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드디어 2년차다. 만세! (1)
오상익 교수와 이혁민 교수는 이미 말을 맞춘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신동석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의견을 듣고 일정 부분을 수용한 것이다. 신동석에 대한 믿음이 한순간에 산산이 깨졌다. 오상익과 이혁민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미는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따랐는데 결과가 고작 이거였어? 내 팔다리를 모두 잘라 놓고, 부원장 자리 하나 던져 주면 내가 감격에 겨워 고맙다고 할 줄 알았나?’
마치 표정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신동석이 금경태 과장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이준영 과장의 일만큼은 금경태 과장으로서도 물러설 수 없는 일이었다.
“이사장님, 다시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만일 이준영 과장에게 또 문제가 생긴다면 도리어 응급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동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금경태 과장은 자신의 앞길을 막을 만한 사람을 용납하지 못했다. 예측한 대로였다. 이럴 때 확실히 기를 꺾어 놓지 못하면 분명 다른 생각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금 과장, 당신 능력에 맞는 욕심을 부린다면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지만, 그 선을 넘어가는 건 내가 용납을 할 수가 없어.’
“흐음!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번에 정갑수 사건을 보며 응급 수술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다들 아뻬를 간단하게 생각하지만 수술을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요?”
금경태 과장의 안색이 돌변했다. 정갑수 문제를 거론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지어야 했을 책임을 잊지 않고 있다는 말이었다. 물러서야 할 때였다.
‘정갑수 문제가 이렇게 내 발목을 잡는군. 그래, 한발 물러서 주지.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지는 않아.’
부글부글 끓는 속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금경태 과장이 최대한 침착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말씀을 듣고 보니 당황스러운 일이긴 합니다만, 이사장님과 교수들 의견에 따르는 것이 맞는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준비를 하겠습니다.”
신동석이 아직 안 끝났다는 듯 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아! 한 가지 더. 진상철 교수님을 행정 부장으로 앉힐 겁니다. 그리고 이혁민 교수님이 수련 부장에 적임자 같습니다. 진료 부장은 지금처럼 내과에서 맡으면 될 거고요.”
이혁민 교수와 진상철 교수를 동시에 보직에 앉힌다는 것은 금경태 과장에게 병 주고 약 주는 꼴이었다. 그래도 보다 권한이 강한 행정 부장직을 장악했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그런데 신동석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외과 내부 일은 이혁민 교수님에게 맡기시고, 금 과장님은 진상철 교수님과 함께 제가 부탁드린 일들을 추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준영 과장 문제는 응급실 운영 문제까지 확실히 결정되기 전까지는 언급하지 마세요.”
간신히 걸려 있던 금경태 과장의 미소가 사라졌다.
신동석의 입장에서는 절묘한 안배였다. 부원장과 행정 부장을 자신에게 주고, 반대쪽에 병원장과 수련 부장을 놓았다. 결국 병원 개혁은 자신이 맡고, 진료 부분은 신상민 과장과 이혁민 교수에게 실권을 준 것이다.
의료 행정과 진료 부분을 모두 장악하려던 금경태 과장의 입장에서는 결코 수긍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이준영이라는 큰 변수까지 더해졌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인생을 마칠 수도 있었다.
‘아직은 기회가 있어. 하지만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 그렇다면 신동석만 믿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가슴속에 숨긴 야심이 강하게 꿈틀거렸다. 병원장으로 끝낼 생각이었다면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이 정도 경력으로는 병원 협회 협회장이나 의사 협회 협회장이 되기에는 무리였다. 권력과 돈이 있는 자들에게는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의사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이사장님.”
대답을 하는 금경태 과장의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일요일인데도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자리에 참석한 이들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
1년차의 마지막 한 주가 남았다. 분위기가 또 달라졌다. 금경태 과장은 평소와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이혁민 교수와 오상익 교수는 왠지 상당히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곧 이유가 드러났다. 올해 1년차들이 새로 들어오는 시기에 맞춰 전면적인 파트 조정이 단행된 것이다. 새롭게 정비된 파트를 보며 최철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K 파트 : 금경태 과장의 간담도계
O 파트 : 대장 항문을 담당하는 오상익 교수의 파트
O-k : 오상익 교수 밑에서 대장을 담당하는 구영선 교수
O-l : 오상익 교수 밑에서 항문을 담당하는 임동완 교수
L : 이혁민 교수의 위장관 파트
S : 신기동 교수의 혈관 및 신장 파트
Le : 응급실 담당 파트
주요 파트는 K, O, L 파트였다. 구영선 교수와 임동완 교수는 오상익 교수 밑에 있기 때문에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신기동 교수와 응급실 파트가 새로 생긴다면 전공의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교수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하던 최철한이 중얼거렸다.
“석재야, 무리 아니냐? 아무리 봐도 다섯 개 파트는 만들어야 하는데, 서울에 각 년차를 다섯 명이나 배치할 리가 없잖아. 더구나 2년차는 다 해야 일곱 명뿐인데 이걸 어떻게 감당하지? 서울 병원의 인력이 부족하다고 다른 병원에 안 보낼 수는 없잖아.”
유석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말이에요. 파트가 독립했는데 신기동 선생님에게 지금처럼 한 명만 배정할 수도 없겠죠. 그리고 응급실 파트는 또 뭐죠? 누가 오시는 걸까요?”
“과장님하고 이혁민 선생님도 생각이 있으시니까 이렇게 조정을 했겠지만 확실히 무리다. 그런데 과장님이 이혁민 교수님 파트를 독립시키다니 참 희한하네. 구영선 선생님 올라온 거 봐서는 그럴 분위기가 아닌데 말이야.”
“그렇죠. 이렇게 되면 오상익 교수님 파워가 더 세지는 거 아니에요?”
“에이! 그렇게 보기는 어렵지. 구영선 선생님하고 임동완 선생님이 어느 쪽인지는 뻔하잖아.”
“그건 또 그러네요.”
김지훈이 귀를 쫑긋거렸다. 단순한 파트 조정에도 수많은 문제와 교수들 간의 역학 관계가 숨어 있었다. 환자만 열심히 본다고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구영선 선생님이 결국 서울로 오셨네. 이래서 선생님들이 정치를 한다는 소리가 들리는 건가? 이런 문제를 상관하지 않고, 환자 치료에만 전념하려면 실력이 얼마나 좋아야 할까?’
은근히 입맛이 썼다.
힐끗 김지훈을 본 최철한이 부랴부랴 차트를 펼쳤다.
“지훈아, 오더 내자. 넌 아직 이런 일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다. 일주일 남았어도 1년차라는 거 알지?”
“예, 선생님.”
“자식, 일석이하고 이경석 선생이 다시 일을 시작하니까 목소리에 힘 들어가는 거 봐. 역시 체력 하나는 이거다.”
최철한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오더를 내기 시작했다.
1년차 마지막 한 주도 숨 가쁘게 지나갔다.
정갑수가 의료 사고를 일으킨 환자가 무사히 퇴원을 했다. 신현수가 죽도록 고생을 한 결과였다. 그 덕에 치료 내내 환자의 입에서 큰 소리 한번 나오지 않았다.
정갑수와 이명희도 퇴원을 했다. 둘 다 구속이 됐다는 둥 아니라는 둥 온갖 소문이 들렸지만, 병원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었다. 간간이 입에 오르내릴 뿐 점점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이명희와 연락이 두절된 고경아만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항상 굳은 표정만 짓고 있던 금경태 과장의 안색이 조금은 나아졌다. 덩달아 의국 분위기도 서서히 예전으로 회복됐다. 그래도 몸이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김지훈이 픽스턴들의 눈에 숨은 은근한 불안과 공포를 보며 씨익 웃었다. 서도진이 시뻘건 눈으로 자신을 보고 웃는 김지훈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도진아, 겁나?”
“아닙니다, 선생님.”
“그래. 겁낼 거 없어. 우리가 힘들어 보여도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이나 빠져서 그런 거야. 일하다가는 절대 안 죽어. 걱정하지 마.”
“정말 죽진 않겠죠?”
“니 눈엔 내가 귀신으로 보이냐?”
김지훈이 농담을 던졌다. 물론 하나도 안 웃겼지만, 곧 고생길이 끝난다는 사실이 이런 여유를 줄 줄은 몰랐다. 차팅을 하며 서도진에게 1년차의 일을 자세하게 설명할 여유까지 얻었다. 불과 이틀 앞으로 다가온 1년차의 마지막 날들이 피부로 와 닿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오후 회진을 돈 이혁민 교수가 1년차들만 따로 불렀다. 다들 피곤함 속에 숨은 기대와 흥분이 역력했다.
“1년차 끝난다고 생각하니까 좋나.”
“예, 선생님.”
목소리들이 힘찼다.
“고생들 많이 했고, 무사하게 마쳐서 다행이다. 그런데 말이야, 문제가 좀 있어. 이경석이 너는 천안으로 가니까 상황이 조금 다르다만, 나머지 셋은 고생 좀 해야 할 거야.”
모두들 눈이 동그래졌다. 정갑수의 수련이 취소된 이상, 2년차 생활이 조금은 빡빡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래도 2년차가 가장 편한 년차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막상 이혁민 교수의 말을 듣자 왠지 모를 차가운 기운이 등짝을 스친 것이다.
저절로 등이 곧게 펴졌다.
“일단 올해 팔월 말에 세계 외과 학회가 서울에서 열린다. 그래서 니들 셋이 논문을 준비해야 돼. 시간도 촉박하고, 국내 학회하고는 수준이 다르니까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한다.”
신현수가 눈을 반짝였다.
“선생님, 언제까지 준비해야 합니까?”
“칠월 말에 심사가 있으니까, 최소한 칠월 초까지는 초안이 완성돼야겠지. 그래야 수정과 보완을 할 시간이 있을 거야. 물론 삼사 년차들은 이미 논문을 준비하고 있지만, 니들도 멋지게 써서 이름을 한번 올려 봐.”
손일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선생님, 유월에는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그럼 시간이 삼 개월밖에 안 남은 것 아닙니까?”
“요번 서울 2년차들은 세 명 다 육 개월 연속 근무다. 후반기에는 니들 얼굴 못 보겠네.”
불과 4개월 남았을 뿐이었다. 누구도 전공에 관한 논문을 써 본 적이 없었다. 분명 무리한 요구였지만 이혁민 교수는 2년차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었고, 그 또한 아주 훌륭한 트레이닝이었다. 다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에 내심 기대를 하고도 있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논문 작성이 힘들긴 하겠지만, 그 정도로 고생을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뭔가 다른 일이 더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신기동 교수 파트하고 응급실 파트까지 누군가 한 명이 맡아야 한다.”
이것이 본론이었다. 신기동 교수 파트까지는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응급실까지 커버해야 한다면 고생을 조금 더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일차적으로 1년차들이 먼저 환자를 본다고 해도 확실히 무리였다.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세 파트를 혼자 맡아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나직한 콧소리를 냈다.
금경태 과장이 이준영 과장의 일을 그냥 지나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 결과가 전공의 배정을 막는 것이었다. 논란 끝에 2년차 중 한 명만 파견한다는 결정이 났다.
기다렸다는 듯 발령이 나자마자 바로 서울에 올라온 구영선 교수는 물론, 임동완 교수까지 자신들 파트의 전공의를 줄일 수는 없다며 반대를 했다. 더구나 금경태는 여전히 최종 결정권을 가진 과장이었다.
“그래. 응급 수술만 담당한다고 해도 논문까지 써야 하니까 어쩌면 1년차만큼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올해는 파트 조정이 이루어진 첫해라 다른 방도가 없다. 그래서 일단 누군가 자원했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신현수가 과장님 파트고, 일석이 니가 오상익 선생님 파트다. 지훈이 니는 또 나를 만나네. 지겹다.”
이혁민 교수가 웃으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지만 다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응급 수술이 하나만 떠도 최소한 두세 시간은 잡아먹었다. 여기에 100일 당직 중에는 1년차들의 트레이닝까지 상당 부분 담당해야 한다. 2년차가 되자마자 그런 생활을 3개월이나 해야 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김지훈도 마찬가지였다.
‘신기동 선생님 파트만 맡는 거면 숨도 쉬지 않고 손을 들었을 텐데, 응급실까지 커버하면 논문을 쓸 시간이 없잖아. 국내 학회도 아니고 세계 학횐데 논문 제출은 해 봐야지. 어후! 그래도 수술은 배우고 싶고 정말 고민이다.’
양손에 모두 떡을 쥘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한 명은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갑갑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응급실은 어느 교수가 맡는지 궁금해졌다. 또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는지도 알고 싶었다.
“선생님, 어느 교수님께서 응급실 파트를 맡습니까? 그리고 말씀대로 응급 수술만 커버하면 되는 겁니까?”
이혁민 교수가 웃었다. 세계 학회와 논문을 언급할 때는 신현수의 눈이 가장 반짝였다. 반면 수술에 관련된 일이 나오자 김지훈 혼자 입을 열고 있었다. 손일석은 신중하게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다들 개성이 있어. 신중하면서 학술적인 놈, 자유롭지만 진지한 놈. 김지훈 이놈은? 흠! 어려운 놈이네. 셋을 다 섞으면 그레이트 써전이 되는 걸까?’
잠시 샛길로 샜던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의 질문을 기억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