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31화 (231/1,329)

제5화 정말 갑갑하다 (1)

눈이 초롱초롱했다.

“일석아, 넌 이제 올라가도 돼.”

“지훈아, 나도 눈도장은 찍어 놔야지. 그리고 내가 누구냐? 정보통 아니냐.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이준영 선생님이 어떤 양반인지 궁금해 죽겠다.”

“그래? 하긴 지금 인사를 드리는 게 좋겠다. 상당히 무뚝뚝하시니까 마음의 각오는 좀 하고 들어가.”

“자식이, 날 뭘로 보고. 나 담대한 사람이야, 인마.”

과장실로 들어간 손일석이 이준영 과장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꼿꼿하게 굳었다. 표정을 보니 ‘헉’ 소리를 안 낸 것이 다행이었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손일석을 소개했다.

“선생님, 오상익 선생님 파트를 맡고 있는 2년차 손일석입니다. 인사드린다고 따라 들어왔습니다.”

“니가 손일석이야?”

“예? 예, 선생님. 손… 손일석입니다.”

손일석이 말까지 더듬었다.

‘그럼 그렇지. 니 담에 겁 안 내고 배기겠어? 하하하!’

내심 크게 웃은 김지훈이 다소 여유로운 표정으로 노티를 했다. 손일석과는 확실히 처지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틀 전부터 시작된 복통으로 내원한 삼십오 세 된 남자 환자입니다. 아뻬가 의심됩니다.”

“지금 수술해야 돼?”

“예. 수술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준영 과장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김지훈, 너 아직도 1년차야? 좋을 것 같다는 게 도대체 뭐야? 수술해, 하지 마?”

순간의 방심이 화를 불렀다. 입가에 살짝 걸려 있던 김지훈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해야 합니다.”

“수술 방 준비되면 연락해.”

김지훈이 찍소리도 못했다. 당직실에서 나온 손일석이 한숨을 터트렸다. 말 몇 마디에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 사람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김지훈도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훈아, 너 이준영 선생님과 친하다며?”

“응. 그런 줄 알았어. 아니었나?”

김지훈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무래도 수술 방에서 신 나게 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런 예감은 꼭 맞을 필요가 없는데 이상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총알처럼 뛰어내려 온 서도진이 김지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음성에서 인턴을 돌 때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태우는 모습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선생님, 음성에서 수술 들어가셨을 때 옆에서 보기만 해도 땀이 나던데, 설마 작년하고 똑같지는 않으시겠죠?”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인마.”

은근한 긴장 속에 수술 준비가 시작됐다.

수술을 하기 전, 이준영 과장의 눈길에 김지훈이 자동적으로 수술 계획을 줄줄 읊었다. 끝날 때까지 별말이 없었다. 이제 2년차가 됐으니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의외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마취과, 수술 시작합니다.”

드디어 이준영 과장의 첫 수술이 시작됐다.

언제 어디서 폭탄이 날아올지 몰랐다.

김지훈이 바짝 긴장한 채 퍼스트를 섰다. 조마조마한 마음과는 달리 수술은 물 흐르는 것처럼 순조롭게 진행됐고, 순식간에 끝이 났다. 서울에서의 첫 수술이라 그런지 이준영 과장이 마무리까지 하고 나갔다.

“수고하셨습니다.”

힘차게 인사를 한 김지훈이 땀을 닦으며 씨익 웃었다.

‘역시 스승님이시다. 언제 봐도 스승님 수술은 정말 예술이야. 이런 걸 빨리 배워야 하는데 언제 배우지? 후우! 심하게 태우실 줄 알았는데 이젠 안 태우시네. 그럼 그렇지. 스승님하고 내가 확실히 친하긴 하지. 일석이가 이걸 봤어야 하는데.’

오더를 내던 서도진이 중얼거렸다.

“수술 내내 불안했는데 이준영 선생님이 많이 변하셨네요.”

“원래 그랬어, 인마.”

“엥? 선생님, 작년에 제가 똑똑히 봤는데요.”

김지훈이 아픈 옛 기억을 들추는 서도진을 슬쩍 째려보면서도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너무 늦지 않은 수술 시간부터 분위기까지 시작이 정말 좋았다. 윗년차의 기분이 좋으면 아랫년차들도 조금은 편해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서도진은 100일 당직 중이다. 의국으로 올라온 김지훈이 차트를 모았다. 빨간 볼펜이 보이는 순간 서도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침 회진 전까지 확실하게 다시 작성해.”

서도진의 할 일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여기저기서 1년차들의 한숨 소리가 터졌다. 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로 차팅을 한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2년차가 된 지 불과 이틀 만에 김지훈의 여유가 사라졌다.

아침 6시에 병동으로 내려가 환자 파악을 했다. 손일석과 신현수도 경쟁적으로 나타나 일을 시작한 탓에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부지런히 나름의 회진을 돌고 난 후 이준영 과장을 기다렸다.

띵! 스르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이준영 과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와 스테이션을 쭉 둘러보았다.

순간 분주하게 돌아가던 스테이션이 조용해졌다. 낯선 얼굴에 대한 의아함과 함께 왠지 떠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쫙 퍼졌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김지훈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복도를 울렸다. 차트를 보던 손일석이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응급실 과장님이세요. 다들 인사해요.”

손일석이 목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마구 손짓을 했다. 그제야 여기저기서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마디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인 이준영 과장이 차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환자는?”

“예. 특별한 문제 없습니다, 선생님.”

아직은 달랑 한 명이었다. 이준영 과장이 차트를 덮자마자 김지훈이 앞장섰다. 스테이션으로 막 돌아오던 서도진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이준영 과장이 힐끗 눈길을 주며 말했다.

“김지훈만 있으면 돼.”

이준영 과장의 파트는 분명 김지훈뿐이었다. 행여 1년차가 함께 회진을 도는 모습이 금경태 과장의 눈에라도 띄면 좋을 일이 없었다. 애먼 전공의들만 욕을 먹을 것이다.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의 의중을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일에 관한 한 확실한 사람이었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김지훈이 눈짓으로 서도진을 돌려보냈다.

10분 정도 환자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눈 이준영 과장이 회진을 끝냈다. 다시 스테이션으로 돌아오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조용해졌다. 희한한 일이었지만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무뚝뚝하기만 한 거구의 이준영 과장이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맥이 풀린 숨소리가 들렸다.

곧 분주한 일상이 이어졌다. 김지훈이 회진만 무려 다섯 번을 돌았다. 나름의 회진과 이준영 과장의 회진에 4년차인 최철한의 회진, 그리고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의 회진까지 잠시도 서 있을 틈이 없었다.

‘와! 도대체 하루에 회진을 몇 번이나 도는 거야?’

병동을 몇 바퀴나 돌고난 후, 바로 집담회가 열리는 1층 회의실로 향했다. 1년차들이 발표 준비를 하는 사이 스태프들이 하나둘 들어와 앉았다.

맨 뒤에 서서 인사를 하던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술을 모았다. 이준영 과장이 들어온 것이다. 전공의들이 일제히 인사를 하는 소리에 마치 자신의 일처럼 어깨가 우쭐거릴 정도였다.

맨 앞에 금경태 과장과 오상익 교수가 자리를 했다. 파트대로라면 오상익 교수 뒤에 구영선 교수와 임동완 교수가 앉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금경태 과장의 뒤에 앉고 있었다.

반대로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이준영 과장과 함께 오상익 교수 뒤에 앉았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지만 김지훈의 가슴은 은근히 두근거렸다.

‘신기동 선생님도 스승님과 친하신가? 세 분이 나란히 앉으셨네. 이거 뭔가 징조가 좋아. 드디어 내 인생이 완전히 풀릴 모양이다.’

“시작하지.”

금경태 과장의 목소리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 1년차들이 발표를 하는 내내 분위기가 묘하게 어색해지고 있었다. 기분 좋게 웃고 있던 김지훈의 표정이 조금씩 굳었다.

‘분위기가 왜 이래? 꼭 편이 갈린 것 같잖아. 우리가 모르는 일이라도 있었나?’

김지훈이 슬며시 삼사 년차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인지 갑갑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공의들이 바로 알아챌 정도라면 상당히 심각하다는 말이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답답한 분위기 속에 집담회가 끝났다. 금경태 과장이 화가 난 사람처럼 고개도 돌리지 않고 회의실을 나갔다. 수술이 있는 오상익 교수 파트까지 모두 빠져나가고 이혁민 교수 파트만 남았다.

신기동 교수가 나가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서도진을 먼저 올려 보낸 최철한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석재야, 파트 독립 때부터 불안하더니 분위기가 완전히 나빠졌다. 확실히 갈라선 것 같지?”

“예. 이럴 거면 왜 분리를 시키셨는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이준영 선생님하고도 안 좋은 것 같지 않아요?”

“나도 그랬는데, 너도 그런 느낌을 받았어? 확실히 뭔가 있어. 가만, 지훈이가 이준영 선생님하고 음성에서 근무했으니까 잘 알겠네. 두 분 사이에 대해 특별히 들은 말 없어?”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대화에는 끼워 주지도 않았다. 이젠 2년차라고 도리어 질문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전 모르겠는데요.”

“하긴, 이제 2년차 된 놈이 뭘 알겠어. 지훈아, 이제부터는 눈 똑바로 떠라. 특히 과장님 조심해. 한 번 찍히면 영원히 찍히는 거야.”

깜짝 놀란 김지훈이 물었다.

“예? 성격이 그 정도세요? 뭘 조심해야 하는데요?”

“예를 들어 줄게. 너도 눈이 있으면 과장님하고 이혁민 선생님 사이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건 알 거야. 이럴 때 과장님 앞에서 이혁민 선생님을 칭찬하는 것 같은 소릴 하면?”

“하면요?”

“바로 찍히는 거지. 과장님 힘이면 우리가 전문의가 되어도 그냥 흔들어 댈 수 있으니까 조심하는 게 최고다.”

입맛이 써진 김지훈이 입을 내밀었다. 몇 명 되지도 않는 교수들 사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니 씁쓸하기만 했다.

‘선생님들 말대로 정말 스승님과 과장님 사이가 안 좋으면 어떻게 하지? 엄청 고생하시는 거 아냐?’

문득 걱정이 된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석재야, 이준영 선생님 포스가 장난이 아니지? 야! 분위기만 보면 과장님이 도리어 밀리는 것 같더라.”

“그러게요. 근데 그게 좋은 일이 아니잖아요. 과장님 표정이 안 좋던데, 우리한테 불똥이 튀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최철한과 유석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후, 회의실을 나온 이준영 과장이 슬쩍 김지훈을 보고는 퇴근을 했다.

남들은 모두 출근을 할 시간이었다. 오늘따라 아침 햇살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도리어 마음이 정말 무거워졌다. 2년차인 김지훈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

오전 일과를 마친 김지훈이 바로 신기동 교수의 수술 스케줄을 챙겼다. 마지막으로 수술할 환자들에게 이상이 없는지 확인한 후 수술 방으로 내려갔다.

신기동 교수의 혈관 수술은 국소 마취하에 이뤄지는 수술이 대부분이었다. 수술 당일에 스케줄을 제출하지만 마취과 의사가 필요 없어 수술실만 비면 언제든 할 수 있었다. 응급실 근무를 고려해 조금이라도 빨리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수술 방에 들어서자마자 고경아가 휙 스쳐 지나갔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살짝 눈인사를 했다. 못 본 척 지나쳤지만 고경아가 웃었다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요. 이젠 웃어요. 명희 씨 일도 잘될 겁니다.’

다행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인 김지훈이 편안한 마음으로 마취과 치프를 찾았다. 여기저기 수술실을 기웃거리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김진호가 웃고 있었다.

수술 스케줄 표를 들고 있는 모습이 딱 서울 병원 마취과 4년차들을 대표하는 총치프(chief)였다. 다른 과와는 달리 마취과 총치프의 권한은 어마어마했다.

“안녕하세요, 김진호 선생님.”

“어! 지훈이구나. 2년차 되더니 번듯해졌네. 이젠 면도하고 머리 감을 시간은 나는 모양이다.”

“그럼요. 저도 이젠 2년찹니다. 선생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좋은데요.”

“자식이, 아부를 하려면 좀 확실하게 해라. 어설프기는. 근데 2년차가 오전부터 수술 방은 왜 기웃거려?”

김진호 하면 딱 떠오르는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넉넉한 웃음까지도 여전했다.

“신기동 선생님 수술이 세 개가 있습니다. 세 개 모두 국소 마취라 수술실이 비면 빨리 좀 부탁드리려구요. 가급적이면 일곱 시 전에 끝내야 응급실 커버를 할 수 있거든요.”

김진호가 씨익 웃으며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급실? 이준영 과장님 때문이구나. 그러면 신기동 교수님하고 이혁민 교수님 파트까지 니가 다 맡은 거야?”

“예. 그렇게 됐습니다.”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슬며시 웃자 김진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웃는 걸 보니 아직은 살 만한 모양이구나? 일복을 타고난 줄 알았더니, 일을 못해 안달이 난 놈이었네. 남들은 어떻게든 편하게 지나기만 바라는데, 너도 참 웃긴 놈이다. 그나저나 빈방이 언제 나오려나.”

스케줄을 보던 김진호가 누군가에게 손짓을 했다. 뒤를 돌아보던 김지훈이 순간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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