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스승님! (1)
잘못된 부분에 일일이 체크를 했다. 하나둘 늘던 표시가 어느새 수십 개에 달했다. 서도진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 환자 보고 올 테니까, 최철한 선생님이나 유석재 선생님 오시기 전에 지금 빨리 다시 기록해. 수정이 아니다. 다시야. 오늘은 그냥 지나가지만 똑같은 실수 하면 안 돼.”
“예, 선생님.”
급히 스테이션에 앉아 다시 기록을 하는 서도진을 본 김지훈이 병실을 돌았다. 이미 잘 알고 있는 환자들이었다.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나름의 회진을 돌았다. 1년차 때는 드레싱에 바빠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불편한 데가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절반쯤 돌았을 때 신현수가 맞은편 병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서로 얼굴을 보며 흠칫 놀랐다. 2년차가 굳이 따로 회진을 돌 필요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판단일 뿐이었다.
‘역시 신현수 넌 만만치 않은 놈이야.’
“현수야, 잘 잤어? 2년차 되니까 바로 살 만하네. 그런데 안 좋은 환자가 있는 모양이지?”
신현수가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 너도 같은 생각을 한 거야? 역시 2년차가 돼도 긴장의 끈을 놓지는 않는구나.’
“환자 한 명이 신경 쓰여서. 너도 그래?”
“응? 응. 나도 그래. 환자들이 빨리 좋아져야 하는데.”
태연한 척 다음 병실로 들어가며 슬쩍 뒤를 돌아보다 눈이 딱 마주쳤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김지훈의 웃음이나 신현수의 표정이나 어딘가 어색했다.
‘현수야, 2년차 됐으면 좀 쉬어라. 첫날부터 회진을 돌고 지랄이냐. 겁나게.’
‘정말 진짜 지칠 줄 모르네. 김지훈 같은 라이벌이 있다는 게 내겐 행운인가?’
기분 좋은 어색함이었다.
회진을 마치고 스테이션에 돌아오자 차트를 보던 손일석이 힐끗 째려보았다.
“지훈아, 혼자 회진 돌았어?”
“응? 응. 너는?”
“나야 벌써 돌았지, 자식아. 이 자식들이 2년차 됐다고 빠져서. 정신 바짝 차려, 인마. 너 그래서 날 이길 수 있겠어? 나중에 울면서 수술 좀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지 말고.”
역시 손일석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실에 가려 손일석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 기분 좋게 환영할 수밖에 없는 경쟁자였다.
“내가 천하의 손일석을 어떻게 이기냐? 난 그냥 천하제일 이인자가 될게.”
“그게 마음 편할 거다. 1년차 때는 니가 불쌍해서 봐준 거야. 지금은 다른 거 알지? 호석아, 광호야, 도진이나 도훈이보다 일 못하면 죽는다.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예, 선생님.”
1년차들 앞에서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여유를 떨던 김지훈과 손일석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다. 그렇게도 꼿꼿했던 목이 자연스럽게 푹 꺾였다. 삼사 년차들이 나타난 것이다.
“나오셨습니까, 선생님.”
“그래. 환자들 별일 없지?”
최철한의 물음에 김지훈이 멍청히 서 있는 서도진을 툭툭 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서도진이 환자 노티를 했다. 맨 뒤에 서서 가만히 서도진의 말을 듣던 김지훈이 슬쩍 최철한을 보았다.
‘역시 4년차 선생님이다. 서 있는 자세부터 다르네.’
4년차의 위용은 어마어마했다.
회진을 시작하자마자 인턴이 가장 앞서 달려가 문을 열고 서도진이 환자 앞에 섰다. 유석재와 김지훈이 마치 호위라도 하는 것처럼 뒤를 따랐고, 최철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휙휙 회진을 돌았다. 스태프 회진과 다른 점은 딱 하나, 스태프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치프인 4년차들의 회진이 모두 끝났다.
스테이션에 앉은 김지훈이 멍하니 서도진을 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했던 일을 지금은 서도진이 모조리 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손일석과 신현수도 마찬가지였는지 멍청한 표정으로 옆에 앉아 있었다.
“일석아, 이제 우리 뭐 하냐?”
“그러게. 뭐 하지? 현수야, 뭐 할 일 있나?”
“당장은 없는데.”
2년차 셋이 나란히 앉아 고민을 했다.
이대로 가서 쉬어도 되는 걸까?
1년차 때 본 2년차의 모습이라면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무엇인가 발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질 않았다. 일을 하는 척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별말도 없이 30분 동안이나 앉아 있었다.
“일석아, 현수야, 내일 수술 뭐 있나 볼까? 아! 일석이 니 파트는 정규 수술 없구나.”
나란히 수술 스케줄 앞에 섰다. 월, 수, 금에 수술을 하는 금경태 과장과 이혁민 교수의 수술이 무려 9개나 잡혀 있었다. 그런데 양방이 뜨지 않는 한 2년차가 수술 방에 들어갈 일이 없었다.
김지훈이 중얼거렸다.
“기분 묘하네.”
“그러게. 꼭 붕 뜬 느낌인데.”
잠시 어깨를 나란히 했던 신현수가 슬며시 의자에 앉으며 책 한 권을 뽑았다. 그동안 부족했던 이론을 채우기라도 할 것처럼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신현수를 째려본 손일석이 스윽 옆에 앉아 대장 항문에 관한 책을 펼쳤다.
‘그래. 2년차 때는 이론에 집중할 때야. 그러니까 논문도 주신다고 했겠지? 그럼 나도 공부할 타임인가. 가만! 스승님이 내일부터 근무시잖아? 어디서 주무시지?’
책이 문제가 아니었다. 은근히 걱정이 된 김지훈이 부랴부랴 응급실로 내려갔다. 주말에 근무를 해야 하는 피로와 일요일 오전의 한가함이 겹친 간호사들이 맥을 놓고 있다 말고 활짝 웃었다.
“김지훈 선생님, 웬일이세요?”
“일요일에도 근무하느라 힘들죠. 다른 게 아니라 내일부터 이준영 선생님 오시는 거 알죠?”
“네, 알아요. 그런데 왜요?”
“제가 이준영 선생님 파트 2년찹니다.”
“어머머! 그럼 응급실 커버를 하시겠네요. 정말 잘됐다.”
호들갑을 떠는 간호사를 본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간호사는 편할지 모르지만 김지훈에게 고생길이라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혹시 근무하실 때 어디서 계시는지는 알아요?”
“과장님 당직실이요?”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장님이요?”
“어머! 이준영 선생님이 응급실 담당 과장님이시잖아요. 파트 2년차시라면서 어떻게 그럴 모르세요.”
과장님이라는 말에 기분이 들떴던 김지훈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응급실과 당직실이라는 말에 왠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이 든 것이다.
“선생님 당직실이 어디죠?”
“인턴 선생님들 당직실 옆에 바로 있어요. 예전에 창고로 썼던 곳인데, 어젯밤에 싹 치우고 새 단장을 했어요. 밤에 근무하시면 힘드시겠지만 지내시기에는 불편하진 않으실 거예요. 같이 가 보실래요?”
“아니에요. 그냥 혼자 볼게요.”
이준영 과장의 당직실에 들어선 김지훈이 꼼꼼하게 침대와 소파 등을 살폈다. 다행히 간호사의 말대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한쪽 벽에는 꽤 큰 창문까지 나 있어 답답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김지훈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에휴! 2년차 됐다고 들떠서 스승님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있었네. 나야 스승님과 일하는 게 좋지만 체력도 문제고, 밤낮이 바뀌면 정말 힘드실 텐데 어떻게 근무를 하시지?’
결코 이런 근무 조건을 이겨 낼 나이가 아니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것이 좋은 일인지조차 의문이 생겼다. 무리를 하다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음성에서도 밤에 연이어 응급 수술이 뜨면 피곤한 기색을 보이곤 했었다. 김지훈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나이에도 힘든 게 응급실 근문데 무리가 되실 것이 틀림없어. 가능하면 콜을 안 받으시도록 하는 게 최선이다.’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는 커버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수술은 뜨는 대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날밤을 새울 수도 있었다.
한숨을 푹푹 쉬며 당직실을 나오던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움직이지 못했다. 이혁민 교수와 함께 거구의 의사가 응급실에 들어오고 있었다.
인사를 하는 간호사들의 눈빛이 떨렸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체격과 무뚝뚝하기만 한 얼굴.
알고 보면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
김지훈이 알고 있는 사람 중 그런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바로 스승인 이준영 과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그대로 달려가 인사를 하는 김지훈의 얼굴이 상기됐다.
“김지훈, 환자 있어?”
이준영 과장의 눈가가 살짝 떨렸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반갑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말 변함이 없었다.
“아닙니다, 선생님.”
“그런데 왜 응급실에 있어?”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못하자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준영 과장에게 압도당한 것이 분명했다.
“저, 과장님 당직실 보러 오셨습니다.”
“내 당직실을?”
이준영 과장이 김지훈을 보았다. 어디냐고 묻고 있었다. 김지훈이 급히 안내를 했다. 이준영 과장이 이혁민 교수와 함께 천천히 당직실을 둘러보는 사이, 김지훈이 재빨리 빠져나왔다. 음료수보다는 커피가 좋을 것 같았다.
‘믹스 커피 좋아하시는 것 같았는데 맞나?’
스스로 스승이라고 부르면서 어떤 커피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공연히 마음이 무거워진 김지훈이 간호사에게 부탁해 믹스 커피 세 잔을 탔다.
스승 앞에서 울상을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애써 웃으며 커피를 들고 당직실로 향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혁민 교수가 웃었다.
“뭔 커피야?”
“예. 드시라고 타 왔습니다.”
이준영 과장이 아무 말도 없이 커피를 들었다. 음성에서 마신 세상에서 가장 고소했던 커피가 떠올랐다. 잠시 커피 향을 맡더니 한 모금을 마시며 슬며시 웃었다.
‘이놈 덕에 안 마시는 믹스 커피를 자꾸 먹게 되네. 이러다 믹스 커피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맛있네.’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김지훈을 본 이준영 과장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
“예, 선생님.”
“이 교수, 아까 하던 얘기는 이따가 하지. 김지훈, 주중에는 수요일에 쉬고 첫 번째 주말은 근무다. 수술 환자 회진은 아침 일곱 시에 돌자. 올라가 봐.”
앉자마자 올라가 보란다. 이혁민 교수가 피식 웃었다. 김지훈을 보는 순간 이준영 과장이 움찔거리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반응이었다.
“2년차도 됐고, 오래간만에 보셨는데 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김지훈이 이러저런 일로 고생 정말 많이 했습니다.”
“1년차가 다 그렇지. 편하면 이상한 거 아냐? 뭐 해?”
엉덩이를 슬며시 붙이던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예, 선생님. 내일 저녁에 뵙겠습니다.”
“쓸데없이 나 왔는지 보려고 문 열지 마. 그리고 바이탈은 니가 잡고 수술할 환자만 노티해.”
“예, 선생님.”
정말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음성에서 본 모습과 똑같다는 사실에 도리어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속은 어떨지 모르지만 이준영 과장이 힘들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응급실을 나와 병동으로 올라가려던 김지훈이 공중전화를 찾았다. 방금 전의 미소는 사라지고 대신 은근한 걱정이 서린 얼굴이었다.
‘경아 씨도 이미 2년차 오프가 많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뭐라고 하지? 이명희 간호사의 일도 아직 해결이 다 안 돼서 마음도 안 좋을 테고. 혹시 물어보면 일단 이혁민 선생님에게 화살을 돌려야겠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전화를 받은 고경아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는 티가 역력했다. 이명희 때문에 많이 힘든 모양이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고경희와 단둘이 생활을 하니 기댈 사람도 없을 것이다.
(지훈 씨, 2년차 되신 거 축하드려요. 이제부터는 지훈 씨 자주 볼 수 있는 거죠? 언제 오프세요.)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수요일에 오프를 받아요.”
(수요일이요? 음! 어쩌지. 그날은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시간이 없는데. 그럼 다음 오프는요?)
하필이면 수요일에 시간이 없다니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적당한 핑계가 떠오르질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주말은 당직이고, 그다음 주 수요일이 오프예요.”
(다다음 주 수요일이요? 설마 오프가 일주일에 하루뿐이라는 건 아니죠? 2년차 선생님들은 주중 오프가 이틀에 한 번 아니었나요?)
“그게 그렇긴 한데, 이젠 서울 병원도 2년차가 셋이잖아요. 거기다 내가 맡은 파트가 좀 많네요. 이혁민 선생님하고 신기동 선생님 파트에다가, 혹시 이준영 선생님 기억해요?”
(이준영 선생님이요? 기억하죠. 음성에 계신 분이잖아요.)
“예. 이번에 서울 응급실로 올라오셨어요.”
김지훈이 사정을 설명했다. 고경아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나직한 숨소리만 들렸다. 김지훈이 처분만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