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스승님! (2)
(아휴! 지훈 씨는 정말 일복이 왜 이렇게 많아요. 파트를 세 개씩 맡는 건 뭐고, 왜 하필이면 지훈 씨가 제일 좋아하는 이준영 선생님이 오시죠? 속상해 죽겠네.)
이준영 과장에게 배운다고 휴가까지 반납하고 음성에 찾아갔던 김지훈이었다. 아무리 배우고 싶다고 해도 좋아하고 존경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준영 과장을 보는 김지훈의 눈빛과 태도만 보아도 그 마음을 느낄 정도였다.
“미안해요, 경아 씨. 수요일과 주말 오프 때 다른 약속 일체 안 잡을게요. 경아 씨 시간만 되면 총알같이 튀어 나갑니다.”
고경아의 숨소리가 커졌다. 김지훈의 마음이 어떻든 단 한 번 본 이준영 과장이었다.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몰라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2년차가 1년차 때하고 똑같은 게 어딨어요? 아니네. 백 일 당직 때만 아니면 1년차보다 오프가 더 없잖아요. 다다음 주에는 나도 야간 당직이란 말이에요.)
완전히 삐친 고경아를 달래느라 김지훈이 진땀을 뺐다. 결국 모든 오프 시간을 고경아에게 뺏겼다.
(알았어요. 그럼 이제부터 지훈 씨 오프는 내가 관리할 테니까 확실히 하세요. 내가 시간이 없을 때만 친구분들 만나세요. 딴짓하지 말고요.)
“옙, 경아 씨. 처분을 달게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마음이 조금은 풀렸는지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김지훈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직은 꽤 쌀쌀한 초봄에 줄줄 흐르는 땀이라니 식겁할 일이었다.
‘데이트도 쉽지는 않네. 하긴 나 같으면 하루 종일 성질을 냈겠지.’
다행히 한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이내 우연히 나온 이명희에 대한 일로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직접 연락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데메롤 문제로 본격적인 조사를 받기 시작한다는 말을 전해 들은 것이다.
(명희까지 구속될 수 있다는데 연락은 안 되고, 정말 답답해 죽겠어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죠? 정갑수 그 인간을 왜 만났는지 모르겠어요.)
“데메롤을 맞진 않았으니까 잘될 거예요. 경아 씨,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차마 배 속의 아이 때문에라도 구속되지는 않을 것이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좋은 일도 아닌데 이야기가 길어져야 마음만 답답할 것이다.
김지훈이 목소리를 높이며 다른 얘기를 꺼냈다. 고경아도 모처럼 통화를 하는데 어두운 얘기만 하고 싶지 않은지 순순히 화제를 돌렸다.
묘한 분위기 속에서 통화를 끝냈다. 데메롤을 빼돌린 일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왠지 이명희가 불쌍하고 안쓰럽기만 했다. 어쩌면 이명희의 눈에는 정갑수가 좋은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상이나 사람이나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잠깐 반짝했던 몸이 금방 피로해졌다.
극심한 피로와 수면 부족 앞에서는 수술에 대한 욕심도, 이혁민 교수 앞에서 보인 불타는 결의도 다 소용 없었다. 어기적어기적 의국으로 올라간 김지훈이 하품만 하다 숙소로 갔다. 손일석과 신현수가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김지훈도 침대에 눕자마자 나직하게 코를 골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
응급실 환자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투덜거리는 소리.
그럴 때마다 눈이 떠졌지만 이내 다시 감겼다. 일 년 동안 못 잔 잠을 자기라도 할 것처럼 2년차 3명이 밥도 안 먹고 최선을 다해 잠을 잤다.
김지훈이 눈을 떴다. 아침 6시였다. 30분 정도는 더 자도 됐지만 허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냉장고를 뒤져 탄산음료 두 병을 단번에 마신 김지훈이 꺽꺽거리며 세수를 했다.
본격적인 2년차 근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오늘도 빨간 볼펜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도진아, 이러다 볼펜 부족해지겠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생님.”
“아침에는 시간이 부족하니까 다음부터는 일과 끝나고 차트 확인할 거야. 백 일 당직 동안 요거 한 자루로 버텨 보자. 무슨 말인지 알지?”
점점 빨간색으로 물드는 차트를 보는 서도진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드레싱을 일찍 끝내길 다행이라는 얼굴이었다.
유석재와 함께 맨 뒤에 서서 회진을 돌았다. 환자에 대한 질문에 쩔쩔매는 서도진을 보며 웃기도 하고, 관심이 가는 환자에 대한 말이 나오면 귀를 쫑긋거리며 들을 수 있는 여유도 있었다. 항상 정신없이 발표를 하거나, 깜빡깜빡 졸며 지나갔던 아침 집담회에서도 눈이 말똥말똥했다.
참 낯설었다.
‘내가 많이 자긴 잔 모양이다.’
회진이 끝나고 다들 수술 방으로 향했다. 유석재는 논문을 써야 한다며 의국에 처박힌 채 고개도 내밀지 않았다. 한가롭게 앉아 병동 일을 하는 인턴들과 수술 스케줄을 챙기느라 뛰어다니는 1년차들의 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손일석이 슬며시 옆에 앉으며 물었다.
“뭐 하지?”
“논문 뭐 쓸지 받았어? 그리고 너 공부한다며?”
“아직 못 받았어. 공부는 무슨. 지금은 다 귀찮다. 일단 며칠 최대한 쉬고 생각하자. 현수는 뭐 해?”
“몰라. 아까 회진 끝난 후부터 안 보여.”
뭔가 머릿속을 휙 스쳐 지나갔다.
눈을 마주친 김지훈과 손일석이 간호사에게 숙소에 있겠다는 말을 하고는 숙소로 올라갔다. 신현수의 침대 위에 있는 이불이 불룩했다. 손일석이 이불을 들추자 신현수가 눈을 찡그리며 이불을 홱 끌어당겼다.
“그래. 자는 게 남는 거야. 일석아, 우리도 일단 자자.”
“오케이! 근데 오늘 응급실 근무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아침에 회진 돌 때 이혁민 선생님에게 여쭤봤더니, 니네 둘은 예전처럼 근무하고 난 추가란다.”
“추가? 그게 무슨 소리야?”
“바이탈이 흔들리거나 수술을 해야 하는 환자가 있으면 무조건 같이 보래.”
손일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손이 부족할 때 내려오면 되는 거 아닌가?”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이준영 선생님 때문에 그런가 봐. 응급실 근무가 하루 이틀도 아닌데 수술 환자만 보시는 것도 힘드시지 않겠어?”
김지훈과 손일석이 침대에 파고들었다.
“근데 너 이준영 선생님하고는 친해? 음성에서 삼 개월 동안 본 게 다잖아. 어젯밤에 응급실 간호사들이 엄청 체격도 크고, 겁나게 생기셨다고 그러던데.”
“당연히 친하지, 인마. 그리고 보이는 모습만 그래. 실제로는 되게 좋으셔. 수술하시는 거 보면 너 아마 뻑이 갈 거다. 끝내주시거든.”
“그래? 근데 십 년이나 음성에 계셨어? 수술 하나도 모를 때 갔으니까 니 눈에만 그렇게 보인 거 아냐?”
“아냐, 인마. 기회가 있으면 너도 꼭 한번 수술 들어와 봐. 손이 예술이야, 예술.”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평일 오전에 너랑 노닥거리는 게 꿈은 아니겠지?”
웅얼거리던 손일석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김지훈도 이내 잠에 빠졌다.
간신히 눈을 뜨고 후다닥 점심을 먹었다. 잠시 윗년차들 눈치를 보다 또 침대 속에서 똬리를 틀었다. 자도 자도 잠은 부족하기만 했다.
오후 4시가 돼서야 병동으로 내려갔다. 아직도 의국에서 논문을 쓰고 있던 유석재가 웃었다.
“니들 딱 일주일이야. 그때까지 못 잔 잠 다 자고, 다음 주부터는 1년차들하고 인턴 확실히 챙겨.”
“어? 선생님, 일이 있었나요?”
김지훈의 물음에 유석재가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나도 2년차 막 됐을 때는 별일이 없는 줄 알았다. 근데 최철한 선생님이 다 하셨더라. 아이구! 힘들어. 2년차 세 놈이 몽땅 자빠져 자고 앉았으니 내 몸이 고생이네.”
우르르 병동으로 달려 나가 차트를 펼쳤다. 컨설트부터 시작해 병동 환자 치료까지 유석재가 한 일이 꽤 많았다.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콧등을 찡그렸다.
“에이! 그냥 우리한테 시키시지.”
“그러게 말이다. 잠은 다 잤네. 어이쿠! 할 일이 뭐가 남았는지부터 보자.”
신현수도 차트를 뒤적이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유석재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2년차들에겐 가시방석이었다. 특히 같은 파트인 김지훈의 마음이 제일 급했다. 내일 있을 신기동 교수 수술 환자들을 만나고, 병동 일을 하고 나니 6시가 다 됐다.
유석재와 신현수는 뒤늦게 벌어진 양방 때문에 수술 방에 들어가 있었고, 손일석은 안호석과 함께 회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지훈도 차트를 챙기고는 혼자 미리 회진을 돌았다.
신기동 교수와 회진을 돌고 나자 7시가 거의 다 됐다. 그때까지 수술 방에서 한 명도 나오지 못했다. 김지훈이 간호사에게 말을 하고는 부리나케 응급실로 내려갔다.
정각 7시가 되자 응급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숨을 헐떡이며 스테이션에 서 있던 김지훈이 힘차게 인사를 했다. 간호사들이 일제히 벌떡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환자 있어?”
“아닙니다, 선생님.”
“근데 왜 내려왔어? 지금 회진 돌 시간 아냐? 앞으로 환자 없으면 내려오지 마. 너 인사하려고 전공의 된 거 아냐.”
이준영 과장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빨리 올라가라는 손짓을 했다. 김지훈이 내심 투덜거리며 응급실을 나가자 이준영 과장이 간호사들을 보았다. 입술이 살짝 움직인 것 같았다.
“환자 오면 먼저 김지훈한테 연락해요. 난 김지훈에게만 노티를 받습니다.”
“네, 과장님.”
이준영 과장이 당직실로 들어가자 간호사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 두 번 봐서 그런가? 과장님만 보면 가슴이 막 떨려.”
“나도 그래. 근데 몇 마디 하시지는 않았지만 말씀하시는 거 보면 의외로 친절하시지 않아? 어제는 집에 가시면서 수고한다고 음료수하고 과자까지 사 주셨잖아.”
“아냐. 마음 놓으면 안 돼. 한 번 화나시면 응급실이 뒤집어질 것 같아. 손이 솥뚜껑만 한 거 봤지?”
옆에 있던 인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얼굴을 보이고, 단 몇 마디만 한 이준영 과장이 하루도 안 돼 가공할 존재감을 뿌리고 있었다.
늦은 회진에 늦은 저녁을 먹고 최철한의 오더를 받았다. 김지훈이 환자 리스트에 열심히 오더를 받아 적는 서도진을 보았다. 잘하고 있었지만 가끔 잘못 알아들었는지 엉뚱한 오더를 적고 있었다. 김지훈이 잠깐 틈이 날 때마다 손가락으로 잘못 적은 오더를 지적했다.
“이 환자 수액에 트리돌(일반 진통제)을 섞는 게 아니라 근육 주사야. 우리 과 수술 환자는 함부로 진통제 안 섞는다.”
서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2년차의 일이 무엇인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스스로 하나둘 배워 가며 자신의 일을 찾아가야 하는 년차가 바로 2년차였다.
무사히 첫날이 끝났다. 벌써부터 피로를 느낀 서도진이 연거푸 찬물에 세수를 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습관적으로 손을 뻗던 김지훈이 또 웃고 말았다. 번개처럼 전화를 받은 천광호가 김지훈을 보았다.
“선생님, 손일석 선생님이 응급실에 환자가 있다고 전해 달라시는데요.”
“그래? 무슨 환자지? 수술 환자면 좋겠는데.”
은근한 기대를 품은 김지훈이 의국에서 나와 계단으로 향하다 말고 잠시 고민에 잠겼다.
‘엘리베이터! 이젠 당당하게 탈 수 있다.’
버튼을 누른 김지훈이 뿌듯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김지훈이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악어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잘 지내냐? 2년차 되더니 목에 힘 많이 들어갔어. 우리 때는 엘리베이터는 탈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야. 새끼! 많이 컸네.”
보자마자 시비다. 4년차가 됐다고 뻐기는 모습이 역력한 자신은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한쪽에 달린 거울을 보며 슬며시 비켜섰다.
‘당신 얼굴이나 보셔. 정갑수 꼴 나지 말고. 하긴 바이탈하고는 거리가 먼 정형외과니까 그런 일은 안 당하겠네. 수술 잘못됐다고 죽지는 않을 거 아냐. 그리고 뭐? 엘리베이터를 안 탔다고? 내가 본 게 몇 번인데 지랄을 하세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땡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김지훈이 부리나케 응급실로 들어갔다.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지도 않았다.
손일석이 손을 흔들다 말고 악어가 보이자 눈가를 찌푸렸다.
“에이! 재수 없어. 지훈아, 아뻬 의심된다. 첫날부터 수술 시작이네. 부러워.”
“아뻬 가지고, 뭘. 환자 어디 있어?”
김지훈이 손일석과 함께 환자를 보았다. 안호석이 눈을 부릅뜨고 환자를 어떻게 보는지 보고 있었다. 일종의 책임감이 느껴진 김지훈이 더욱 세심하게 환자를 보았다. 안호석의 표정이 묘해졌다.
‘손일석 선생님도 꼼꼼하게 보시지만, 김지훈 선생님은 더 꼼꼼하시네. 환자 과거력과 가족력까지 물으실 줄은 몰랐는데, 완전 교과서대로 환자를 보시는구나.’
환자의 호소까지 충분히 들은 김지훈이 진단 및 수술에 대한 설명을 했다.
“호석아, 이준영 선생님께 노티를 할 거니까 최대한 빨리 수술 스케줄 챙겨. 그리고 도진이가 오늘 수술 당직이지?”
“예, 선생님. 바로 들어가라고 연락하겠습니다.”
당직실로 향하는 김지훈의 뒤를 손일석이 은근슬쩍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