장 환자의 혈관 수술법과 주요 부위의 해부학 구조를 복사한 노트였다.
얼마 후, 신기동 교수가 들어왔다. 중얼중얼 암기를 하던 김지훈이 재빨리 복사물을 감추고는 환자의 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나름 열심히 준비한다고 했건만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동맥 하나 봉합했다고 아주 기고만장해졌네. 너 해부학 공부하라고 한 게 언젠데 아직도 이 모양이야. 1년차 때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나 있지. 지금은 왜 공부 안 하는데?”
“죄송합니다, 선생님.”
“죄송하다는 말은 참 잘한다. 김지훈, 혈관하고 신경만 알면 다야? 그게 어느 근육 사이에서 나와서 어디로 숨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거 아냐? 눈에 보이면 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경이야? 너 2년차다.”
신기동 교수가 요구하는 해부학 지식은 정말 끝도 없었다. 이러다 팔과 다리의 구조를 정형외과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할 판이었다.
화끈하게 탄 후, 땀으로 푹 젖어 수술실을 벗어났다. 고경아가 안타까운 눈으로 김지훈을 보고 있었다.
‘어후! 쪽팔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도대체 경아 씨 앞에서 얼마나 더 타야 하지? 제길! 공부 좀 한다고 수술을 늦게 잡으면 응급실 커버에 문제가 생길 텐데.’
불평할 시간도 없었다. 화요일은 이혁민 교수의 수술이 없는 날이었다. 부랴부랴 오더를 내고 병동에 올라가자 이미 회진을 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수술이 이제 끝났습니다.”
유석재가 바짝 붙으라는 손짓을 했다. 서도진이 없을 때는 김지훈이 대신 일을 해야 한다. 정신을 놓고 있다 이혁민 교수나 최철한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치면 어디선가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거의 회진을 다 돌았을 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준영 과장과 신기동 교수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두 사람의 상반된 체격이 묘한 대비를 보였다.
김지훈이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이혁민 교수가 웃었다.
“김지훈, 가서 회진 돌아라.”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발소리를 죽이며 부리나케 스테이션을 달려간 김지훈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 회진을 먼저 돌아야 하는 걸까?
잔뜩 걱정을 했지만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신기동 교수가 당연하다는 듯 이준영 과장의 회진부터 돌라고 했다.
“김지훈, 선생님 회진부터 돌자.”
이준영 과장이 별말 없이 김지훈의 뒤를 따랐다.
“선생님, 혹시 힘드시면 제게 연락 주십시오. 언제든 달려 나오겠습니다.”
“일주일에 몇 개나 한다고. 신 교수도 힘들 텐데 괜찮아.”
“이렇게 함께 회진을 도니까 예전 생각이 나네요. 선생님이 치프셨을 때 이 교수나 저나 속으로는 꽤 무서워했던 거 아셨습니까? 수술이나 일에 관한 한 정말 욕심이 대단하셨죠.”
“무슨 소리야?”
이준영 과장이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렸다. 앞장서 걷던 김지훈이 귀를 쫑긋거렸다.
‘스승님이 이혁민 선생님하고 친한 줄은 알았지만, 신기동 교수님하고 다 같이 트레이닝을 하셨네. 야! 스승님이 치프였으면 그때 아랫년차였던 선생님들은 다 죽었겠다. 눈빛 하나로 의국을 그냥 평정? 멋있다!’
왠지 당연히 그랬을 것 같았다.
한 명뿐인 환자를 보고 다시 스테이션으로 돌아오자 회진을 끝낸 이혁민 교수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김지훈이 니는 잠시 저쪽에서 기다려라.”
뭐가 그렇게 좋은지 교수 셋이 간간이 크게 대소를 터트리며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이준영 과장도 이런 분위기가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7시가 거의 다 돼서야 이준영 과장이 응급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금경태 과장과 이준영 과장의 눈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찌푸리며 한마디 말도 없이 스테이션으로 갔다.
삭막한 분위기에 회진을 기다리던 전공의들이 눈치만 보았다. 이준영 과장이 태연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묘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보였다.
‘두 분 분위기가 왜 저렇지? 정말 사이가 안 좋네.’
신기동 교수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김지훈을 보며 말했다.
“회진 돌자.”
내과 신장 파트에 입원해 있는 수술 환자들을 보고 오더를 낸 후 회진을 모두 끝냈다. 의국으로 돌아온 김지훈이 혀를 내밀었다. 하루 종일 회진만 돈 것 같았다.
“에휴! 선생님, 몸은 별로 안 힘든데 종일 회진만 도네요.”
유석재가 씨익 웃었다.
“선생님들마다 환자를 어떻게 보시는지 잘 보면 그것도 트레이닝이야, 인마. 이론이 꼭 책에만 있겠니?”
그럴듯한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김지훈이 남은 일을 처리하며 주요 파트인 이혁민 교수 환자들을 빠짐없이 챙겼는지 확인했다. 일은 서도진이 하지만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는 것은 김지훈의 몫이었다.
어느새 응급실에 환자가 몰려들 시간이 됐다.
응급 수술 환자는 없었지만 김지훈이 응급실을 떠나지 못했다. 심근경색 환자가 온 탓이었다. 응급실 인턴에 내과 전공의까지 내려왔지만, 혹시 이준영 과장에게 콜이 갈까 봐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간호사, 이런 환자들 손 모자라다고 과장님 콜하면 안 됩니다. 확실히 해요.”
“네,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린 선생님만 내려와 계셔도 마음이 푹 놓이네요. 다른 과도 아니고 일반 외과 2년차 선생님이 봐주시는데 콜을 할 이유가 없죠.”
놀면 뭐할까? 김지훈이 손을 보탰다. 오래간만에 심근경색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많은 것을 느꼈다. 자칫 수술에만 신경이 몰려 등한시할 수도 있는 내과 문제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최선을 다하는 내과 1년차와 인턴들은 멋진 후배들이었다.
2시간이 넘도록 환자와 씨름을 하고서야 의국에 올라갈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빨간 펜의 위용을 발휘하고는 숙소로 올라왔다. 은근한 피로에 하품을 해 대던 김지훈이 이미 꿈나라로 달려간 손일석을 보며 침대에 푹 쓰러졌다. 이불이 불룩한 걸 보니 신현수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잤을까?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뜨니 새벽 3시였다.
(선생님, 신현수 선생님께서 응급실에 빤뻬리(복막염)가 의심되는 환자가 있다고 내려오시랍니다.)
“빤뻬리? 알았어.”
김지훈이 찬물에 세수를 하며 잠을 쫓았다. 빠르고 정확한 일 처리만이 이준영 과장의 피로를 덜 수 있었다. 그래도 수술을 또 들어간다는 은근한 기대에 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신현수와 서도훈이 이미 환자를 보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
나무판자처럼 딱딱한 배.
복부 사진에 떡하니 뜬 프리에어.
평소 자주 속이 쓰려 약을 복용한 병력.
궤양 천공에 의한 전형적인 복막염 환자였다.
수술에 필요한 검사부터 스케줄까지 완벽하게 준비돼 있었다. 이미 수술 당직인 안호석까지 내려와 있었다. 역시 신현수다웠다.
다시 한 번 환자를 진찰하고, 검사 결과와 병력까지 확인한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에게 노티를 했다.
“선생님, 궤양 천공에 의한 복막염이 의심되는 화자가 내원했습니다. 수술 준비하겠습니다.”
“마취과가 오케이하는 대로 연락해.”
힘차게 대답을 한 김지훈이 스케줄을 내러 간 안호석의 연락을 기다렸다. 평소라면 한 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응급실 체계가 바뀐 탓인지 마취과에서 바로 수술하자는 연락이 왔다.
약간은 부러워하는 것 같은 신현수의 눈빛을 뒤로하고 수술 방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이준영 과장이 들어오고, 잠에 취했던 인턴이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김지훈이 인턴에게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호석아, 인턴 교육 제대로 시켜.”
“예, 선생님.”
안호석이 마치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과 함께 수술 준비를 했다. 마취가 진행되는 동안 여느 때처럼 수술 과정을 말하자, 안호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어제의 아뻬에 이어 오늘도 무난하게 끝났다.
‘이젠 확실히 2년차 대우를 하시는 건가? 너무 좋네.’
긴장을 푼 것은 아니었지만 인정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붕 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술이 시작됐다. 순조롭게 진행이 됐다. 그러나 배를 열고 천공 부위를 확인한 후 본격적인 수술에 들어가는 순간 이준영 과장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김지훈, 너 아직도 1년차야? 복막염 수술을 해도 꽤 많이 봤을 텐데, 아직도 과정만 생각해?”
“예?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애도 아니고 입에 떠먹여 줘야 알아? 고민을 해, 고민을. 머리는 생각을 하라고 있는 거지, 장식이 아냐.”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 퍼스트를 서며 이런 말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준영 과장의 목소리가 점점 묵직하면서도 강해졌다.
“이것 봐라. 너 퍼스트 똑바로 못 서? 이 정도밖에 안 돼?”
김지훈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수술 방에 한겨울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쯧! 2년차라는 놈이.”
마침내 혀까지 차는 소리가 들리자 김지훈이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살벌해졌다. 간호사는 물론 마취과 전공의까지 자세를 바로잡았다. 안호석과 인턴은 아예 기구를 잡은 채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수술은 분명 매끄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준영 과장의 안색이 펴지질 않았다.
“손도 그대로고 생각도 그대로면 도대체 그동안 뭘 배운 거야? 설마 수술하는 사람이 편하기만 하면 퍼스트를 잘 서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 그게 아니었습니까?’
김지훈이 입을 못 열자 이준영 과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차라리 말로 태울 때가 나았다. 이준영 과장이 입을 다물자 모두들 입도 벙긋거리지 못했다. 세컨을 서는 안호석은 아예 얼음이 됐다.
희한한 일이었다. 분위기와는 다르게 수술은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고도 빠르게 끝났다. 이번 수술 역시 마무리까지 한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쏘아보고는 수술실을 나가며 마지막 한마디를 날렸다.
“김지훈, 넌 2년차야. 나 실망시키지 마라.”
마지막 한마디가 가슴에 콱 박혔다.
“수고하셨습니다.”
약간은 힘이 빠진 것 같은 김지훈의 목소리에 이준영 과장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네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빨리 알아내. 다른 놈이면 빠르지만, 네겐 빠르지 않아.’
수술 가운을 벗은 김지훈이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