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25화 (225/1,329)

제2화 누구나 자신이 한 일의 대가를 치른다 (2)

모든 신경이 날카롭게 서며, 온몸의 호르몬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데메롤 중독으로 정갑수의 몸은 이미 이런 상태를 견딜 수가 없었다. 정갑수의 눈빛이 이상해졌다.

“갑수야, 너 왜 그래? 정신 차리고 어서 해명을 해.”

“아버지, 뭘요? 난 아니야. 정말 아니야. 그년이 날…….”

고개를 젓던 정갑수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변했다.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던 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지며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정한득이 비명을 지르고, 크게 놀란 김지훈이 재빨리 달려가 정갑수를 살폈다.

느린 동공 반사.

오한이라도 나는 것처럼 떨리는 몸.

심한 불안 증세와 가쁘고 얕은 호흡.

‘설마 금단증상?’

순간 의심이 들었지만 정갑수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급히 정갑수를 업고 응급실로 달려갔다.

급한 처치를 마쳤을 무렵, 내과 교수가 내려왔다. 이리저리 정갑수의 상태를 살피던 내과 교수가 징계 위원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물 중독 증세인 것 같습니다만…….”

내과 교수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명백한 증거나 확신을 갖지 않고서는 전공의가 데메롤에 중독됐다는 소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병원에 근무하는 의료진들에게 가장 흔한 약물 중독은 바륨과 데메롤이었다. 특히 데메롤은 단기간이라도 과용을 쓰면 중독을 유발할 정도로 강한 마약성 진통제였다. 한 번 달콤한 쾌감을 느끼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약물이기도 했다.

이혁민 교수가 정갑수가 보였던 증상을 말하며 물었다.

“혹시 데메롤하고는 관련이 없을까요?”

“말씀하신 증상을 볼 때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한데요. 급성 중독에서나 보일 수 있는 증상입니다. 혈관으로 투여를 했다면 모를까.”

눈가를 좁힌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 정갑수 옷 좀 걷어 올려 봐라.”

김지훈이 정갑수의 옷을 벗겼다. 환하게 드러난 두 팔에 점점이 주삿바늘 자국이 나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한득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금경태 과장은 혀를 차며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이놈의 자식이 날 죽이려고 환장을 했구나. 데메롤 중독도 모자라 교수들 앞에서 금단증상까지 보이며 쓰러져? 제길! 큰일 날 뻔했어. 가만, 이게 나쁜 일만은 아니네. 정갑수, 네놈이 내 책임까지 다 떠맡고 가면 되겠다.’

이 와중에도 혼미해진 정신 사이로 정갑수의 육신이 데메롤을 달라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김지훈이 온몸을 덜덜 떨고 있는 정갑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정갑수에겐 무수히 많은 기회가 있었다.

온전한 사랑을 했다면.

데메롤에 손을 대지 않았다면.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말했다면.

최소한 수술 기록지라도 정확하게 적었다면.

‘그중의 하나라도 하지 않았다면 정갑수의 인생이 달라졌을까? 아니겠지. 나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실수를 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 실수와 잘못들을 무심코 지나치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겠지.’

문득 오늘은 잘못한 일이 없는지 생각이 든 김지훈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

금경태 과장이 혁신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전권을 갖고 직접 마약류 조사에 나섰다. 사안이 워낙 엄중한 데다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며 침통함을 금치 못하는 모습에 병원 관계자들이 입을 열지 못했다.

서울 병원이 발칵 뒤집혔다. 전 병동에 비치된 마약류의 수량을 확인하는 작업이 엄격한 감시하에 이루어졌다. 평소 반 알의 마약이나 반 앰플(ample)의 주사용 마약제들은 불가피하거나, 혹은 자연 손실로 처리됐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용처와 폐기 사유 및 일자까지 정확하게 보고해야 했다.

처방 없이 사용된 데메롤의 양이 적지 않았다. 결국 마약류를 관리하던 인력은 물론 간호과 과장과 부장까지도 관리 소홀로 경고성 문책을 당했다.

정갑수가 일으킨 일의 여파가 워낙 커, 금경태 과장의 책임이 사소한 문제로 치부됐다.

중환자실 간호사인 이명희의 자살 기도와 정갑수가 데메롤 중독이었다는 사실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금단증상으로 내과 1인실에 입원한 정갑수를 동정하는 시선은 없었다. 치료를 위해 드나드는 간호사들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신고를 받고 조사를 나온 경찰들에게 적극적인 조사까지 부탁할 정도였다.

병원 분위기는 뒤숭숭했지만 김지훈을 보는 시선이 확 달라졌다. 특히 응급 상황에서 동맥을 봉합했다는 소리에 외과 쪽 전공의들은 믿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간호사들 역시 이명희를 살렸다는 사실 때문인지 김지훈만 보면 생글생글 웃으며 전에 없이 친근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김지훈에겐 또 다른 근심이 생겼다. 고경아와 이명희의 눈물 때문이었다.

이명희는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다. 육체적인 문제는 회복만 되면 별것 아니었지만, 자살을 기도했기 때문에 24시간 감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드레싱을 할 때마다 이명희의 우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김지훈이 할 수 있는 일은 치료를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데메롤 문제는 물론 배 속의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명희와 부모가 해결할 문제였다.

가장 친했던 고경아가 거의 보호자 역할을 대신했다. 같은 간호사라는 덕에 중환자실 출입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지만, 그만큼 이명희를 각별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고경아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잠깐 시간을 내 거의 12시가 다 돼 집으로 가는 고경아와 만났다. 병원과 이어진 골목은 한산하기만 했다.

“지훈 씨, 회복에는 문제가 없겠죠?”

“일이 주 정도면 상처는 다 나을 겁니다. 하지만 정신적 충격도 그렇고, 데메롤 문제까지 걸려서 걱정이네요.”

“처벌을 피할 수는 없겠죠?”

“그럴 것 같아요. 하지만 데메롤을 빼돌리기만 했고, 맞은 적이 없다면 정상 참작이 될 수도 있다는 말들을 하네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경아 씨 몸도 챙겨야지요.”

“전 괜찮아요.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요? 배 속의 아이는 또 어떻게 하죠?”

고경아가 눈가를 훔쳤다. 이명희의 잘잘못을 떠나 정갑수가 원망스럽기만 한 모양이었다. 김지훈도 할 말이 없었다.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과 실수로 이명희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었다. 착잡한 기분에 물끄러미 고경아를 보던 김지훈이 슬며시 손을 잡았다.

‘경아 씨, 힘내요. 잘될 거예요.’

‘고마워요, 지훈 씨. 사랑해요.’

많은 의미가 담긴 눈빛이 오고 갔다. 고경아가 살며시 김지훈의 어깨에 기댔다. 편안하고 따스한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졌다. 오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만 두 사람을 포근하게 비추고 있었다.

한동안 고경아의 체온과 숨결을 느끼던 김지훈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경아 씨, 들어가 봐야겠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지훈 씨도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고경아가 모처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고경아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김지훈이 시계를 보며 부리나케 달렸다. 피곤 때문인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발의 감각이 둔하게 느껴졌다.

‘어휴! 오늘 일은 또 언제 끝내나. 자고 싶다.’

조그만 행복과 여유에도 그만한 대가가 따랐다.

그게 1년차였다.

정갑수의 일 때문에 일상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에 쓰러질 판이었다.

더구나 무슨 일인지 신기동 교수가 잔인해졌다.

“김지훈, 정신 똑바로 안 차려? 여기서는 이렇게 해야 할 거 아냐. 이래서 너 수술이나 제대로 하겠어?”

“죄송합니다, 선생님.”

“어쭈! 이것 봐라. 너 공부 안 해? 혈관 수술의 기본은 해부학이야. 신경이 어디로 지나가는지, 다른 중요 구조물은 없는지 정도는 알고 들어와야 할 거 아냐?”

“죄송합니다, 선생님.”

루빼를 쓴 채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기괴하게 보일 정도였다. 고경아가 보는 앞에서 하도 태우는 탓에 얼굴이 난로처럼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선생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지금도 잠을 거의 못 잡니다.’

의사가 기본을 모르는 것은 죄였다. 입도 벙긋거리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 부탁하고, 또 부탁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병동으로 나오면 차라리 수술 방이 그리울 판이었다.

“정말 갑갑하다, 현수야. 우리 왜 이러니?”

“나도 갑갑해.”

교수들은 물론 이삼 년차들의 분위기가 싸늘하다 못해 살벌할 지경이었다. 웃음소리를 들어 본 적이 언제인지 모를 정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 외과 입장에서 정갑수의 일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과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간의 일에 이명희와의 일, 그리고 데메롤 중독 사건까지 겹치자 모두들 사소한 일에도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현수야, 오늘 일석이하고 경석이 형은 봤어? 좀 나졌나?”

“못 봤어.”

“아! 딱 두 시간만 두 발 뻗고 잤으면 원이 없겠다.”

“응급실이나 조용했으면 좋겠다.”

신현수가 이마를 주무르며 눈가를 비볐다.

“현수야, 너 혼자 수술 스케줄 챙기게 해서 미안하다.”

“내일은 니가 혼자 해야 돼.”

“신기동 선생님 수술이 세 개나 있는데 큰일 났네.”

“난 오상익 선생님 수술만 세 개야. 그중에 대장암이 두 개다. 임동완 선생님 치질 수술까지 하면. 어후!”

김지훈과 신현수가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 종일 각자 할 일을 하다 보면 밤이 늦어서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했는지 서로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참 묘했다.

‘현수야, 너 아니었으면 이 정도로 버티는 게 불가능했겠지? 고맙다. 넌 정말 꼭 이기고 싶은 라이벌이야.’

‘김지훈, 너도 꽤 대단한 놈이다. 하지만 난 절대 지지 않아. 혈관 수술? 2년차 때는 어떻게든 신기동 선생님 파트를 돌 거야. 확실하게 배워서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기다려.’

사방이 온통 깜깜하고,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이상하게 뿌듯했다. 곧 1년차가 끝난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힘든 생활을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 주가 거의 다 지나도록 깊게 가라앉은 의국 분위기는 회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1년차로서 맞는 마지막 주말이 왔다. 이제 일주일 남은 것이다. 드디어 손일석과 이경석이 그나마 온전치는 않지만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 예상보다 빠른 복귀였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손일석의 찬란한 유머 감각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일주일 만에 복귀했는데 의국 분위기가 이게 뭐냐. 제길! 그러게 무단이탈 했을 때 바로 내보냈어야 했어. 경석이 형, 안 그래요?”

“그러게 말이야. 최고의 조건을 가진 놈이 최악의 상황에 빠졌으니 정갑수도 참 불쌍한 인생이다.”

“데메롤까지 손을 댔는데 뭐가 불쌍해요? 그 간호사만 불쌍한 거죠. 어쩌다 그런 인간을 만나서. 쯧!”

김지훈이 한숨만 푹푹 쉬었다. 정갑수가 불쌍하다거나,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 답답해지는 가슴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간 밀린 일을 하다 말고 김지훈이 엎어졌다. 신현수는 이미 꿈나라에 간 지 오래였다. 손일석이 입맛만 쩝쩝 다셨다.

“정말 미안해 죽겠네. 그런데 형, 수술을 정식으로 받아도 힘든 게 혈관 수술인데, 응급실에서 동맥을 봉합했다니 지훈이 이 자식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그 소릴 듣는 순간 머리가 띵해지더라니까요. 그런 판국에 난 병실에서 시간만 죽였다는 게 속상하네요.”

손일석의 목소리가 침울했다.

“지훈이가 그만큼 노력했잖아. 그리고 너도 만만치 않게 엑설런트하니까 속상해할 필요 없어. 잘 알면서 왜 그래?”

“강적 두 놈이 앞을 딱 가로막고 있는데 고걸 넘기가 정말 어렵네요. 나도 노력한다고 하는데 답답해서 그래요.”

이경석이 차트를 보다 말고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난 어떻게 하라고 엄살이야, 인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드레싱부터 하자. 차팅을 해 주고 싶어도 아는 게 있어야 하지. 어휴! 목이야. 정말 세게 받히긴 한 모양이다.”

“나이 먹어서 회복이 느린 거예요. 세월을 누가 이겨?”

“뭐? 이 자식이 정말.”

손일석이 언제 그랬냐는 듯 혀를 날름 내밀며 휙 사라졌다. 이경석이 급히 쫓아가다 말고 목을 잡았다. 역시 젊음이 좋긴 좋았다. 어느새 드레싱 카를 끄는 소리가 병동을 울리고 있었다.

그렇게 토요일이 지나고 일요일이 왔다. 그런데 주말 당직도 아닌 금경태 과장과 이혁민 교수는 물론 오상익 교수까지 병원에 나왔다. 의아한 일이었다.

‘일요일인데 다들 웬일로 나오셨지? 정갑수 일이 아직 안 끝났나? 간만에 잠을 잤는데 피곤하긴 마찬가지네. 현수는 아직 안 일어났나?’

손일석과 이경석의 배려로 밤새 잠을 잔 김지훈이 기지개를 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후, 3명의 교수가 재단 이사장실로 향했다. 우연히 이를 본 김지훈의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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