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드디어 2년차다. 만세! (2)
이준영 과장의 이름을 언급하면 김지훈이 어떻게 나올까? 그 전에 자원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혁민 교수 자신이라고 해도 망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응급실 커버는 저녁 일곱 시부터 다음 날 아침 여덟 시까지다. 그사이에 뜨는 수술과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만 보면 된다. 오프는 주중에는 하루고, 주말은 격주로 쉬게 될 거야.”
수술이 없다고 해도 한 달에 20일 이상을 병원에 잡혀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바이탈까지 책임져야 한다면 1년차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들 입을 내밀며 고개를 저었지만 김지훈의 궁금증은 더 심해졌다.
“선생님, 그 정도면 저희에게도 무리한 일입니다. 응급실 파트를 맡는 교수님에게는 정말 힘든 일이 아닙니까?”
“어느 정도는 각오를 하셨겠지만, 정말 힘든 일을 자청하셨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점점 부담이 커졌다. 김지훈과 신현수는 정갑수 때문에 막판까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 신현수는 하필이면 왜 2년차들에게 이런 일을 요구하는지 원망하는 기색을 보일 정도였다. 그런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교수들 싸움에 애꿎은 너희들이 피해를 입게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구나. 우리 과를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부딪치라는 말도 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누가 맡든 불만 갖지 말고 일하자. 응급실을 담당할 선생님은 이준영 과장님이라고 음성 병원에 계시는 분이다. 훌륭하신 분이니까…….”
‘지금 서울에 스승님이 오신다고 하신 거야? 뭐야! 이건 고민할 일이 아니잖아.’
이혁민 교수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준영 과장님이라는 말을 들은 김지훈이 숨도 쉬지 않고 손을 번쩍 들었다. 얼마나 피곤할지는 이미 뒷전이었다.
“선생님, 제가 하겠습니다.”
손일석과 신현수가 깜짝 놀랐다. 1년차 생활을 6개월이나 더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건 화약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다. 아니, 일하다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었다.
이혁민 교수도 다소 놀란 얼굴이었다. 김지훈과 이준영 과장의 관계를 어느 정도는 알기에 내심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결정을 할지는 몰랐다.
“김지훈, 한 번 결정하면 번복은 안 된다. 도움을 줄 여력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돼.”
“알겠습니다,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떤 말을 들어도 김지훈에게는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스승인 이준영 과장이 서울로 온다는데, 그 파트를 맡을 사람은 당연히 자신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김지훈이 의외일 정도로 너무 쉽게 파트 결정을 내렸다.
신현수와 손일석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손을 번쩍 드는 김지훈을 보는 순간 생각이 확 변했다. 논문도 논문이지만 일반 외과 전공의에게 수술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더구나 김지훈은 신현수에겐 유일한 라이벌이었고, 손일석에게는 절친한 친구지만 반드시 넘고 싶은 동기였다. 거의 동시에 입이 열렸지만 손일석이 간발의 차이로 앞섰다.
“선생님, 저도 가능하면 하고 싶습니다. 두 명이어도 된다면 신기동 선생님과 응급실 파트를 나누면 되지 않겠습니까?”
신현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한발 늦은 것이다.
“왜? 니도 돌고 싶나?”
“예, 선생님. 제가 맡은 파트 일이 상대적으로 많기는 하지만, 최소한 신기동 선생님 파트만은 돌고 싶습니다.”
손일석의 눈에 강한 의지가 서렸다.
김지훈이 응급실에서 동맥을 봉합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손일석의 가슴이 활활 타올랐었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뛰어나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언제든 앞설 수 있다고 믿었다.
이준영이라는 의사가 누군지도 모르기에 확실한 선택은 신기동 교수였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김지훈도 혈관 수술 때문에 자청을 했다고 믿었다.
‘오상익 선생님 파트 일이 이제는 거의 두 배가 될 거라는 걸 빤히 알 텐데, 신 교수 파트를 돌겠다. 그래, 손일석이 니도 이젠 치고 나와야지. 현수 니는 뭐 하나? 둘보다는 셋이 낫지 않겠나.’
이혁민 교수가 턱을 받치며 뭔가를 고민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때 신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일석이 파트 일이 제일 많을 겁니다. 상대적으로 일이 적은 제가 신기동 선생님 파트를 맡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명이 맡는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지훈이가 세 파트를 혼자 맡게 된다면 어느 파트 일도 제대로 하기 힘들 겁니다. 이 점을 감안해 주십시오.”
역시 신현수답게 또박또박 논리 정연했다. 손일석이 입을 쩍 벌리며 눈을 부라렸다.
“현수, 니도 신 교수 파트를 돌고 싶어? 니들 둘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혹시 김지훈이 응급실에서 했던 동맥 봉합 때문이야?”
이혁민 교수가 짐짓 의아하다는 눈으로 물었다. 단도직입적인 말에 움찔거리던 손일석이 눈에 힘을 주었다.
“그렇습니다. 기회가 될 때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습니다.”
“현수 니는?”
신현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이건 자존심하고는 상관이 없는 문제야. 김지훈이 먼저 배웠을 뿐이다. 집중력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면 나는 그 이상의 수술도 할 수 있어. 혈관 수술은 당연히 배워야 할 수술이야.’
“저도 혈관 수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웃었다. 원하던 바였다. 가장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제자이자 후배인 3명의 젊은 의사들이 서로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며 크게 발전하기를 바랐다.
“알았다. 그런데 아까 말했지만 2년차 중 한 명만 배정이 됐다. 과장님과 교수님들 전체가 모여 내린 결정이라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신현수와 손일석이 크게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혁민 교수가 더욱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유월부터는 파트가 바뀌지 않겠나. 그때 내 파트를 도는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질 거다.”
“선생님, 이미 정해진 거 아닙니까?”
순간 근심 어린 한숨이 터졌다. 김지훈을 보는 이혁민 교수의 눈이 복잡 미묘했다.
‘과장님의 생각이 도대체 뭘까? 지금까지 못 잡아먹어 안달을 했으면서, 왜 다음 텀으로 지훈이를 자신의 파트에 배정하라고 했지? 공교롭지만 이번 정갑수 일에도 김지훈의 이름이 오르내렸고, 이준영 선생님 파트까지 돌게 되면 더 못마땅하게 볼 것이 빤해. 하지만 김지훈을 위해서는 간담도계는 반드시 돌아야 하고, 그 방면 수술에 있어서는 과장님만 한 사람도 없는데 걱정이군.’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던 이혁민 교수가 표정을 바꿨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2년차 파트만 아직 미정이다. 오상익 선생님과 상의해서 열심히 한 놈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다. 결국 너희 둘 중의 한 명이 아니겠나.”
어느 틈에 불가능한 일이 기회로 바뀌었다. 신현수와 손일석의 눈이 번쩍였다. 반드시 혈관 수술을 배우고 말겠다는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 자신의 파트에 최선을 다하고, 논문 준비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제 주말이면 2년차네. 그동안 수고했다, 김지훈. 이준영 선생님은 월요일 저녁 일곱 시부터 근무하신다. 니 오프는 이준영 선생님 스케줄에 맞추면 된다. 현수하고 일석이는 2년차 스케줄대로 오프 가고. 알았나?”
“예, 선생님.”
김지훈이 힘차게 대답을 하자 이혁민 교수가 묘하게 웃으며 의국을 나갔다. 믿음직스러우면서도 왠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한 손일석이 신현수를 째려보았다.
“신현수, 너 정말 이럴 거야?”
“뭐가?”
“넌 그동안 수술도 많이 했잖아. 양보의 미덕도 몰라? 인마, 애새끼가 양심이 없어.”
“이혁민 선생님 말씀 벌써 잊었어? 열심히 해 보자. 수술에 관한 한 난 양보 못해.”
“좋아. 한번 붙어 보자. 아! 현수 니 눈에서 눈물 뺄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마음이 아프네. 치사하게 이런 일 갖고 나중에 욕하기 없기다.”
손일석이 말에 신현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니 걱정이나 해.”
“그래.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법이지. 이거 갑자기 의욕이 팍팍 솟네. 그나저나 지훈이 너는 맹한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때는 귀신처럼 기회를 잡아. 혹시 배 속에 능구렁이가 있나? 어디 까 보자.”
손일석이 느닷없이 김지훈에게 달려들어 옷을 벗기려 했다. 김지훈이 기겁을 하며 의국 밖으로 도망을 쳤다.
드디어 1년차 마지막 날이 왔다. 김지훈에게는 감격적인 날이었지만, 교수들이나 선배들에게는 해마다 있는 일이었다. 수고했다는 말이 다였다. 그래도 찢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앞으로 맡게 될 이혁민 교수 파트는 진용까지 화려했다.
4년차 최철한, 3년차 유석재, 2년차 김지훈, 1년차 서도진으로 이어지는 라인은 가히 금경태 과장 파트를 맡은 전공의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김지훈이 이준영 과장과 신기동 교수 파트를 맡았기 때문에 사실상 2년차 한 명이 빠진다고 해도 무방했다. 이혁민 교수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마음을 먹은 금경태 과장도 전공의 배정까지는 건드리지 못했다.
토요일 오후 회진이 끝났다. 1년차들이 번쩍 손을 들며 만세를 불렀다. 윗년차들이 자신들도 그랬다는 듯 피식 웃었다.
뿌듯한 가슴을 안고 새로운 2년차들이 이제 막 1년차가 된 후배들과 의국에 모였다. 가슴 벅찬 인수인계가 시작됐다.
근 2시간에 걸쳐 환자와 업무를 인계한 김지훈이 기지개를 폈다. 다들 인계까지 마치자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신현수가 서도훈을 보며 말했다.
“도훈아, 열심히 해라. 나는 다른 파트 1년차보다 일을 못하는 건 절대 못 봐. 알았지?”
“예, 선생님.”
신현수의 말에 손일석이 코웃음을 쳤다. 오상익 교수 파트는 1년차가 안호석과 천광호 둘이었다.
“호석아, 광호야, 난 하나만 본다. 지훈이나 현수 어깨 펴지고, 내 어깨 처지는 순간 니들은 그냥 죽는 거야. 뭐, 대충 해도 되긴 해. 우리도 일곱 명인데 니들도 일곱 명이면 딱 맞네. 사라진 한 명이 호석이나 광호가 아니기만 바란다. 두 명이 한 놈 못 이기면 죽어야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생님.”
목소리에 기가 팍 들어가 있었다. 가뜩이나 긴장했던 1년차들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해졌다. 남은 1년차는 한 명뿐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 자세도 풀지 못하는 서도진의 어깨를 툭 치며 일어선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도진아, 나만큼만 해.”
서도진의 안색이 죽다 못해 시꺼메졌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김지훈을 보던 손일석이 탄식을 터트렸다.
“아! 저게 바로 2년차의 위엄이었어. 말 한마디로 죽이네. 난 왜 저 생각을 못했을까? 점점 저 자식한테 말발까지 밀리는 느낌이 드네. 이거 산속에 들어가서 말발 수련이라도 하고 와야 되나?”
손일석이 가슴을 탁탁 치며 요란을 떨었다. 신현수도 힐끗 김지훈을 보고 말았다.
2년차 숙소에 올라간 김지훈이 두 다리를 쭉 펴고 침대에 누웠다. 푹신푹신한 매트리스의 촉감을 얼마 만에 느껴 보는지 몰랐다. 잠이 솔솔 왔다.
스르륵 눈을 감은 김지훈이 일 년 만에 아무 생각 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 월요일부터는 다시 바빠지겠지만 지금은 이 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첫 근무 시작이기에 일이 년차 모두 당직이긴 했다. 하지만 손일석과 신현수가 응급실과 수술 당직인 덕에 김지훈이 콜을 받을 일은 없었다.
‘내게도 이런 행운이 있었나?’
그 덕에 밤새 전화 한번 안 받고 푹 잤다. 단 하루 만에 인생이 달라진 것이다.
그래도 습관은 무서웠다. 새벽 5시부터 쉬지 않고 눈이 저절로 떠졌다.
‘난 2년차야. 그냥 자도 돼. 제발 자자. 우어어! 제발.’
스스로 암시까지 걸었지만 그때부터 계속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결국 김지훈이 졌다. 7시쯤 일어났지만 여유가 넘쳤다. 일요일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깨끗한 가운을 걸치고 병동으로 가는 내내 콧노래가 나왔다.
드레싱을 마치고 스테이션에 있던 서도진이 김지훈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김지훈이 어깨를 쫙 펴며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걸었다.
“환자 별일 없었지? 드레싱하고 차팅은 다 했고?
“예, 선생님. 다 했습니다.”
“차트부터 보자.”
서도진이 부리나케 차트를 모아 앞에 놓았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한 일이었다. 2년차라는 실감이 팍팍 다가왔다. 김지훈이 좋아서 절로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다물고는 차트를 펼쳤다.
‘아! 좋다. 이게 바로 2년차야.’
최철한과 유석재가 보기 전에 차팅은 완벽하게 돼 있어야 했다. 1년차를 가르치고 실수를 잡아 주는 것이 2년차에게 주어진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차트를 보는 김지훈의 눈빛이 달라졌다. 서도진이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축이며 초조한 눈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이 빨간색 볼펜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