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26화 (226/1,329)

제2화 누구나 자신이 한 일의 대가를 치른다 (3)

일반 외과 교수 3명을 기다리는 신동석의 안색이 무거웠다. 지난 10년간 금경태 과장은 자신의 손발이 되어 움직였다. 개인적 야심이 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리어 적절히 이용할 수 있었고, 병원 내에 관한 일이라면 절대 자신의 이목을 피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금경태 과장의 행보를 보며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가 없었다. 신장 이식 수술에서 금경태 과장과 진평호와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정갑수의 일은 원칙대로 처리하는 것이 병원의 이익에도 합치했다. 그런데 징계 위원들을 회유하는 무리수를 감행했다. 때마침 데메롤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다면 금경태 과장이 원하는 대로 해결됐을 것이다.

‘진평호와 정한득이 중요하긴 하지만, 병원보다 앞에 놓고 생각할 사람들이 아니지. 금 과장이 이를 모를 리가 없어.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 병원은 물론 현수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말인데, 만일 내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감당할 사람이 없겠군.’

중대한 기로였다. 병원의 인적, 물적 쇄신을 위해서는 아직은 거침없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극히 꺼려하는 일이었기에 다른 적임자를 찾을 수도 없었다.

관건은 과연 금경태 과장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확률은 반반이었고, 금경태 과장이 주는 이득은 명확했다.

깊은 고민에 잠겼던 신동석이 노크 소리에 눈을 떴다.

“들어와요.”

금경태 과장과 이혁민 교수, 그리고 오상익 교수가 차례차례 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내왔지만 아무도 잔을 들지 않았다. 금경태 과장의 얼굴은 어두웠고, 이혁민 교수는 기대감을 보이면서도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개편안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긴데, 이혁민과 오상익을 왜 불렀지? 설마 내가 제출한 개편안을 건드릴 생각인가?’

불안한 눈길로 신동석을 보던 금경태 과장이 문득 진평호와 정한득을 떠올렸다. 양쪽에 모두 발을 걸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었다. 빠른 시간 내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신동석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 교수님들을 뵙고자 한 이유는 일반 외과 개편안 때문입니다. 벌써 정했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일이 겹쳐 늦어졌습니다. 다음 주까지는 마무리를 해야 하니까 모두 힘을 모아서 빠르게 움직여 주세요. 행정적인 문제는 총무과에서 적극 협조할 겁니다.”

단 일주일의 시한만 있다는 소리에 금경태 과장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해 대규모 인사이동은 불가능했다. 결국 자신의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금경태 과장이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일입니다. 기한 내에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좋아요. 역시 금 과장의 추진력은 믿을 만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그럼 개편안은 어떻게…….”

신동석이 입술을 모으며 서랍을 열었다. 완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2개의 개편안이 나란히 보였다. 신동석이 손을 놀리며 잠시 고민을 했다. 지금의 선택에 향후 병원의 발전과 신현수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아버지, 외과 의사로서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제가 반드시 이겨야 할 라이벌이 한 명 있습니다. 정갑수의 일은 정말 실망스러웠고요.’

신현수를 다시 불렀을 때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었다. 그 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놈이 내게 이기고 싶은 라이벌이 있다고 말을 해? 현수를 긴장하게 하는 놈이 대체 누굴까? 그래. 지금은 현수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기반을 잡아 주어야 할 때라는 말이겠지. 금 과장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알았다는 소리까지 하다니. 녀석!’

신동석이 확신을 갖고 한 장의 개편안을 집었다.

“이게 내 생각입니다. 서류를 보기 전에 일단 대략적인 윤곽을 말씀드리죠. 먼저 금경태 과장님을 부원장으로 발령을 내며, 일반 외과 과장직을 겸임하도록 하겠습니다.”

금경태 과장이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병원장이 아닌 부원장이라고 해도 자신이 가진 병원 내 기반을 생각하면 병원장 이상의 힘을 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천안 병원의 구영선 교수를 서울로 발령하겠습니다. 같은 대장 항문 파트를 맡게 될 텐데, 오상익 교수님께서 신경을 좀 써 주셔야겠습니다.”

오상익 교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혁민 교수 역시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자신들의 안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불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이 교수와 오 교수를 불렀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되면 끝난 게임이야. 내가 건의한 대로 진상철까지 새로 보직을 맡게 된다면 가장 유리하게 일이 풀리는 건데.’

슬쩍 입가를 말며 이혁민 교수를 본 금경태 과장이 신동석을 보며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신임 병원장은 누가 맡게 됩니까, 이사장님.”

“흐음! 신상민 과장이 적임자라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신상민 과장님을 병원장으로요?”

“그래요. 연륜이나 능력을 볼 때 그만한 적임자가 없더군요. 앞으로 두 분이 잘 협조해서 병원을 크게 일으켜 주세요.”

뭔가 분위기가 묘해졌다. 두 사람의 성향이 상당히 다르고, 실제로도 서로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갑자기 표정이 굳은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구영선 교수 자리에는 구미의 박경일 과장을 올리고, 구미에는 새로 송동화 선생을 영입하기로 했습니다.”

이혁민 교수의 얼굴이 다소 펴졌다. 박경일 과장과 송동화는 금경태 과장의 라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상민 과장이 병원장이 된다면 금경태 과장의 전횡을 어느 정도 막을 수는 있을 것이란 기대까지 할 수 있었다.

신동석이 아직 말이 안 끝났다는 것처럼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금경태 과장을 보았다.

“금 과장님.”

“예, 이사장님.”

“재단 이사장이라고 해도 각 과의 내부 일까지 관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압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현수가 있어서 부탁을 좀 드려야겠습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바로 실행하겠습니다.”

신현수라는 말에 금경태 과장이 숨도 쉬지 않고 대답을 했다.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박경일 과장이나 송동화의 발령은 대세에 지장을 줄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현수의 일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했다. 자식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신동석이 아직도 자신을 충분히 신뢰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신동석까지 일반 외과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한다면 신현수에게도 득보다는 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진료에 관한 한 의사들의 자존심은 의사가 아닌 사람의 통제를 거부할 것이 빤했다.

신동석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고맙습니다. 그럼 양해를 구했으니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최근에 일반 외과의 발전을 위하는 것이 결국 병원을 위한 것이고, 그것이 결국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반 외과가 보다 전문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금경태 과장의 안색이 돌변했다.

“전문적이라는 말씀은?”

“말 그대로입니다. 일단 과장님과 오 교수님의 파트는 현행대로 가야겠지요. 그런데 이 교수님의 위치가 다소 애매모호하더군요. 다른 병원 어디에도 위장관 파트가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곳은 없더군요. 이 점이 개선됐으면 합니다.”

신동석은 능구렁이처럼 노련했다. 신현수를 들먹여 금경태 과장이 덥석 물게 한 후, 이제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내놓았다. 아예 반박의 여지를 막아 버린 것이다.

금경태 과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이 교수도 이제 그만한 위치에 올랐으니 그렇게 하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이런 결정을 쉽게 수긍해 주시다니, 금 과장님은 내게 정말 큰 힘이 되는 사람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응급실 문제가 남았군요.”

그 순간 이혁민 교수와 오상익 교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응급실 문제에 표정이 밝아질 이유가 없었다. 내심 불안감을 느낀 금경태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응급실 문제라니요?”

“다른 병원들 움직임을 보니까 응급실을 전담하는 과를 만드는 것 같더군요. 뭐 반드시 따라가야 하는 일은 아니지만, 보다 전문적인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닙니까.”

금경태 과장도 응급 의학과가 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 병원은 이미 시기를 놓쳤고, 정식으로 개설하기 위해서는 준비만 해도 몇 년은 족히 걸릴 일이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지금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응급 의학과를 만들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많지요. 그래서 일단 일반 외과만이라도 밤에 발생하는 일반 외과 응급 수술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생명이 위급한 환자들을 커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합니다.”

“이사장님의 뜻에는 십분 동의하지만, 죄송하게도 현재 인력으로는 생각도 하기 힘든 일입니다. 야간 당직을 전담할 인력을 구할 수가 없을 겁니다. 경제적인 문제야 맞출 수 있다고 하지만, 일 년 내내 당직을 서야 하는 일을 누가 하겠습니까? 일반 외과 응급 수술은 시간을 미루기도 쉽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동석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별로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표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여러 문제가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마침 적임자가 나타나, 나도 이 문제를 정식으로 추진하게 된 겁니다.”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요 보직에 오르기 위한 첫 단계인 응급실 과장은 전통적으로 일반 외과가 맡아 왔다. 올해는 이혁민 교수를 밀어내고 임동완 교수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최근에 들어와 자신의 뜻에 확실하게 반대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식으로 추진을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일반 외과에 관한 많은 일들이 이미 결정됐다는 말이었다. 파트 문제와 박경일 과장 및 송동화의 발령을 들으면서 내심 들었던 불안이 확신으로 변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눈가를 좁힌 금경태 과장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적임자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설마 우리 과 내에 자원하는 교수라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넓게 보면 틀린 말도 아니군요. 음성의 이준영 과장을 서울 일반 외과로 발령할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응급실은 일반 외과에서 관리를 했고, 이준영 과장도 음성에서 상당히 많은 수술을 하고 있더군요. 본인도 결정만 되면 동의를 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금경태 과장이 입도 열지 못했다.

‘이준영! 누가 수작을 부린 거지? 설마 이혁민 네가?’

인생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이준영 과장이 서울로 온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일전 음성 병원의 수술 상황을 보고받으면서 이준영 과장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용인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간 진평호에 정갑수까지 이러저런 일들이 많았고, 마음대로 인사권을 휘두를 수도 없는 상황이라 잠시 뒤로 미뤘을 뿐이었다.

금경태 과장이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이준영 과장이라면 최근 다시 수술은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미 의료 사고로 인해 수술을 못했던 사람입니다.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서울 병원의 응급실을 맡기기에는 부적합한 사람입니다.”

“그래요. 이 교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신동석이 처음으로 이혁민 교수의 의견을 물었다. 언뜻 단순한 질문인 것 같지만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금경태 과장을 확실하게 견제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혁민 교수가 나직하게 헛기침을 했다.

“저는 합당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리어 이전의 문제가 외과 의사로서의 이준영 과장님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사장님이나 과장님의 말씀대로 이미 음성 병원의 상황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 교수님.”

오상익 교수가 뜸을 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금경태 과장에게 일반 외과를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야 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준영 과장이 동의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겁니다, 이사장님.”

금경태 과장의 눈에서 불길이 쏟아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